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사도행전 제6과 "묵상과 생활" 본문
제가 쓴 내용이 여러분의 성경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묵상과 생활'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정리해 보세요.
- 서호 이경환 라파엘(고촌 본당) 드림
사도행전 제6과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 베드로”
-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
사도행전 9,31-12,25
사도행전 제6과 [ 묵상과 생활 ]
1) 세례를 받지 않은 비그리스도인에게 성령께서 오신 이야기(10,44-48)를 통해 성령은 어떤 분임을 알려 주시는지 묵상합시다(참조 루카 3,16; 요한 3,8; 14,15-16; 민수 11,29).
저는 복음 말씀으로 사도 10,44-48에 있는 내용으로 세례를 받지 않은 비그리스도인에게 성령께서 오신 이야기를 읽으며 성령은 어떤 분임을 알려 주시는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44 베드로가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위의 복음 말씀에서 다른 민족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표시는 그들도 성령의 선물을 받아 신령한 언어로 하느님을 찬송하였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앞장서시어 다른 민족 사람들을 당신 백성 공동체에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 베드로는, 이미 하나가 된 그들에게 세례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이신 성부와 주님이신 성자, 그리고 보호자이신 성령은 한 몸을 이루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알고 있으며, 일상생활이나 기도할 때 늘 부르는 ‘성령’은 이 삼위일체 안에서의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먼저 복음 말씀을 통하여 성령은 어떤 분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지를 다시 묵상해 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지혜와 총명의 영이고, 계획과 재능의 영이며, 양심을 일깨우는 영, 생기와 변화의 영, 승리의 영, 지도력의 영, 나아가 메시아적 성취의 영이라는 여러 가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에 대한 호칭도 주님의 영, 선한 영, 보호자, 진리의 영, 하느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입양의 영, 영광의 영, 은총의 영 등 다양한 호칭도 알아보았습니다.(차동엽, 홍승모 신부, 말씀의 네트워크, 생활.교리 성구 사전, 미래사목연구소,2007, pp.803-804)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하나, 나의 경우 성령의 선물을 받아 신령한 언어로 하느님을 찬송한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도우심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성령의 도우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많은 선배와 동료들이 저를 격려, 지원해 주었으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령이 늘 우리(저와 아내)와 함께한다는 생각을 하며 감사드리는 일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 보면 모든 일이 감사드려야 일뿐이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덕분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이 세례와 견진으로 이미 성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의 생활은 세례를 받지 않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 도움을 받으려고 위의 차동엽 신부의 ‘생활.교리 성구 사전’을 뒤적여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생활,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생활, 신도의 모범이 되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생활 등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나 자신이 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는 저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②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생활을 합니다.
“형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 저마다 할 일이 있어서, 어떤 이는 찬양하고 어떤 이는 가르치고 어떤 이는 계시를 전하고 어떤 이는 신령한 언어를 말하고 어떤 이는 해석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1코린 14,26).”
③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신도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합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1테살 1,6-7).”
④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1베드 4,10).”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16)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로마 5,5)에 으뜸가는 선물로서 다른 모든 선물을 포함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나에게 내려진 성령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큰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받은 이 사랑의 선물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받아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늘의 묵상을 통해 하게 된 것을 성령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들은 세례와 견진 성사를 통하여 내 몸에 성령이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께 순종하고 회개하며 늘 기도하는 생활을 통하여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경환 라파엘(고촌)]
성령의 호칭
(주님의 영)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이사 11,2).”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17).”
(선한 영)
“당신의 선한 영을 내리시어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만나를 끊지 않으셨으며 그들의 목마름을 보시고 물을 주셨습니다(느헤 9,20).”
(보호자)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진리의 영)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 8,9).”
(그리스도의 영)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입양의 영)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약속의 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러, 우리가 약속된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갈라 3,14).”
(영광의 영)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1베드 4,14).”
(은총의 영)
“하느님의 아드님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계약의 피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은총의 성령을 모독한 자는 얼마나 더 나쁜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습니까?(히브 10,29).”
2) 이방인과 어울린 베드로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답변(11,15-17)을 듣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11,18). 같은 사건을 두고 비난과 찬양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사건을 대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지 묵상하여 봅시다.
저는 복음 말씀으로 사도 11,15-18에 있는 내용을 읽고 같은 사건을 두고 비난과 찬양이 엇갈릴 경우,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지 묵상해 보았습니다.
15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셨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신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주님을 믿게 된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느님께서 똑같은 선물을 주셨다는 설명으로 다른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분명한 의지와 의도를 뚜렷하게 부각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결국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내려와서, 그들 역시 구원받을 가치가 있었고, 하나님의 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구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포용과 수용은 바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요지음 우리 사회에서 쟁점으로 떠오르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여다보면 같은 사건을 두고 비난과 찬양이 엇갈리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접하게 됩니다. 며칠 전(2023.7.11.화) 조선일보 A29면에 게재된 한현우 기자의 “라돈 침대와 후쿠시마 오염수”라는 주제로 쓴 글을 읽어보면서 사람이나 사건을 대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둘러싼 논쟁은 5년 전 벌어진 라돈 침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시판된 침대에서 기준치 이상의 라돈이 검출됐다는 한 방송사의 보도로 시작된 이 사건은 2018년 5월부터 연말까지 우리 사회에 라돈 침대 공포를 키우며 계속되었지만, 2020년 1월 검찰은 해당 침대 회사 대표를 불기소하고, 침대 소비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법원은 침대 회사 손을 들어주었으나, 결국 회사는 이미 망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리고 라돈 침대는 우리의 기억에서도 빠르게 사라져버렸습니다.
라돈이든 후쿠시마 오염수든 우리가 방사능에 대해 갖는 공포의 원천은 사실 핵무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 기자는 “그 핵무기가 바다 건널 것도 없이 우리의 지척인 북한에 있는데, 이 북한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고 반문하는 기사를 읽으며, 주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지를 나에게 스스로 반문해 봅니다. 지난 1990년대 말, 저는 국가• 사회적인 요구사항의 하나인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초•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등 3개국에 출장을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위도를 비롯하여 우리 지역에 핵폐기물 처리시설을 지으면 안된다고 결사 항쟁하는 바람에 결국은 경주 지역에서 막대한 국가 예산의 지원과 안전을 약속 받고 핵폐기물 처리 시설을 지은 사실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출장 다녀온 서구의 여러 나라 특히 핀란드의 경우에는 서로가 우리 지역에 설치해 달라고 경쟁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의 안전한 이용을 국가가 보장해 주고 또한 국민들이 국가의 조치를 믿고 안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난이나 질책이 아니라, 원자력의 안전한 이용에 대한 과학적인 설득을 국민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그 믿음을 우리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머지않아 후쿠시마산 수산물이 수입되고 오염수도 라돈 침대처럼 잊혀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렇게 판단할 만한 과학적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다만 정치인과 과학자 중 어느 한쪽을 믿어야 할 때 나는 서슴없이 과학자를 택할 뿐이기 때문”이라고 한 그 신문 기사의 결론이 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방 사람들을 끌어 앉고 그들과 복음을 나누라고 부른 것처럼, 저와 우리들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비난과 찬양이 엇갈리는 경우가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하시기를 바랄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먼저 생각하면서 비난이나 질책이 아니라,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굳건한 믿음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경환 라파엘(고촌)]
일용할 양식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10,15).
기도 지향
이방인들과 개종자들을 위하여.
* 편집 : 西湖 李璟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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