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이사야서 제4과 / '묵상과 생활' 본문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사야서" 그룹성경공부한 내용을 여기에 올리는 것이
과연 어떠할지는 하느님의 뜻에 맡가고,
부족한 내용이지만 제가 공부한 자료를 기쁜 마음으로 올려드립니다.
"이사야서"를 공부하시는 여러 형제자매님들의 배움과 묵상 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일뿐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내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4. 5. 23 김포 고촌 본당 이경환 라파엘
이사야서 제4과 / '묵상과 생활'
1.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적하고 벌을 받던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강복하시는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19,18-25).
이는 회개하는 이들을 모두 수용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혹시 내가 정말 미워하고 용서하기 힘든 이웃은 없습니까?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19,18-25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적하고 벌을 받던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강복하시는 엄청난 일을 하셨는데, 이는 회개하는 이들을 모두 수용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이라 하였습니다.
18. 그날에 이집트 땅에는 가나안 말을 하고 만군의 주님께 충성을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생길 터인데, 그 가운데 하나는 '태양의 도시'라 불릴 것이다.
19. 그날에 이집트 땅 한가운데에 주님을 위한 제단 하나가 세워지고, 그 국경에는 주님을 위한 기념 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
20. 이것이 이집트 땅에서 만군의 주님을 위한 표징과 증인이 되어, 그들이 압제자들 때문에 주님께 부르짖으면, 그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시어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21.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을 이집트인들에게 알리시고, 그날에 이집트인들은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희생과 제물을 봉헌하며 주님께 서원을 하고 그대로 채울 것이다.
22. 주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을 치시겠지만, 치신 뒤에는 곧바로 고쳐 주실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돌아오고, 그분께서는 그들의 간청을 들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
23. 그날에 이집트에서 아시리아로 가는 큰길이 생겨, 아시리아인들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인들은 아시리아로 가며, 이집트인들이 아시리아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
24. 그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아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이 될 것이다.
25. 곧 만군의 주님께서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내 소유 이스라엘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한 일들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지나온 제 삶을 되돌아보면, 나의 진실된 마음과 정성을 몰라주던 친구를 미워했던 일도 생각나고, 우리 고촌 신앙공동체 안에서 겸손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고도 시치미를 뚝 떼는 이웃을 용서하기 힘들었던 기억도 되살아납니다.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내 탓이라 생각하며 용서해 준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제 잘못이 오히려 더 컷던 것이 아니었나‘하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도 저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정말 미워하고 용서하기 힘든 이웃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지나간 세월을 되짚어 보면,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고마웠던 그 모든 일들이 오히려 더 많아 늘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 미사에서는 지난 한 주의 죄를 반성하며 고백할 때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는 고백 기도로 시작하며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1990년대에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자신의 승용차에 “내 탓이오”라고 적힌 스티커를 붙이면서 “자기를 먼저 돌아볼 때”라는 사회적 운동을 전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운동은 사회적인 큰 호응과 반향을 얻어 사회 전반에서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바로 “메아 쿨파(Mea Culpa, 내 탓이오) 정신”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으며, 독일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는 “남을 탓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숨기는 방법이다.”라고 말하였는 데, 이와 같이 자신에게만 유독 관대한 심리를 심리학에서는 ’베니펙턴스(Beneffectance) 현상’이라고 합니다.
옛말에도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이나 해결책을 군자는 스스로에게서 찾지만, 소인은 다른 사람의 탓을 한다는 뜻으로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데, 요지음에 와서도 허물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을 때 이 말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내 탓’과 ‘네 탓’이라고 하는 말이나 글은 사실 한 글자, 한 획 차이이지만, 그 결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쉬운 예로 내가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순간 상대방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검지뿐이지만, 세 손가락은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이제라도 혹시 내가 정말 미워하고 용서하기 힘든 이웃이 있다면, 우리가 미사에서 ‘내 탓이오’라고 하면서 나의 죄를 반성하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자기를 먼저 돌아볼 때”가 바로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내 일상생활에서 이웃을 미워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의 잘못에서 비롯되었음을 내가 먼저 깨닫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세상을 살아가며 내 친구와 내 이웃과 함께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큰 기쁨을 베풀어 주셔서 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천주교 고촌교회 / 이경환 라파엘]
2. 19장에서 1-4절은 이집트의 사회적, 종교적 붕괴를, 5-10절은 경제적 파산을, 11-15절은 철저한 혼란과 파괴를 연결하여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그 혹독한 심판을 주님의 강복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19장에서 1-4절은 이집트의 사회적, 종교적 붕괴를, 5-10절은 경제적 파산을, 11-15절은 철저한 혼란과 파괴를 연결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멸망
1 이집트에 대한 신탁.
보라,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시고 이집트로 가신다. 이집트의 우상들은 그분 앞에서 벌벌 떨고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은 속에서 녹아 내린다.
2 내가 이집트인들을 부추겨서 동기끼리 이웃끼리 싸우고 성읍끼리 왕국끼리 싸우게 하리라.
3 이집트 안에서 사람들은 혼이 빠지고 나는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리리라. 그러면 그들은 우상들과 혼령들 영매들과 점쟁이들에게 물어보리라.
