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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 (1)

불꽃緝熙 2021. 12. 18. 18:35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숭례문에서 돈의문 터 까지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걸으며...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9)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 (1)

 

첨부이미지

 

      1896년 2월 11일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하는 미명(未明)의 시간,

     왕과 왕세자를 태운 두 대의 가마가 서둘러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을 빠져나온다.

     문 입구에서 기다리던 러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는 공사관으로 직행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 위협을

     느낀 고종이 자신과 왕세자를 지키기위한 결정이었다. 경술국치 직후 순절한 황현은

     그의 <매천야록>에 “그날부터 이듬해 2월 20일까지 1년 남짓 정동(貞洞)의 아라사

     (俄羅斯,러시아) 공사관에 이어(移御)하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기록했다.


     명(明)과 암(暗)이 교체하는 '고종(高宗)의 길' /

     고종의 피난길은 2016년9월 복원이 시작돼, 2018년10월 정식 개방됐다. 정동 덕수궁 궁장宮牆

     길에서 정동공원과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120m길로,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우리나라 소유 토지가 되면서 그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복원했다.

 

      아관파천으로 일본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었으나, 왕과 왕세자가 자국 왕궁에

     있지 못하고 타국의 공관에 피신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 역시 일본 못지않게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 삼림채벌권을 비롯, 광산채굴권, 시베리아 전선연결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질세라 구미열강도 러시아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경인, 경의선 철도부설권 등 나라의 중요 이권이 헐값에 외국에 넘어갔다.

     이에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덕수궁과 정동 일원 / 1883년 주한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정동엔 각국 공사관이 들어섰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이어한 후 이곳을 대한제국(1897∼1910)의 정궁으로 삼았다. 이후 각국의

     선교, 의료, 교육기관과 호텔, 상점 등이 문을 열었다. 대한제국의 중심지, 외교 각축장이었다.

 

      1897.2.20, 고종은 러시아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 압력에 따라 이어를 끝내고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慶運宮·현 덕수궁)으로 환어(還御)한다.

      환궁 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친다. 고종은 환구단

     圜丘壇에서 천제를 올리는 의례로 황제에 즉위하며 조선이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여 스러져가는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온 힘을 모은다.


     첫 전차개통식/ 1899년 흥인지문에서 열렸던 전차개통식에 사람들이 문루에까지 꽉차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서울의 전차개통은 일본의 도쿄(1903년8월22일)보다 빠르고,

     동양 최초인 교토(1895년)나 세계 최초의 전차 개통인 1881년에 비해서도 그다지 늦지 않았다.

 

      고종은 대한제국(1897-1910)의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1899년 전차를 개통하고

     광산개발과 철도부설, 지폐발행을 위한 중앙은행설립, 전기와 전신사업 등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제국열강의 탐욕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키 어려움을 깨달은 고종의

     마지막 희망은 중립국 승인이었지만 이 역시 일본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숭례문 지키는 호위무사(수문장)들

 

       대한제국과 서구열강의 낯선 공존, 정동/ 정동일대 서양식 건축물 들어서며 성벽훼손

 

        정동길 전경

 

        ▷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 대한제국의 중심지 ‘정동(貞洞)’

      정동은 대한제국 이전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의 주변부에 불과했다. 제국주의

     세력확장이 팽배했던 19세기말, 정동일대는 서양열강 세력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경운궁이 대한제국 정궁이 되면서 서양외교의 각축장이자, 근대사의 새 중심지로

     부각된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각국 공사관이 들어서고 경운궁을 중심

     으로 자주독립을 열망했던 대한제국과 이 땅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서양인들은

     낯선 공존이 시작된다. 정동 첫서양인 거주자는 초대 주한미국전권공사로 임명된

     푸트(L.H.Foote)였다. 정동은 대한제국 시기 국제 교류와 외교의 주된 무대이자

     신문화의 시작점이었다. 선교, 교육, 의료의 기지로서 우리의 근대사를 써나갔다.


       철문으로 굳게 닫힌 영국대사관 저

 

      이처럼 19세기말 정동일대엔 외국공사관, 학교, 교회, 호텔 등 서양식 건물에서

     신식결혼과 파티가 이루어지는 등 근대시기 새문화 산실이자 글로벌 공간이었다.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정동 인근에 위치했던 한양도성의 훼손은

     일제강점기에 도로 확장과 개설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며 “당시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열강의 공사관 설치, 그리고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 도성의 원지형 모습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종의 길에서 만난 두 그루의 회화나무 중 한 그루/

       오랜 세월의 탓인지 두 그루 모두 나란히 속이 비어있어 관람객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한편 이 같은 격변의 시기,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모두 승리한 일본에 국권을 내주고 백성들은 36년 간 식민통치에 신음하게 된다.

     나라 주인이 바뀌고 국운이 기우는 시기에 비극의 순간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던

     회화나무 두 그루가 고종의 길 현장에서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500년 종묘

     사직의 몰락과 일제 만행을 한자리서 목도한 나무는 그 속이 다썩어 문드러졌다.


