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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10과 "묵상과 생활" 본문
제가 쓴 내용이 여러분의 성경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묵상과 생활'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정리해 보세요.
- 서호 이경환 라파엘(고촌 본당) 드림
사도행전 제10과 "묵상과 생활"
1) 바오로에게 하신 26,16-18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의미를 새겨 봅시다. 또한 내가 영적으로 눈을 뜨고 어둠에서 빛을 본 체험이 있다면 요약해 봅시다.
저는 사도행전 26장 15절부터 18절에 있는 내용을 다시 읽으며, 바오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해설서 366쪽부터 370쪽에 제시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의미를 새겨 보았습니다. 바오로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삶의 방향으을 바꾸어 말씀의 종으로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복음 말씀을 살펴보면, 바오로가 묻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분이 이르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26,15). 그리고 그분이 나타나신 목적은 직접 바오로를 “당신의 종”으로, 또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앞으로 너에게 나타내 보일 것의 증인”으로 택하여 부르시기 위함이다“(26,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가 특별히 증언할 내용은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 곧 다마스쿠스 체험과 그에게 계속 새롭게 ”나타내 보일“ 주님의 계시입니다. 이 부르심과 계시는 바오로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었고, 그가 선포하는 복음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를 이 백성과 다른 민족들에게서 구해 주겠다.“ 이 약속과 함께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낸다“(26,17)고 말씀하시며 바오로를 파견합니다. 이렇게 바오로가 파견된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이 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며,
둘째로 그들이 무지의 어둠에서 복음의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결과로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이들(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상속 재산(곧 구원 또는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에게서 ‘받게’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영적으로 눈을 뜨고 어둠에서 빛을 본 체험을 아직은 경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도 자체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이 나이가 되도록 지나온 나의 삶이 ‘향기 있는 삶’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가족들이 내가 살아온 삶을 바라볼 때, 그 삶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향기 있는 삶’이었다면 나의 신앙생활 모습이 내 이웃이나 가족에게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주어, 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나약한 인간인지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복음의 증인이나 선포자가 되기보다는 그 반대로 부끄러운 삶으로 비추어진 일이나 사건들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앞서기만 합니다.
저와 함께 20년을 교육부에서 형제처럼 같이 생활하며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사랑하는 일들을 하고, 퇴임 후에도 봉사활동을 함께 하였던 함수곤 편수관은 "사람냄새" 나는 향기로운 삶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습니다.
사람 냄새/ 함수곤(전 교육부 편수관리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바른 길을 걸으며
멋과 낭만, 유머와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여운이 있는 사람
잘난 체 우쭐대며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움츠리고 비굴하게 열등감을 갖지도 않은 사람
그저 소박하고 순수하고 구수한 사람,
느긋하고. 넉넉하고, 너그러운 사람
이런 사람과 함께 걷고 싶고, 같이 지내고 싶습니다.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요.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을 보아도
둔감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속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감동적인 편지를 받거나 아름다운 사진을 받고서도,
훌륭한 저서나 논문을 받고서도 묵묵부답으로 침묵하며
답신 한 줄이나, 전화 한 통 주는 데 인색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감성이나 정만 없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기초. 기본도 안 된 사람들입니다.
학교는 다녔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내세우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도 않은 사람,
겸손하고 의리가 있고 배려가 깊은 사람이 좋습니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면서도
남을 조금도 칭찬할 줄 모르는 무심하고 싸늘한 사람
장점을 외면하고, 남이 잘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의 고생과 어려움을 잘 들어 주고 위로해 주고
그 사람을 대신해서 알리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힘을 모아 주는 사람이 사람 냄새 나는 사람입니다.
계산만 하고, 따지기를 좋아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귀찮은 일은 요리조리 피하면서
이모저모 재기만 하는 영악하고 타산적인 사람은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가까이하기가 꺼려집니다.
저는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사람 냄새 폴폴 풍기면서 말입니다.