4 내가 이집트인들을 냉혹한 군주의 손에 넘겨 포악한 임금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리라. 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5 바다에서는 물이 마르고 강은 바싹 메마르리라.
6 개천들은 악취를 풍기고 이집트의 나일강과 지류들은 물이 줄고 메말라, 갈대와 부들이 시들어 버리리라.
7 나일강 어귀 강가에 있는 풀밭과 나일강 변의 파종된 밭들은 모조리 말라, 바람에 날려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8 어부들은 탄식하고 나일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들은 모두 슬퍼하며 물에 그물을 치는 자들은 생기를 잃어 가리라.
9 아마포를 만드는 자들은 실망에 빠지고 삼을 삼는 여인들과 삼베를 짜는 자들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10 그 직조공들은 기가 꺾이고 품팔이꾼들은 모두 낙담하리라.
11 초안의 제후들은 어리석기만 하고 파라오의 현명하다는 고문관들은 우둔한 고문들이다. 그런데 너희가 어찌 파라오에게 "저는 현인들의 자손이며 옛 임금들의 자손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12 너희의 현인들은 도대체 어디 있느냐? 만군의 주님께서 이집트에 대하여 무엇을 계획하셨는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여 알리도록 해 보려무나.
13 초안의 제후들은 바보가 되고 멤피스의 제후들은 착각에 빠졌으며 그 종족들의 수장들은 이집트를 잘못 이끌었다.
14 주님께서 그 가운데에 혼란의 영을 섞어 놓으시자 그들은 하는 일마다 이집트를 비틀거리게 하여 주정꾼이 제가 토해 낸 것 위에서 비틀거리는 꼴이 되게 하였다.
15 그리하여 머리든 꼬리든, 종려나무 가지든 골풀이든 누가 하든지 이집트에는 되는 일이 없으리라.
이집트의 미래
16 그날에 이집트인들은 여자들처럼 되어, 자기들 위로 휘두르시는 주님의 손 안에서 무서워 떨 것이다.
17 유다 땅은 이집트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유다 땅에 대하여 듣는 자들은 모두 만군의 주님께서 자신들을 거슬러 세우신 계획 때문에 무서워할 것이다.
18 그날에 이집트 땅에는 가나안 말을 하고 만군의 주님께 충성을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생길 터인데, 그 가운데 하나는 '태양의 도시' 라 불릴 것이다.
19 그날에 이집트 땅 한가운데에 주님을 위한 제단 하나가 세워지고, 그 국경에는 주님을 위한 기념 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
20 이것이 이집트 땅에서 만군의 주님을 위한 표징과 증인이 되어, 그들이 압제자들 때문에 주님께 부르짖으면, 그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시어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21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을 이집트인들에게 알리시고, 그날에 이집트인들은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희생과 제물을 봉헌하며 주님께 서원을 하고 그대로 채울 것이다.
22 주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을 치시겠지만, 치신 뒤에는 곧바로 고쳐 주실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돌아오고, 그분께서는 그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
23 그날에 이집트에서는 아시리아로 가는 큰 길이 생겨, 아시리아인들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인들은 아시리아로 가며, 이집트인들이 아시리아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
24 그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아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복이 될 것이다.
25 곧 만군의 주님께서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내 소유 이스라엘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이사야서 19장에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전개되는 이집트를 향한 신탁은, 불의하고 교만한 민족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후에 하느님을 알고 옳게 섬긴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품어주신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산된 멸망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은 오직 주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닥까지 가는 혹독한 심판이 있을 때, 반드시 주님의 손길이 다가와 역전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는 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회적인 병폐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역. 종교. 세대 간의 다양한 갈등과 차별, 이중적인 잣대나 배타성 등이 상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의식 속에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이분법적 사고로 생각하는 관념이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흔히 ‘나는 옳고, 너는 틀린다’는 방식으로 표출되어 정치, 사회적인 병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지역적으로 양분된 관념과 이를 이용한 정치 현상이 바로 대표적이라는 사실이 국가적으로는 너무나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인문과학자들은 이를 ‘우리 한반도를 배회하는 주자학의 망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인들이 초월적 절대자의 감시 속에서 기독교적 선악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중세 조선인들은 이 세상을 리(理)와 기(氣), 청(淸)과 탁(濁), 정(正)과 사(邪),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형이상(形而上)학과 형이하(形而下)학 등의 둔탁한 관념으로 양분하는 주자학(朱子學)적 이분법에 빠져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아직도 우리 잠재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 ‘내 편과 네 편’이라는 아(我)와 적(敵)을 나누고,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배타적인 이기주의로 흘러 화해나 통합을 주장하다가도 피아(彼我)를 갈라서 반대편을 적대시할 때면 리와 기를 양분하는 가치론적 이분법의 함정에 빠져 타협과 절충을 용납하지 않는 극한의 정쟁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군자-소인의 이분법에 근거한 주자학적 명분론은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위정자들에겐 언제나 달콤한 유혹인가 봅니다. 잘못된 정책으로 민생을 파괴해도, 엉터리 법안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 내도, 극렬한 당쟁으로 헌정사를 중단시켜도 본래 자신들의 의도는 순수했고 도덕적으로 옳다고 우겨댈 수 있는 자기 정당화와 이념적 변명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인류사 최악의 전체주의 노예 국가를 만든 북한의 김씨 왕조가 지금도 짐짓 당당하게 주체사상을 외치며 그 험악한 체제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우기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지 참으로 가슴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이념에 현혹당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떠받들며 “남조선 해방 투쟁”에 청춘을 바쳤던 주사파 운동권의 헛된 자긍심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무조건 자기편은 군자당, 반대편은 소인당이라고 우기며 스스로 그렇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진정 주자학적 파당 정치의 재현이 아니고 그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지난 1995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4류라 혹평했던 한국 정치 현상은 이제는 이미 5류 그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타락한 정치꾼들이 주자학의 수사법을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를 따르는 수많은 국민들의 잠재의식도 다양한 사고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에 그대로 물들어 있어 융합이나 통합의 배려를 엿볼 수 없음이 마냥 서글프기만 합니다.
