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 (2) 본문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숭례문에서 돈의문 터 까지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걸으며...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9)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 (2)
중명전 전경 / 중명전은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경에 완성된 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황제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역사의 현장이다. 문화재청이 민간소유였던 중명전을 2006년 인수,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 으로 복원하고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을사늑약의 치욕 / 중명전(重明殿) 중명전은 덕수궁에 딸린 서양식 전각이다. 중명전 터는 원래 궁궐에 포함되지 않은 땅으로 미국인 선교사 호레이스알렌의 거처였고, 왕실도서관으로 쓰이던 건물이 있다가 1901년 11월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1902년 5월,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해 지금의 2층 건물로 재건축된 것이 중명전이다.
중명전 1층 전시실에 재현해 놓은 을사늑약 체결 현장. 왼쪽부터 이근택(군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하야시 곤스케(일본 특명 전권공사),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외부대신), 한규설(참정대신), 민영기(탁지부대신), 이하영(법부대신) 순이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정동제일교회 전경/ 이 일대는 미국공사관이을 비롯 배재학당, 이화학당이 위치하면서 미국 문화와 교육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중심지였다.
- 언덕 위 아름다운 교회당 / 정동제일교회 미국과 영국의 공관 부지가 정동에 마련된 이후, 곧이어 입경한 서양인들은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1884년 가을 의료선교사로 온 알렌(H,N.Allen)을 비롯하여 언더우드(H.G.Underwood), 아펜젤러(H.G.Appenzeller), 스크랜튼(W.B.Scranton) 등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공사관 주변을 따라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들의 서울 진출을 허가하며 조건을 달았다. 병원과 학교에 한해 사업을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예배는 선교사들의 사저에서 조용히 행해졌고, 선교를 위해 의료와 교육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1897년 10월 무렵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로 지어진 정동제일교회는 한국 최초 기독교 감리교회의 건축물이다. 1977년에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미국 공사관 의사 신분으로 입국한 알렌 선교사의 집에서 첫 공식 주일예배가 드려지고, 이후 입국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의 교사, 의사 신분으로 들어왔다. 서양식 교육기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그 산물이다. 이후 자연스럽게 학생들 사이로 선교가 이뤄졌고 배재학당의 설립자였던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7년 10월 9일 조선인의 집에 현판을 내건 벧엘예배당은 정동제일교회의 모태가 된다.
정동제일교회 내부 전경
1895년 9월 착공된 정동교회는 이듬해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 완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초기 라틴십자형에서 증축을 거치며 양쪽에 통로를 덧붙여 장방형으로 변경하고 고딕 교회의 뾰족 첨탑을 삼각형의 박공 지붕으로 대체했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중앙 통로와 양측의 삼랑식 구조로 단순화된 고딕 형태로 교회 창문의 모델이 된 첨두아치와 격자무늬 장식창이 특징이다. 내부에는 평천장에 별다른 장식이 없고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은 석조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1900년대 초 남산에서 본 서울 전경 / 멀리 2층 누각의 남대문이 보이고 성 밖으로 초가집들과 성 안으로 기와집과 신식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지금은 주변의 높은 빌딩에 가려 왜소해 보이지만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중인 고종의 눈에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부의 눈에나 정동교회 붉은 벽돌건물은 탄복을 자아냈다. 믿지않는 이들도 이 건물을 보기위해 몰려들었다”고 1897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1890년대 말 100평이 넘는 공간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붉은 벽돌의 고딕식 예배당은 언덕 위의 신식 건물로 단연 장안의 명물이었다.
2017년 3월, 지역 주민과 직장인을 위해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에서 열렸던 월요 정오음악회
이 예배당에서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성극 등이 열려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남녀평등과 여권신장 운동의 중심 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다툼 속에 자주국가의 의지를 담아 대한제국을 선포한 역사의 현장에 10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언덕 밑 정동길 조그만 예배당’은 그 자리에서 내일을 이야기 하고 있다.
창덕여중 뒷편 담자락에 일부 복원된 한양도성 성곽/ 정동길 구간에서 유일하게 성곽을 볼 수 있는 구간이다.
- 땅속에서 찾은 성곽길 / 창덕여중 전부 없어진 줄 알았던 한양도성 성곽기초부가 창덕여중 지하에서 발굴됐다. 또한 1896년에 완공된 프랑스 영사관 터도 함께 발견됐다. 2010년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고려문화재연구원은 정동 27-3번지 일대 창덕여중 증ㆍ개축 예정지 4414㎡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서울성곽 기단부 16.8m 구간을 확인했다.