”주님, 나의 삶 자체가 복음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게 하는 ‘향기 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2) 바오로가 보여 준 신앙의 확신으로 위기에 처한 공동체가 어떻게 구원되는지를 살펴보며(27,32-44), 하느님께서는 나를 도구로 쓰시어 내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주려 하시는지 묵상하여 봅시다.
저는 먼저 사도행전 27장 32절부터 44절까지 다시 읽으며 바오로가 보여 준 신앙의 확신으로 위기에 처한 공동체가 어떻게 구원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
바오로는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바오로는 구조를 확신하고 음식을 먹어야 ‘살아남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권고하면서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 바오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다음 그것을 떼어서 먹기 시작하였습니다(27,35). 여기서는 성찬식 때처럼 그들 가운데 계시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바오로를 통해 나누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오로를 ‘본받아’ 모든 사람이 용기를 얻어 음식을 먹음으로써(27,36), 비로소 일행이 바오로와 빵을 매개로 식탁 교제를 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허기를 달래는 빵이지만, 그것은 지금 하느님의 복을 받은 생명의 빵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제는 사람들이 바오로를 신뢰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며 빵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보호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과 구원을 기대하는 보인 것입니다(27,33-38). 예수님께서 그러하듯 사도들과 그들에게서 이어오는 교회는 바로 구원의 본보기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군사들은 수인들이 헤엄쳐 달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들을 죽이기로 계획하였으나, 백인대장은 바오로를 살리고자 하였으므로, 명령을 내려 헤엄칠 수 있는 이들은 먼저 뛰어내려 뭍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널빤지를, 일부는 부서진 배 조각을 타고 가게 하여 모두 무사히 뭍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단계와 백인대장과 같은 믿지 않는 삶의 협력을 통해 바오로와 항해하는 모든 사람을 구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27,24)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자연환경과 여러 사람의 선의를 활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나를 도구로 쓰시어 내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주려 하시는지 묵상하여 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나를 도구로 쓰신 것일까? 나와 아내, 그리고 가족들을 성당으로 인도하시고,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게 한 것도 하느님의 도구로 쓰실려고 하신 것일까? 그렇다면 여러 가지 봉사활동 중에서도 신부님을 도와 성체 분배 활동을 6년 동안 한 것은 교회 공동체에 삶의 본보기를 보여달라고 요청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7년 동안 여러 형태로 성경 공부를 하게 하여 나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시고 나의 믿음을 지켜주신 것도 내 가족, 내 이웃에게 나를 믿음의 본보기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확신을 갖게 해 줌으로써 내 자신이 참으로 조심스러워지기만 합니다.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사도행전 공부를 하도록 이끌어 주신 봉사자님과 함께 공부한 고촌 성당 자매님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기쁨을 함께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복음 선포의 길이 막혀있는 북한과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거부하는 사람들 위하여 가톨릭 공동체의 협력으로 복음 말씀이 널리 선포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3) 사도행전보다 700여 년 앞서 기록된 이사야서의 저자와 그 시대 사람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28,26-27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요? 이사야의 예언과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28,28)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이 말씀이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상기하여 봅시다.
사도행전 28장 26절부터 27절에 있는 말씀을 여러 번 읽어 보면서, 사도행전보다 700여 년 앞서 기록된 이사야서의 저자와 그 시대 사람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사도행전 28장 26절부터 27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묵상은 제가 이해하기에도 어려움이 많아서 해설서 390쪽에서 393쪽에 있는 내용을 인용해 가며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바오로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유다인들을 두 갈래로 나누이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오로의 말과 해석을 “받아들이고” 그가 전한 복음의 메시지에 긍정적으로 응답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들은 바오로의 말을 믿지 않고 배척합니다. 이렇게 서로 의견을 달리한 채 떠나려고 하자, 바오로는 그들에게 성령과 예언자의 말, 곧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말을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지당합니다“(28,25).