 

      - ‘숭례문’ 문루에 오르다.

      어렵게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아 한양도성의 정문격인 숭례문의 문루에 올랐다.

     복원된 성벽(좌 16m, 우 53m)이 양쪽으로 날개처럼 펼쳐지고 숭례문 단청과

     도심의 고층 빌딩 숲이 조화를 이루며 600년 한양의 역사를 실감케 한다.

      문루와 내부시설물을 꼼꼼하게 살폈다. 2008년 화재로 한층 강화된 감시장치와

     스프링클러 등 방화로부터 보호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 문루에 오르다.

 

      원래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해 최고 장인(匠人)이 전통 기법으로 복구한 숭례문은

     총비용 245억 원, 연인원 3만5000명이 투입되었다.


       숭례문 복원 당시 화재 피해를 덜 본 목재를 재활용해 기둥을 세웠다.

       숭례문 문루 안으로 들어서니 소방시설과 화재 감시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일부분 남아있는 화마의 상처를 보면서 문화재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한다.

 

      숭례문의 2층 내부는 화재 당시 타다만 재목을 부분적으로 재활용하였다.

     불에 그슬린 기둥을 보니 당시 시뻘건 불기둥과 함께 국보 1호가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기억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경관조명이 아름다운 숭례문 야경

 

      - ‘1호’ 타이틀 뺀 숭례문

      국보1호 숭례문의 무거운 “1호”가 떨어져 나가고 생활의 문화재로 다가왔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의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

     를 60년만에 개선했다. 1962년 제도화한 기존의 지정번호는 ‘내부관리용’으로만

     활용된다. 각종 고문서와 교과서 등에서 ‘국보 1호 숭례문’은 ‘국보 숭례문’으로,

     보물 1호 흥인지문은 ‘보물 흥인지문’으로, 사적 1호 포석정은 ‘사적 포석정’ 등

     국보, 보물, 사적을 표기하는 표현 방식이 바뀌었다.


       ‘복원’이 아닌 ‘복구’/ 방화로 숭례문이 완전히 멸실(滅失)되지는 않았다.

       석축과 1층 문루 대부분이 그대로 남았고, 기존 목재 6만47재가 복구에 재활용돼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숭례문이 국보(國寶) 지위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국보 1호'는 1934년 조선총독부는 국내 문화재를 관리하고 수탈하기 위해

     편의상 160여 개 문화재마다 지정번호를 붙였는데,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것이다. ‘1호’의 타이틀을 뺀 숭례문. 7월1일부터 정문과 후문에는 ‘국보 1호’라는

     수식어를 뺀 ‘국보 서울 숭례문’ 안내판이 섰다.


     숭례문 문루에서 바라본 도심 전경/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단청과 빌딩이 조화를 이루며 서울이 600년 고도(古都)임을 말해준다.

 

      - ‘남대문’이란 명칭은

      숭례문을 ‘남대문’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명될

     때 붙여진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소문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오해이다.


       옛 숭례문 전경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백성은 물론 군신이 모두 친근하게 아무 이견없이 남대문,

     동대문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남대문은 우리의 친근한 표현이라 하겠다.


 

      일제강점기에 숭례문의 서쪽과 동쪽의 성곽은 헐렸다. 대한상공회의소 앞쪽에

     숭례문 성벽의 일부를 재현해 놓았다. 식민통치를 위해, 그 후에는 산업발전에

     부응하기 위해 헐린 성곽의 흔적을 찾아나선 발걸음은 늘 무겁다. 도로 신설을

     위해 성벽을 허물었지만 그 도로 위에 한양도성의 흔적표시는 제대로 해야한다.


     숭례문에서 상공회의소 사이 도로에는 한양도성 흔적표시가 없다.

     눈에 보이는 건축물로만 어림잡아 한양도성이 지나간 자리임을 추측한다.

 

      서울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이 600년 한양의 도성 안으로 들고 나는 일을 각인

     할 수 있도록 단순히 페인트나 조그만 동판을 박는 것 외에도 주요 구간 흔적

     표시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현 도로 위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숭례문만이 세월을 지키고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숭례문 천장의 호법신 문양 /

     힘찬 쌍용의 모습 아래로 시민들이 후문을 지나 들어서고 있다.

 

      - 숭례문 후문 개방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6월 22일부터 국보 숭례문 정문 외에

     후문을 추가 개방하였다. 후문이 일반에게 개방되기는 처음으로 남대문시장을

     방문한 관광객이 서울역쪽으로 난 정문으로 돌아가지않고 시장과 가까운 후문

     을 통해 쉽게 숭례문을 볼 수 있게 됐다. 개방 시간은 09:00~18:00 이다.