이제 이러한 우리의 사회 현상을 주님의 강복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만약 내가 어떤 돌덩어리를 바라보고 해석할 때, 어디에서 그 돌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느낌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에서, 가운데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의 생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답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이교도, 이민족에게도 주님의 복음 말씀을 전파한 통합, 융합적인 사고방식과 다른 현상도 받아들이는 아량과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겸손한 사랑의 힘으로, 인내의 증거로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도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로 심판이 역전될 것이라는 구원의 굳은 믿음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천주교 고촌교회 / 이경환 라파엘]
3.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경험에 의지하려는 일상적인 유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저는 어제 세상에 단 한 분밖에 없는 저의 친형 이경웅(李璟雄, 1941-2024, 만83세,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박사님을 땅속에 묻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흙에서 태어나 한 줌 흙이 되어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 간다고 하였지만, 서글프고 애달픈 심정, 가슴이 아픈 그 슬픔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형님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학을 전공하여 한 평생을 대학 강단에서 강의한 대학교수(화학박사)이며, 서울복음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서로가 일상생활과 주어진 업무에 시달려 자주 만나 뵙지는 못하였으나, 저는 늘 형님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자상하고 강직한 성격을 지닌 형과 저는 얼굴 모습이 똑같아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형과 저를 쉽게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습니다.
지금부터 74년 전, 1950년 12월 23일 흥남 철수 작전 때에 부모님의 손에 매달려 매러디스빅토리호를 타고 맨손으로 피난을 온 우리 형제는 온갖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이지만, 형님과 저는 주님의 복음 말씀에 따르려 노력하였으며, 형님은 개신교 장로의 직분으로 한평생 그 신앙공동체를 이끌어 나가시던 성실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천주교에서 다시 세례를 받고 견진성사를 받을 때에도 저의 믿음과 결정을 존중해 주시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던 분으로 저의 삶에서 저를 곁에서 지켜주고 보살피던 멘토이기도 하였습니다.
아직 형님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지만 지난 며칠 동안 다시 못 볼 형님과의 이별에 매달리다 보니 오늘의 이 묵상 과제를 곰곰이 생각하여 정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부득이 형님에 관한 이야기로 대신해 봅니다.
저는 그룹성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묵상과 생활에 과제를 해결할 때에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의지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능력과 경험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처럼 나 자신의 능력과 경험에 의지하려는 이러한 일상적인 유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나의 부족한 능력과 경험에 의지했다가 하느님께 꾸지람을 받는다면 과연 나는 어찌해야 할까? 믿는 것이라고는 하느님밖에 없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과 깨우침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주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 후, 어떤 일에 대한 의사 결정을 할 때, 나 자신의 능력과 경험의 최대치까지 노력은 하기로 하되, 그 결과는 주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면서 의사결정을 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가짐과 주님께 맡기는 자세로 일을 한다면 일상의 유혹은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제 곁에서 일찍 데려가신 이경웅 장로님의 영혼을 주님께서 받아주시어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믿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천주교 고촌교회 / 이경환 라파엘]
4. 13-23장의 기본 주제인 심판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요지음은 사랑하는 형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 묵상 과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였음을 사과드립니다. 나 역시 주님의 심판 날이 나에게 닥쳐왔을 때 형님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이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날이 심판, 구원의 날인데도, 내가 주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을 때, 주님께서 심판하시어 나를 죄에서 끌어 올리시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이와같은 나의 생각이 주관적인 결정이라면 이러한 결정에는 또한 한계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이 심판이자 구원이라면, 내 삶에서 교맘하거나 거만한 마음과 태도를 확실히 벗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해 나가야 하라라 다짐해 봅니다. 일상의 풍파나 심판은 하느님 말씀을 크게 들리게 하는 확성기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풍파나 심판이 없다면, 교만해져 하느님 말씀을 잘 듣지 못 할 수 있으므로 풍파와 심판이 왔을 때,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주교 고촌교회 / 이경환 라파엘]
* 편집 : 西湖 李璟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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