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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과정의 변천 개관"(1.교수요목의 시기-9) / 이경환 본문
‘한글 첫 걸음’의 경우는 그 초판 보급 실적이 1백만 부를 넘긴 바 있고, 또 1년 만에 다시금 1백만 부를 상회했음이 주목된다. 이런 수준의 보급 실적은 정부 수립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책은 교과서인 동시에 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1947년 말 미 군정청에 의한 국정교과서 편찬 실태를 보면 모두 10종 23책에 이른다. 이 중에서 조선어학회에 의뢰하여 편찬한 6종 13책이다. 따라서 이 조선어학회는 당시의 교과서 개발 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 낸 셈이다.
또한 민간인에 의한 검인정 도서들도 상당수 개발되었다. 민간에 의한 검인정 교과서들은 주로 역사•지리, 수학, 과학, 그리고 음악, 습자 등이 다종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안정된 수요량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업계 전문 교과의 교과서들은 수요 부수가 극히 적거나 필자난에 직면하여 상대적인 빈곤 현상을 면하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의 교과용도서 검정 절차는 우선 단위 출원본을 대상으로 하여 3~5인의 교과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 위원에게 사열을 위촉하는 일로 첫 단계를 밟았다. 심사 위원은 출원본에 대한 가부를 결정한 내용의 사열보고서를 작성하여 검인정위원회에 제출하면 결재를 통해 최종 결정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즉, ‘집필 → 출원 → 심사 →발행’으로 이어지는 검정 절차가 확립된 것이다.
6•25전쟁의 발발로 ‘건국 문교’는 초기 단계에서 큰 타격을 받았으며, 교육 정책은 ‘전시 문교’로 급선회하였다. 당초의 계획은 중단되었고, ‘전시하 교육 특별 조치 요강’이라는 전시 교육 방침이 시행되었다. ‘전시 교재’가 보급되어 전쟁 중에도 학교에서는 수업을 중단하지 않았고, 열악한 환경에서나마 높은 교육열로 이어갔다. 국정 교과서의 경우, 전시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교과서만큼은 거의 전량 발행되고 있었으나, 중•고등학교의 경우에는 형편이 어려워 전쟁 발발 전에 무려 215종에 이르는 실업계 전문 교과서 발행을 계획했던 것이 전쟁 중에는 3년간의 실적이 고작 61종(보통 교과의 교과서 포함)에 그쳤다. 검인정 교과서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여 교과서 집필 자체가 무산되거나 완성된 원고가 있더라도 출판이 거의 불가능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으로는 교육과정 편성과 교과서 발행이 국가 주도 체제로 더욱 굳어졌다. 이와 함께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이데오르기 문제가 교육 내용 선정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교육에 대한 긴급 조치와 교수요목 시기 교육과정의 특징 >
a. 교육에 대한 긴급 조치 시기(1945 ~ 1946) 교육과정의 강조점
1. 법적 근거, 공포(시행) 시기
- 특징 :
• 조선 국호 사용
• 교수 용어 국어 사용
•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교과는 교수와 실습 금지
- 법적 근거, 시달 시기
• 일반 명령 제 4호(1945.9.17.) : 신조선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 지침 시달
• 일반 명령 제 6호(1945.9.29.) : 초•중등학교 교과 편제 및 시간 배당 기준 시달
2. 교과 편제 및 시간 배당
- 특징 :
•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공민과 신설
• 우리의 말과 글 중심의 국어 교육
• 우리의 국사 교육 시행
- 국민 학교 교과목 : 12 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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