 

     상공회의소 초입 성벽 옆에 선 조치욱 학예연구사는 “상공회의소를 지을 때 시굴조사를 했지만

     이 일대에서는 성곽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 이곳에 쌓아 놓은 것은 복원이 아니고 재현

     이다. 시굴조사 당시 20m가 채 안되는 17m 정도 뒷채움 흔적만 나오고 성돌들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쌓아 놓은 성돌들은 주변에 산재해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빌딩 주차장 담벼락에 위치한 소의문(昭義門)터 푯돌

 

      - 사라진 성돌과 소의문 터

      대한상공회의소 옆 도로에 일부 재현해놓은 성벽을 따라 묻히고 잊혀진 순성길을

     나선다. 빌딩 숲 사이로 300여미터를 걸으면 서소문고가차도가 순성길을 막아선다.

     안내도에 따르면 왼쪽으로 내려가야하지만 일단 오른쪽 중앙빌딩 주차장 담벼락에

     위치한 소의문(昭義門)터 푯돌을 만난다.

 

     옛 소의문 전경 / 소의문(昭義門)은 수도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쪽의 소문이다.

     강화, 인천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에 내어갈 수 있는 문이었다.

 

      서소문(西小門)이라 불리는 소의문은 1396년(태조5), 다른 성문과 함께 지으며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그 후 300여년이 지난 영조 20년 (1744년) 문루를

     세우며 소의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서소문동 큰길에 있던 서남간문西南間門으로,

     일반통행로이며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통로였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성곽과 함께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전해진다.

 

     배재학당 맞은편의 아펜절러 기념공원 전경 /

     공원 앞에 대형 건물이 들어서면서 조경 공사가 진행 중이다.

 

      - 아펜젤러 공원과 배재학당

      서소문고가차도 건너편 평안교회 골목으로 들어서자 공사가 한창이다. 한양

     도성이 지나던 길에 들어선 크고 작은 건물들이 정비되고 있었다. 옛 배재학당

     뒤편에 아펜젤러 기념공원이, 러시아대사관 옆에는 배재공원이 있다.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배재학당을 설립한 곳이며 1895년에 독립협회가

     독립신문을 발간한 곳이기도 하다. 공원 기념 동판에는 “맨손체조를 비롯하여

     각종 구기운동이 처음 시작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이라고 적혀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내부 관람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서양식 학교건물로서 옛 배재학당 동관교사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처음에는 영어를 가르친다는 뜻에서 ‘영어학교’로

     불리다가, 1886년에는 고종이 ‘배양영재(培養英材, 훌륭한 인재를 양성함)’의

     줄임말인 ‘배재(培材)’라는 교명을 하사하여 교육기관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전경/ 처음 2칸짜리 한옥에서 시작한 배재학당은 주변의 한옥과 대지를

     구입한 후 1887년 아펜젤러가 정동의 전망이 좋은 언덕에 르네상스식 벽돌 건물을 지었다.

 

      배재학당 동관은 ‘아펜젤러 홀’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배재학당의 첫 교사가

     불에 탄 이후에는 배재학당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의 1927년 졸업앨범 단체사진/

     학교운동장의 회화나무와 한양도성 성곽 주변에 모여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학교건물로 사용되어

     오다, 2001년 서울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곳에는 설립자 아펜젤러의 유품을 비롯해 고종에

     하사 받은 현판, 시인 김소월 등 배재학당 출신 인재들의 유물이 함께 전시됨으

     로써 한국 근대교육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전경 /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Mrs. Mary F. Scranton)에 의해 한국 최초 여성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 1887년에

     고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라’는 뜻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을 하사했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심슨기념관은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 가족이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 건립되었고, 1922년에 증축하였다. 이후 6.25 때 붕괴되었다가 1961년

     복구하였고, 2002. 2. 28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내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2011년 박물관 외관을 원형 모습으로

     복원 공사 후 재개관 했다. 현재 이화박물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세워진 벽돌건물로 전면 아치창과 화강석 키스톤(Key Stone)이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앙에 현관과 계단실을 둔 중복도식 교실배치이다.

 

     심슨기념관 전시실에서 찾은 한양도성 성벽 흔적 / 농구대 뒤로 한양도성 성벽이 보인다.

     박물관 내에는 이화동문들의 기증유물을 전시하는 기증전시실, 옛교실 형태 유관순교실에서는

     이화학교 역사를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화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교육자료를 전시중인

     상설전시실에서는 일제강점기와 근대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1층 전시실의 전시된 옛사진들 중에 농구대 뒤로 한양도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을

     찾아내는 성과도 거뒀다. 서울시립대 신희권교수는 “일제강점기 배재학당에서의

     성벽사진은 발견된 적이 있지만 이화학당 내부성벽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내부관람을 마치고 심슨기념관 정원에서는 유관순열사

     의 동상과 유관순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이용했다는 우물터를 만날 수 있다.

 

 

     ➜다음 호로 계속 이어집니다.

 

[글, 사진 : kukinews의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전통 크리스마스 음악 • 크리스마스 경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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