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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傳 金弘道 筆 平安監司饗宴圖) 본문

박물관 이야기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傳 金弘道 筆 平安監司饗宴圖)

불꽃緝熙 2020. 4. 16. 21:24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傳 金弘道 筆 平安監司饗宴圖), 조선, 종이에 채색(紙本淡彩), 세로 71.2cm, 가로 196.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대동강 위에는 평안감사가 탄 배를 중심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및 관선官船이 늘어서 있고 뒤로는 관기官妓들이 탄 배, 음식을 준비하는 배, 사대부나 아전들이 탄 작은 배들이 따르고 있다. 강가에서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있으며, 성 안 마을 집집마다 환영 깃발이 세워져 있다. 평양에서 열린 잔치의 화려한 면모를 볼 수 있다.

《평양감사향연도》는〈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의 세 폭으로 구성되었다. 평양감사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살구꽃이 활짝 핀 어느 봄날, 장소를 달리하면서 세 차례의 연회가 열렸다. 제일 먼저 부벽루에서 열렸고, 그 다음이 연광정이다. 마지막은 밤이 되어 횃불을 밝히고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는 순서이다.

《평양감사향연도》중〈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평양감사향연도》중〈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는 성벽으로 표현된 대각선에 의해 양분된 두 부분은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성벽 왼편으로는 평양감사의 부임을 축하하는 연회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오른편으로는 대동강의 모습과 중간에 떠있는 듯 보이는 섬의 모습, 그 뒤편으로 펼쳐진 산과 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각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왼편에 보이는 연회의 장면은 매우 세밀하고 오밀조밀하다. 성벽안 쪽의 중간쯤에 있는 누각에서 연회가 한창이다. 누각 속에는 감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시중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누각 앞쪽으로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고, 그 앞으로 펼쳐진 앞마당에는 7명의 악사가 앞줄로 늘어 앉아 있고, 그 중 한명은 일어서 있다. 그는 피리를 부는 듯 보이며 나머지 여섯명과는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있다. 무용수들은 처용무, 칼춤, 북춤을 추고 있다. 좌우로는 기녀들이 앉아 있고, 그 뒤로는 무기와 깃발을 든 호위 사령들이 도열하여 있다.

《평양감사향연도》중〈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평양감사향연도》중〈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평안감사가 중앙의 연광정에 앉아 기녀들의 춤과 노래를 즐기고 있다. 동시에 그 밑의 마당에서는 두 선비가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시합을 하는 것 같으며 그 주위로 많은 인파가 구경을 하고 있다. 대동문 앞 시가지에는 물지게를 메고 있는 사람, 엿을 파는 아이까지 다양한 풍물이 담겨 있다. 연광정은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대동강변 덕바위 위에 있어 덕광정이라고도 불렸으며, 두 채를 비켜 붙여 지어 뛰어난 건축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정자로 꼽히고 있다. 오른쪽 누각은 문루에서 손을 내밀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릴 수 있다는 데서 지어진 대동문, 즉 읍호루(挹灝樓)이다. 연광정의 좌우에는 이 《평양감사향연도》에서 처음으로 백성들이 사는 민가가 그려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잔치를 열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평양이 경제적으로 번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중앙으로 가는 세금이 없기 때문에 이를 군비나 자체적으로 쓰게 되었다. 특히 중국사신 접대비용을 평안도에서 담당하였다. 중국 사신들이 머문 곳은 평안감사가 있는 평양이었으므로 이곳에는 평안도의 물력이 총동원되었다. 1750년대 평안도에 상업 발전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로 인해 1774년 인구가 경상도 다음으로 많아 인구와 물자가 몰리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번성하였으로 서울 다음으로 지방에서는 평양이 제일 부유한 동네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3대 상인 중 평안도 의주에 만상이 있습니다. 이는 평안도 의주에 물류가 많고 사람이 많아 부가 쌓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평안도는 번성하였는데, 그중에서 평양은 부를 가지고 있는 동네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민가를 살펴보면 초가집이 대부분이지만 안에 기와집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함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성들이나 그림에 나온 사람들이 입은 옷들은 보면 색깔이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평양이 부유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인데, 색깔이 다른 옷들은 비단이나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한 옷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얀색 옷보다는 색깔이 들어간 옷이 더 비싼데, 그림에는 여러 색의 옷이 있기 때문에 이 또한 평양에 사는 백성들이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연광정 위와 아래에 모두 두 마리의 사자가 보이고, 그 아래에 다시 청학(靑鶴)과 황학 (黃鶴)이 나란히 서 있으며, 작은 채선(彩船)과 두 송이 연꽃이 보인다. 그러므로 연광정에서는 학무·연화대·사자무·선유락이 연행되었을 것이다.

