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맨 아래의 '표시하기' 클릭하기>
'제144회 종묘-창경궁 주말걷기 후기'
주말걷기 회원 이경환입니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에게 제144회 주말걷기를 안내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특히 회원 여러분께서 종묘와 창경궁을 기쁜 마음으로
찾아 주셔서 더 더욱 감사합니다.
작년에도 한번 창경궁에서 종묘로 걷기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금년 5월 1일부터는 관람제도가 변경될 예정이어서
다시 한번 걷는 것도 의미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저와 집사람은 창덕궁과 왕릉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어
사실 종묘와 창경궁에 대해서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궂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질서를 지켜가며 경청해
주신 여러분들의 인내에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오기진,박정임,윤삼가,김소영,손귀연,김영자,이계순,이영례,소정자,정광자,조경애,이복주,양정옥
이영균,김소자,윤정자,홍종남,임명자,김운자,박현자,이달희,최경숙,엄명애,신난수,윤종영
박찬도,정형진,이흥주,정정균,김태종,허필수,신원영,박화서,진풍길,윤봉수,김영신
권영춘,이승원,한상진,김성기,홍수희,주재남,이경환,박해평,황문옥,이창조,함수곤 (47명)
글, 편집, 음악 : 이경환 kwhan43@hanmail.net 011-9999 -7772
사진 : 이창조 lc191@hanmail.net 010-7212-2500
144회 주말 걷기를 위해 3월 14일, 오후 3시 정각
한사모 회원들은 종묘 정문 앞에 둥글게 모였습니다.
종로3가 지하철 출구가 너무 복잡해서 바꾸어 보았습니다.
종묘가 "세계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있어 앞으로
종묘공원도 재정비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모두 47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봄날 고궁으로 소풍나온 마음이었고, 기대가 컸나봅니다.
먼저 앙부일구(해시계) 설치터, 어정, 하마비를
둘러보고 세월의 변화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종묘의 외대문(정문)은 궁궐의 정문과는 구조와 형태가 달랐습니다.
주칠을 하여 단아하고 검소하며, 판문과 홍살문이 있었습니다.
신이 드나드는 공간이어서 경건하고 고요함이 특징입니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입니다. 그런데 왜 고려 공민왕의 신당이 있을까?
조선의 역성혁명으로 희생된 넋을 위안하고
고려 유민을 위무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종묘의 못에는 연꽃이나 물고기는 없고 고요합니다.
가운데 섬에는 향나무를 심습니다. 제사의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은 바닥에서 샘솟아 나옵니다.
종묘의 가운데 길은 궁궐과는 다르게 신로이므로
옛 시대의 의미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걷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에 회원 모두가 협조해 주었습니다. 참 대단하신 분들 입니다.
재궁에 왔습니다. 임금이 제례 전날 도착하여 다음날
축시(01:00-03:00)에 제례 올릴 때까지 머물며 목욕 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며 세자와 함께 준비하던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종묘 정전입니다.(국보 제227호) 19실에 49위의
신위를 모시고 지금도 해마다 제례를 올립니다.
조선시대 가장 정제되고 장엄하며 신성한 건축물이어서
비오는 날에는 더욱 긴장감과 경외감을 느끼게 된답니다.
정전의 뒷면을 보면 모실 신위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 이어서 증축된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신실의 판문이 뒤틀려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상징적으로는 혼의 자유로운 드나듦을 나타내며,
기능성으로는 통풍과 내부 습도 조절을 위한 것이랍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두분이 무언가를 골똘이 생각하며
걷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정전 안에는 공신당과 칠사당도 함께 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조상의 신주가 공신당에 있다고
자세히 설명하는 아주머니를 본 일도 있었습니다.
왕이 돌아 가신후 27개월이 지나면 신주를 종묘에 모십니다.
위의 사진에서 어느쪽이 임금님의 신주일까요?
앞에서 보아 왼쪽(서편)이 임금님의 신주이고,
가운데는 정비의 신주이며 오른쪽(동편)이 계비의 신주입니다.
지금도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옛의식 그대로
종묘대제가 재현 봉행되고 있습니다.
영녕전(보물 제821호)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제 영녕전을 지나 언덕을 올라 창경궁으로 갑니다.
일제강점기에 응봉자락을 따라 흐르는 백두대간의 지맥을
끊어 큰 길을 내었습니다. 많은 차들이 가득하게 지나갑니다.
복원작업을 하여 2012년쯤 완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떤 모습이 될지 변화가 기대됩니다.
창경궁은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성종 14년(1483)에 창건되었습니다.
홍화문, 명정문, 명전전 모두가 동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전각이 불타 버려 광해군 8년에 중건되었으나
순조 30년(1830)에 또 다시 큰 불이 나서 세 건물만 살아 남았습니다.
아래의 사진에서 왼쪽이 1616년에 지은 명전전입니다.
가운데가 1986년에 새로 지은 문정전이고
오른쪽이 1830년에 재건된 숭문당 입니다.
200년정도 차이가 나는 세 건물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비도 피할 겸 과거시험을 보았다는 함인정에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한결같으신 박화서 님의 인절미와 커피는 오늘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다음부터는 박화서 님을 제외하고는 간식을 가져 오시지 않도록
당부의 말씀도 있었으나 잘 지켜질런지 걱정입니다.
작지만 부드러운 곡선미가 있는 우리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에
모두 감탄하며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징을 손주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내전의 침전이었던 경춘전을 지나 대장금이 환경전에서
중종 임금을 치료하였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내전의 으뜸 건물인 통명전 앞에서는 66세의 영조 임금이
15세 소녀 정순왕후 간택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통명전과 양화당을 위에서 내려다 보면 온돌의 굴뚝이
집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궁중 전각 아궁이의
땔감으로 무엇을 사용했을까? 숯을 사용하였습니다.
풍기대를 지나 성종 임금의 태실을 모신 곳으로 갔습니다.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1930년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시대 태실 대부분이 서삼릉으로 옮겨졌습니다.
태를 넣어 두었던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는 누가 가져 갔을까요?
춘당지에서는 황금빛 나는 능수버들과 백송이 멀리 보였습니다.
이 춘당지는 원래 내농포가 있던 자리입니다.
선농단에 제사를 드린 후 먹는 국에서 설렁탕이 유래되었습니다.
백송이 어떻게 심어지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녁식사는 혜화역 근처에 있는 '솔나무길 된장예술'에서
된장정식과 녹두빈대떡을 들었습니다.
신난수 회원님이 해외 나들이 길에 사오신 고급 위스키를
가져오셔서 모두 나누어 그윽한 향기를 즐겼습니다.
신난수 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회원님들이 주말걷기를 통하여 99세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바마"로 건배 제의를 하였습니다.
다섯 번을 계속 나와서 이제 정회원이 되신
세 분 신입 회원님을 함 대표님이 소개하였습니다.
김소영님, 홍수희님과 오기진님 내외분의 입회를 축하합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봄비가 흠뻑 내렸습니다.
오늘 부족한 점이 많은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신 회원님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경환(라파엘), 임명자(라파엘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