'너는 저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28,26) 이러한 미래가 예견되는 까닭은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28,27) 라고 하여 그들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며 마음을 무디게 가지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27절에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는 하느님의 구원은 먼저 충실한 유다인들에게 주어지며, 지금까지 상당수의 유다인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을 무디게 만든 것이 아님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귀먹고 눈멀고 둔한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책임이라는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과 사도행전 28장 28절에 있는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이 말씀이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바오로는 복음을 먼저 유다인들에게 전하였지만 믿지 않으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끝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이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28,28). 바오로는 유다인들이 복음을 믿고 이방인들에게 전하여 그들까지 하느님의 백성으로 끌어들이기를 바랐고 또 부분적으로 그렇게 되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유다인들이 불신하여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구원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밝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유난히 민감한 열성적인 유다인들이 그 말씀을 거부하는 반면, 그들의 믿음에 이끌린 이방인 특히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오히려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긴 여정을 통해 바오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재건 곧 하느님의 다스림은 유다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미치고, 재건된 이스라엘에는 유다인과 함께 다른 민족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는 역설이 있으며, 그분은 인간의 이해와 협조가 있을 때뿐 아니라 오해와 반대가 있을 때에도 뜻하신 대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의 말씀을 이끌어 주신 성준숙 봉사님과 그리고 사도행전의 복음 말씀을 함께 배우고 익힌 고촌 본당 자매님들에게 하느님의 더 큰 은총과 기쁨을 내려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촌 본당 : 이경환 라파엘)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57)
“여러분은 하느님의 이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사도 28,28)
지금까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신약성경 각 책의 간단한 신학을 정리하는 것보다 사건의 흐름에 맞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복음의 순서에 따라 간단히 특징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사건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좀 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내용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에서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사도들의 활동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열두 제자들의 활동과 이방인의 세계, 특별히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방에 복음을 전한 바오로 사도와 그 동료들의 활동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행전은 오히려 바오로의 복음 선포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역할은 단지 복음 선포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한 바오로는 이미 복음을 전한 곳을 다시 방문하기도 하고 또 일부 문제에 대해서는 편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가르침을 주고 그들의 신앙이 바른 길을 찾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은 당시 초대 공동체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나 그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보내진 편지는 모두 13편입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7편의 편지만을 일반적으로 ‘바오로 친서’로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편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친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ㆍ둘째 서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입니다. 이 일곱 편지를 제외한,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쓰인 6개의 편지는 ‘차명 서간’이라고 부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다른 이들이 바오로라는 이름을 빌려서 편지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이러한 구분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오로 친서이든 차명 서간이든 이 편지들에서 전하는 신학적인 내용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차명 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이유에서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바오로의 동료들이나 그의 신학을 이어가는 제자들에 의해 쓰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친서보다는 차명 서간들이 좀 더 후대에 쓰였고 내용적으로도 좀 더 발전된 후대 교회에 대한 권고들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 담긴 바오로 서간은 편지의 길이에 따른 구분입니다. 서간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로마서는 가장 먼저 쓰인 편지가 아니라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입니다. 바오로 서간의 연대에 대해 여전히 명확한 것은 없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에 언급된 사건들을 통해 대략의 연대를 추정할 뿐입니다. 또한, 편지가 쓰인 순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사람이 공통으로 생각하는 서간의 순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ㆍ둘째 서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정도입니다.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은 사람에 따라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보다 앞선 것으로 보기도 하고 가장 마지막에 쓰인 바오로의 친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편지는 모두 바오로 사도가 옥에 갇혀있을 때 썼다고 본문에서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때가 에페소에서인지, 카이사리아에서인지 로마에서인지 쉽게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세 번에 걸쳐 감옥에 갇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이 바오로 사도의 행적을 보여 준다면 그의 가르침과 신학은 서간에 잘 드러납니다. 바오로 서간은 친서부터 시작해서 서간이 기록된 순서에 따라 물론 순서에 대해 다른 주장들도 있을 수 있지만 살펴볼 생각입니다. 낯선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방법을 통해 바오로 사도의 신학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편집 : 西湖 李璟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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