《평양감사향연도》중〈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이 그림의 기초 자료인〈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는 평양성 대동문 앞 강 위에 커다란 평저선(平底船, 밑바닥이 평평한 배)이 떠 있다. 그 배의 뒤쪽에 근엄한 표정의 감사가 의자 위에 앉아 있다. 감사의 오른쪽으로는 기생들이 앉거나 서 있고, 앞쪽에는 악사들이 풍악을 울리고 있다. 감사를 태운 배 앞뒤에는 호위하는 군관과 군졸을 실은 좁고 긴 배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구경 나온 평양부민들의 작은 배들이 감사 일행을 둘러싸고 있다. 성벽 위와 그림 아래쪽 강변 모래사장에는 횃불을 든 사람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서 있다. 강물 위에도 여기저기 횃불을 지폈다.

횃불을 환하게 밝힌 배 위에서 기생에 둘러싸여 풍악을 즐기고 있는 평양감사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해 보인다. 그러니 감사 가운데 평양감사를 제일로 쳤던 모양이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저 멀리 성벽 위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옷은 그림이 너무 작고 성벽에 가려 제대로 알 수 없다. 반면에 아래쪽 강변 모래사장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옷은 완벽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잘 파악된다. 모래사장 위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신분은 상민이다. 물론 이것은 지금부터 규명해야 할 과제이다.

〈월야선유도〉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모래사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횃불은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묶은 다음 불을 붙인 것인데, 보통 싸리나무를 많이 썼다. 모래사장의 많은 사람들이 든 횃불은 나뭇가지를 많이 묶지 않아 굵기가 한 아귀에 잡힐 만하다.

〈전 김홍도 평생도(傳 金弘道 平生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부분, ‘정승 행차(政丞行次)’ 장면을 보면, 행렬의 맨 앞에 선 두 사람이 커다란 나뭇단에 불을 붙여서 등에 지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이것도 횃불이라고 불렀을까? 다른 이름이 있었을 듯한데 알 수는 없다. 차라리 불짐이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커다란 싸릿가지 나뭇단의 꽁무니에 불을 붙여 짊어졌으니, 그 사람의 엉덩이와 바짓가랑이에 금방이라도 불이 옮겨 붙을 기세다. 그들은 아마 엉덩이쯤이야 데어도 좋을 천한 신분의 종이었을 게다.

임금이 밤중에 행차하거나 군대가 야간에 조련(操鍊)할 때에는 길가에 횃불을 세우거나 꽂았다. 1752년(영조 28)에 영조가 의릉(懿陵,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능)에 행차했다가 밤중에 가마를 타고 돌아올 때, 횃불을 꽂지 않아서 공조(工曹)의 당상관들이 엄한 문초를 당한 적이 있었다. 왕실이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횃불을 밝혔다. 그밖에 궁궐과 관청의 갖가지 야간 행사에서도 횃불을 밝혔다.

횃불을 묶는 데 쓰이는 나뭇가지는 기인(其人)이라는 특수한 역을 진 사람들이 공물로 바친 것이다. 예로부터 기인의 역은 고달팠다. 임금의 행차가 통과하는 고을의 원님들은 백성에게 돈을 거두어 그 비용을 충당했다.

1740년(영조 16)에 용인현감이 횃불 하나에 2냥씩 돈을 거두어 말썽이 난 적도 있었다. 사당에 불천위를 모신 대종가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밤이면 집에 딸린 종이나 마을 하층민들에게 사당 주변에서 횃불을 밝히도록 했다. 대개 홰꾼(炬軍)이라 하면 이렇듯 신분이 천하거나 낮은 사람들이었다.

〈월야선유도〉에 나오는 횃불과 홰꾼이 동원된 전후 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횃불 비용이 평양부민으로부터 직접 징수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강변에 사는 백성이 홰꾼으로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사 일행의 뱃놀이를 밝히기 위한 노역이긴 하지만, 전체 분위기가 마치 축제와 같아 횃불을 들고 있는 홰꾼들의 행동거지가 그리 고달파 보이지는 않는다.

홰꾼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고, 뒤쪽 모래사장에는 많은 구경꾼이 서성거리고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나온 가족도 있다. 오랜만에 장관을 구경해서인지 모두들 신명이 난 표정이다. 구경꾼 가운데는 양반 신분으로 보이는 인물들도 꽤 있다. 양반 신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그림은 복식사의 사료로서 가치가 더욱 높다. 왜냐하면 상민과 양반의 복식이 확연히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월야선유도〉의 아래쪽 모래사장에서 횃불을 들거나 구경하는 사람은 총 224명이다. 이 가운데 관복이나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모두 관직이 없는 백성으로, 서인(庶人)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다. 분석의 편의를 위해 모래사장에 있는 224명에게 각각 일련번호를 붙였다. 그리고 사람별로 모자, 옷, 신발의 차림새를 살피고 몇 가지 형태로 구분해 일람표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조선시대 생활사 3 -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저자, 한국고문서학회, 사비평사 / 글: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를 주로 연구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이다. 주요 저작으로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가 있으며, 최근에는 18~19세기 물가사와 시장사를 연구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정리: 이영일, 전) 문화재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