옛 프랑스공사관과 한양도성/ 프랑스 전권위원 Collin de Plancy(1853~1922)가 1887년 서울에 부임하면서 프랑스공사관을 짓기 시작해 1896년에 완공됐다. 건축가 살르벨르가 바로크 스타일로 설계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본체와 5층 높이의 옥탑으로 구성됐다.
조사결과 서울성곽은 1~2단 정도가 남은것으로, 기반암을 정비하고 적갈색토를 다져 바른 다음에 장대석을 놓아 축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성벽의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멸실된것으로 알려진 조사지역 주변 서울성곽의 위치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현재 이를 기반으로 창덕여중 뒤편에 성곽길이 조성되었다.
고종의 길 입구/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1년 남짓 머무르다 덕수궁(경운궁)으로 이어했다. 일국의 왕이 외국의 공관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수모를 감내하였지만 고종은 이곳에서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려 노력했다. 공사관에서 대신들과 만나 자주적인 개화를 준비했고, 경운궁을 수리하고 확장시켜 환궁 후 대한제국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 국치의 길/ '고종의 길' ‘고종의길’은 을미사변(1895)후 1896년 고종이 일본 감시를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이동한 길로 약120m이다. ‘고종의길’ 복원은 2011년 정동부지 교환 시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지난 2017년 말 완료했다.
‘고종의 길’은 훼철되고 왜곡된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근대사의 생생한 역사현장을 기억하고 돼 새기는 역사 교훈 길이다. 관람객이 속이 비어 있는 회화나무를 지나고 있다.
125년 전 수모를 무릅쓰고 이 길을 택했던 고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엄상궁 (영친왕의 생모)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빠져 나간 ‘고종의 길’ 곳곳에는 근대사의 아픔이 깊게 새겨져 있다. 치욕의 길 초입 오른편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일제 의 한반도 수탈을 증언하는 2층 건물이다. 높다란 궁궐 담에 가려진 ‘고종의 길’ 좌우편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아직도 미국의 땅이고, 영국의 땅이다.
고종의 길에 위치한 속이 텅 빈 회화나무
덕수궁 구역에 서 있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고종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서방열강의 각축에 나라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서있고 팔 다리 잘려나간 황제의 마음은 썩고 녹아내려 속을 텅 비웠다. 백성의 마음은 더 안타까웠을 것이다. 속절없이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역사의 현장에서 문전옥답 다 내어준 백성들의 마음역시 나랏님 마음이나 같았을 것이다. 영욕의 역사를 증명하듯 속은 텅비고 굳어버린 껍데기만 남았지만 회화나무 두 그루는 올 여름에도 푸른 잎을 내어 폭염에 지친 시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미래 주인공들에게 ‘나라를 지켜라, 내 땅을 지켜라’ 웅변하는 듯하다.
구 러시아공사관 전경/ 현재 내부 수리 중으로 아쉽게 관람이 불가하다.
- 대한제국의 랜드마크/ 구 러시아 공사관 고종의 길 끝자락 솟을대문을 지나면 정동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왕실의 정원인 상림원이 있던 곳으로, 수목이 무성하고 정동에서 가장 높은 지대였다. 이곳에 러시아공사관이 건축되었다. 고층건물이 없던 당시 러시아공사관에서 한양도성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으며, 건물 또한 가장 눈에 띄었다. 1884년(고종 21)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러시아 정부는 공사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지하 1층, 지상 1층에 3층 탑부로 이뤄진 석재와 벽돌조의 '서양식' 공사관건물은 러시아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이루어졌다. 그는 1883년에 입국하여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귀국하기까지 20여년간을 체류하며 많은 근대건축물을 남긴 대표적인 서양인 건축가였다.
3층 높이의 러시아공사관 탑
지금의 러시아공사관은 3층 높이의 탑만 남아 있지만 1890년 준공 당시에는 규모 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공사관을 능가했고 정동 언덕에 위치한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광복 후에는 소련영사관으로 사용된 적도 있는 러시아 공사관은 한국전쟁 중 탑 부분과 지하층 일부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1973년 서울시에서 남은 부분을 보수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했고 1977년 국가 사적 제253호로 승격됐다. 1981년 서울시에서 건물을 재보수해 주변을 시민공원으로 만들었다. 현재 구 러시아공사관은 수리 중으로 관람 불가하다.
경교장 집무실 전경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경교장' 광복을 맞이하고 3개월 후 1945년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 땅에서 첫 밤을 맞이한 곳이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기까지 3년 7개월, 정확히 1310일간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으며 남북통일운동의 본산이었고 백범 암살의 현장이다.
