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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경산수화,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본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은 인왕산 남쪽 기슭에서 백악 계곡에 이르는 장동 지역, 현 효자동과 청운동 일대의 가장 뛰어난 여덟 군데의 승경을 종이에 수묵으로 세로 33.1cm, 가로 29.5cm 크기로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그 대상은 백운동(白雲洞), 대은암(大隱巖), 청풍계(淸風溪), 청송당(聽松堂), 창의문(彰義門), 독락정(獨樂亭), 취미대(翠徵臺), 청휘각(晴暉閣)을 일컫는다. 성현(成俔,1439~1504)의『용재총화(慵齊叢話)』에는 서울의 5대 뛰어난 경치 중에 인왕산이 두번째, 인왕동과 백운동이 네번째 뛰어난 승경이라고 하였다.
옛 서울의 경치를 시정어린 필치로 묘사한 이 장동팔경은 현재 인왕산 군사도로와 시민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그 자취를 거의 찾을 수 없다.
백운동(白雲洞)은 인왕산의 세 봉우리 중 낙월봉(落月峯)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으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며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 안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손꼽혔다. 지금 이곳을 부르는 청운동(淸雲洞)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가 동명을 지으면서 아래 동네인 청풍계와 백운동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림의 골짜기 안에 보이는 큰 집은 원래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형부로 부귀를 누렸던 지중추부사 이념의(李念義·1409∼1492)가 짓고 살았던 저택이다. 얼마나 굉장한 대저택이었던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로 세월이 지나면서 주인이 바뀌었지만 순조와 고종 때의 기록에도 여전히 등장했던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조선말까지는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대은암(大隱巖)은 삼청동 칠보사 부근에 해당하는 곳이며, 백운동(白雲洞)은 인왕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동네이다. 그 남쪽으로 청풍계가 있는데 일제시대 때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쳐 오늘날 청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그림에는 간기가 없으나 같은 화첩내『창의문(彰義門)』에 의해 제작연대가 정선의 70세 이후임이 확인된다.
청풍계(淸風溪)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일대의 골짜기로 백운동 아래편에 있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푸른 단풍나무가 있는 계곡이라는 의미의 ‘청풍계(靑楓溪)’라고 불렸던 곳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절했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 별장으로 꾸미면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을 의미하는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한다. 19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 작자 미상의 인문 지리지인『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청풍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다.
「청풍계는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그 골 안이 깊고 그윽하며 경관이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놀며 즐길 만하다. 집 안에 태고정과 늠연당이 있어 선원의 초상화를 모셨다. 후손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창의동 김씨라 한다. 시냇물 위 바위에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 百世淸風)'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그림 가운데 기와집 뒤의 절벽이 大明日月 百世淸風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청푿대이다. 大明日月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고 百世淸風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긴 것이라 하는데 현재는 百世淸風 글자만 남아있다. 청풍대 밑 기와집이 김상용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을 늠연당(凜然堂)이고 왼쪽의 초당이 태고정(太古亭)이며, 오른쪽 기와 건물은 연못가에 세운 누각인 청풍지각(靑風池閣)이다. 정선의 청풍계 그림은 여럿이 있다. 이 그림 말고도 간송미술관소장본「장동팔경첩」에도 있고 낱개 그림으로 고려대소장본과 간송미술관소장본이 더 있다.
청송당(聽松堂)은 조광조의 제자였던 대학자 청송(聽松)·성수침(成守琛, 493~1564)이 은거하며 공부했던 독서당의 이름이다. 성수침은 우계 성혼의 아버지이다. 성수침은 중종 21년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들이 사약을 받고 화를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독서에 전념하기 위하여 집 뒤에 ‘솔바람 소리를 듣는다’는 청송당을 지었다. 북악산 자락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청송당의 개울 건너는 인왕산 줄기로 살림집이 있던 곳이다. 순조때까지만해도 청송당 주변은 온갖 꽃이 만발하여 도화동(桃花洞)이라 불렸으며 봄놀이 장소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한다.
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 4소문 중에서 서북문으로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예전에는 이 문을 나서 홍제천을 따라가면 홍제동, 홍은동, 녹번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개성 이북의 황해도와 평안도를 내왕하는 지름길로 삼았었다. 이 문은 한양 도성이 완성되는 태조 5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문루는 원래 없다가 영조 17년인 1741년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창의문으로 오르는 도로 왼편이 담으로 막혀있고 그 아래로는 청운중학교와 빌라, 주택이 잔뜩 들어서 사람 사는 동네로 바뀌었지만 정선 당시에는 이곳에 집 한 채 없었던 모양이다. 작고 큰 바위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는 사이로 솔숲이 있고 골짜기마다 개울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한적하고 그윽한 느낌이 절로 드는 풍경이다. 창의문 너머로 보이는 검은 색 바위는 인왕산의 맨 북쪽 봉우리인 벽련봉(碧蓮峯)이다.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백색 암봉(岩峯)이지만 정선은 검게 그렸다. 그림의 벽련봉 왼쪽 능선 위에 콩알만 하게 바위 하나가 올려져있다. 바위 이름이 부침바위이다. 지금도 있지만 정선의 그림과는 달리 나무에 가려서 멀리서는 안 보이고 가까이 가야만 확인할 수 있다. 벽련봉 아래 동네의 부암동(付岩洞)이라는 이름은 이 부침바위에서 나왔다고 한다.
독락정(獨樂亭)은 계곡 위에 지어진 초당(草堂)이다. 예의『한양도성도』에서 보면 육상궁 위에 위치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의 경복고등학교 길 건너편 즈음으로 추정된다. 독락정 바로 아래에 청송당이 있었다.
취미대(翠微臺)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데 같은 제목으로 그려진 다른 그림들을 종합해볼 때 백악산 남쪽 자락에 있던 한 바위를 일컫는 듯하다. 정선이 그린 또 다른 <취미대> 그림에서 두 선비가 앉아있는 바위가 취미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림 속 풍경이「경교명승첩」의 <은암동록(隱岩東麓)>과 거의 똑같다.
청휘각(晴暉閣)은 17세기 말 영의정을 지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집 후원에 세운 정자다. 김수항은 할아버지인 청음(淸陰) 김상헌이 살던 궁정동에서 출생하여 살다가, 벼슬이 높아지면서 안국동과 옥류동에 저택을 마련했다. 옥류동 저택의 사랑채가 육청헌(六靑軒)이고, 후원의 정자가 청휘각(晴暉閣)이다. 김수항의 둘째 아들인 농암(農岩) 김창협이 육청헌 뒤 석벽에서 감천이 흘러나온다고 하여 이곳을 옥류동이라 이름 지었고. ‘비갠 뒤 (맑은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집’이란 뜻의 청휘각(晴暉閣)이란 이름도 그의 뜻이 담겼다고 한다. 정선의 스승 집에 있던 정자이니 정선도 수시로 출입하였던 곳이었을 터이니, 70줄의 정선이 옛날을 추억하며 그렸을 것이다.
『백운동(白雲洞)』에서는 나귀를 타고 가는 인물이 전경에 보이며, 둥글고 원만하게 나타낸 산세며, 수묵에 담채색을 가하여 정선 특유의 개성이 돋보인다. 노년기의 완숙미를 드러내는 수작(秀作)이다. 편필의 능란한 소나무 묘법이나 기슭의 습윤한 선묘와 듬성듬성 찍은 묵점 등에서 70대 만년의 무르익은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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