해방 다음 해, 경교장 앞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집회(1946년 1월)
일제강점기인 1938년 금광(金鑛)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는 친일 기업인 최창학 소유 자택으로 본래는 '죽첨장(竹添莊)' 혹은 ‘죽첨정(竹添町)’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요인들이 환국하게 되면서 최창학이 헌납한다. 왜색(倭色)적인 분위기가 짙은 이름을 김구 선생이 근처에 있던 경교(京橋)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 개명하였다.
안두희가 백범 선생을 향해 쏜 총알이 뚫고 지나간 유리창이 재현되어 있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운동을 주도할 때엔 흔히 서대문경교장이라고 불렸으며 민족진영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종로구 평동의 강북삼성병원 초입에 위치한 경교장(사적 제465호)
1949년 김구 서거 이후 대사관 및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변형된 내부 평면을 철거하고, 이 과정에서 옛모습이 남아있는 부분은 최대한 원형을 살려 복원했다. 그렇지 않은 부분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1938년8월호)에 수록되어있는 경교장 도면을 근거로 복원하였다. 복원된 경교장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을 유물과 영상, 정보검색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 사라진 서대문 디지털로 복원되다/ 돈의문(敦義門) 돈의문은 지금은 사라진 한양의 서쪽 대문으로 일명 ‘서대문’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 모습을 알 수 있다.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가운데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일제강점기 신도로건설 명목으로 헐리기 전 돈의문 전경/ 서대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돈의문은 1396년 처음 세워졌으나 1413년 경복궁 지맥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 다가 1422년 현재 정동사거리에 다시 세워졌다. 이때부터 돈의문에 새문(新門)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돈의문 안쪽 동네는 새문안골·새문안 동네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1915년 도로확장을 이유로 돈의문을 철거했다. 돈의문은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역사 속에만 남아있는 문이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 특징은 알 수 없다. 단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세운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대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정동의 끝자락인 경향신문 앞 대로에서 본 돈의문 터와 돈의문박물관마을 전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지어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 임에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 도로 건너편에 서울 돈의문이 104년 만에 디지털 기술로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전면철거 후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다. 다행히 서울시가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의 역사적 가치와 흘러간 근현대 서울의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동네를 허무는 대신 기존 건물을 보수하는 서울형 도시재생방식을 선택해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박물관마을은 돈의문 안쪽 일대 새문안 동네 역사를 바탕으로, 1900년대 중반 주거와 상업 목적으로 사용된 건축물을 활용하여 조성되었다. 돈의문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이 2014년 종로구에 해당 부지를 기부채납 함에 따라 근린공원 조성보다 역사문화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박물관마을로 변경되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돈의문 지역의 역사와 재생을 소개하는 돈의문 전시관,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한 한옥시설, 6080세대의 추억이 살아 있는 아날로그 가득한 감성공간이다. 100년의 시간이 중첩된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역사체험마을로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돈의문역사관, 근대개항기 공간, 6080 레트로 공간을 테마로 한 마을전시관과 체험교육관, 서울도시건축센터, 이용객 편의시설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존의 도시조직을 일부 활용하여 역사문화자산에 집중한 문화형 도시재생의 사례로 전면 철거 후 신축하는 기존 재개발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평가된다.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관은 시대별 서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서울관'은 수도 한양의 건설과정부터 육조거리와 북촌, 남촌, 중촌, 운종가 등을 모형과 영상으로 전시한다.
- 서울을 기억한다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수도 서울의 장소와 역사를 기억 저장하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조선중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기증유물전시실, 교육실, 강당, 뮤지엄샵, 전통문화체험교실 등 다양한 전시, 교육,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서울역사박물관 2층 로비 벽면에는 1929년경 서울 모습과 2009년 서울의 파노라마를 통해 구한말의 서울과 현대의 서울 모습을 비교할 수 있다. 1929년 전경은 왼쪽 북한산 자락부터 오른쪽 남산에 이르기 까지 사대문 안의 모습을 모두 5장의 사진으로 담아냈다. 사업가이자 기자였던 앨버트 테일러가 취재 등의 목적으로 확보해서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희궁이 해체된 이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에 서울역사박물관을 2002년 5월 개관했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영조 36년인 1760년,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
-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 경희궁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창경궁,창덕궁 등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다. 100여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대부분 훼손되었다.
뭉게구름이 여유롭게 흘러가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배경으로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인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해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되었다. 일제강점기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했다. 사적제271호인 경희궁터는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시립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남대문 문루에서 본 시청방향 도심 전경
[글, 사진 : kukinews의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편집 : 西湖 李璟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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