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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1

불꽃緝熙 2021. 12. 6. 14:01

 

 

 

       장충단공원에서 N서울타워까지 / 무너뜨리고, 묻히고, 옮겨지고, 갈 수 없고

       조급함이 이뤄낸 국적불명 복원 /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위대한 유산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걸으며...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 1

 

첨부이미지

 

       장충동 다산성곽길/ 다산성곽길은 한양도성을 둘러싼 성곽 중 장충체육관에서

       다산팔각정까지 약 1km 구간으로, 남산과 서울 시내 중심부 조망이 가능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한양도성 장충동 구간 다산성곽길을

        오르며 내내 맴도는 문구다. 목멱산은 예로부터 앞산이란 뜻의 ‘마뫼’로 불렸다.

        우리 민족에게 남산은 함부로 사고팔수 없는 정신적 공유재산이었지만 이 땅을

        침탈한 일제는 국립현충원인 장충단을 일개 공원으로 만들어 격하시키면서

        도성의 일부를 훼손하였다. 6.25 이후에도 우리 유산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군사정권 시절, 공공기관, 국가시설 등을 건립하면서 많은 훼손을 가져왔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도시 서울을 되짚어보는 ‘한양도성 둘러보기(巡城)’

 

       장충교회에서 내려다 본 장충단 전경/ 조선시대 국립현충원인 '장충단'은 일제강점기에

       놀이공원으로 격하되고 박정희정권 시절에도 자유센터와 국립극장 등 정부기관 건물이

       들어서면서 21만평의 규모가 9만여평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멀리 N서울타워가 보인다.

 

          ▷민족혼 철저히 말살한 장충단(獎忠壇)

        “탕, 탕, 탕” /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이 불을 뿜었다. 안중근 열사가 국적(國賊) 1호인 조선 초대통감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는 순간이다. 그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3월 26일 향년 31세로 순국했다.


              박문사(博文寺) 전경

 

        1932년 10월 26일, 조선의 현충시설 장충단獎忠壇에 벚꽃을 심고 놀이터를

       만들어 공원으로 격하시킨 일본은 장충단 부지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완공했다. 이토의 호를 따서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 하고 이등박문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博文寺)라 지었다.


        일제는 경희궁의 대문인 흥화문을 옮겨다 이등박문의 사당 정문으로 사용했다.

 

        일본은 박문사를 지어 성역화하면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의

       궁궐들을 마구 훼손하였다. 본당만 신축일 뿐 나머지는 원구단 자리에 있던

       남별궁의 석고각과 광화문 담장, 경희궁 흥화문, 경복궁 선원전 등을 뜯어다가

       박문사 건축에 사용했다. 항일의 상징 장충단에는 이외에도 황국신민화를 위해

       ‘육탄3용사’ 동상도 세웠다. 1945년 11월, 소실된 박문사 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섰는데 박문사를 지은 일본 건축회사인 다이세이가 신라호텔도 건설했다.


       현재 호텔신라 정문에 있었던 흥화문은 제자리를 찾아 경희궁으로 돌아갔다.

 

        호텔신라는 지금 영빈관과 면세점 자리에 정통 한옥호텔을 짓고 있다.

       남산 조망을 막고 있는 현재의 호텔 건물과는 다르게 '24년 완공을 목표로 한

       정통 한옥호텔은 치욕의 역사를 지우고 한양도성 성곽과 조화를 이루어 시민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멋진 건축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우리 스스로 파괴한 문화유산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의 민족혼의 말살을 위해 전국 명산 정수리에 대못을

       박고 궁궐과 한양도성의 성문과 성곽, 전국의 읍성 등을 신도시 건설 명목으로

       훼철(毁撤), 파괴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우리 문화

       유산의 훼손은 우리의 손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 더 안타깝기만 하다.


       장충동 한국자유총연맹 담장은 인근 성곽을 파괴해 쌓았다.

 

        6.25 사변 이후, 우리 손으로 무너뜨린 한양도성 훼손의 역사를 보면,

       경신중고등학교의 신축(1955년),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공사(1959년), 아시아

       반공연맹의 자유센터 건립(1964년), 광희문 일대의 퇴계로 연장공사(1966년),

       구 타워호텔 건설(1969년), 남산종합송신소 설치(1972년) 등이 그 역사이다.


       절단된 한양도성 / 비교적 성곽이 잘 보존된 장충체육관 뒷편 다산성곽길을

       오르다 보면 팔각정이 보이는 지점에서 안타깝게 성곽길은 끝난다.

 

        특히 남산 주변의 성곽 유적은 식민지배의 아픈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 채 한

       유명한 건축가의 손에 의해 자유센터를 건축하며 거리낌 없이 성벽 해체 후,

       성돌을 옮겨다 축대로 사용하였다. 바로 위에 위치한 구 타워호텔(현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은 도성 위로 건물을 지었다. 남산 정상에는 송신소 건설을

       위해 성벽 철거는 물론 성곽 인근의 군인들 숙영지인 성랑(城廊)도 사라졌다.


       1970년대 복원한 한양도성 남산지구 성곽 여장 위에 발라놓은 시멘트/

       이 시멘트 성벽은 당시 돈 4억5천만원을 들여 남산과 장충동 구간에 1977년

       10월초부터 1978년 12월말까지 15개월 동안 보수 및 복원공사를 마쳤다.

 

        이후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서울성곽 정화사업'의 엉터리

       복원과 보수도 훼손 못지않게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남산 3호 터널 건설과정

       에서 나온 돌에다 시멘트를 발라 복원했다고 하는 남산구간의 성곽은 어느새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때는 탔지만 타 구간의 성벽 위 여장과는 모양이 틀려

       낯설다.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학예연구사는 “문화재의 가치는 역사성에 있다.

       원형 유지가 중요한 문화재는 보수와 복원에 신중해야 한다”면서, “역사적인

       고증도 없이 시멘트를 발라 날림으로 복원한 한양도성 여장의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콘크리트는 전도체여서 문화재에 해를 끼칠 우려가 많다”고 말했다.


       장충동 다산성곽길의 여장도 역시 전문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멘트와 규격에

       맞지않는 돌로 무리하게 복원해 안타까움만 더하고 있다. 40여 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부분 부분 금이 가거나 구석 구석마다 부서져 떨어져 나갔다.

 

 

        - 장충단비(奬忠壇碑)

        중구 장충동 장충단 공원 초입의 대한제국기 을미사변 관련 기념비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1895년(고종32)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인에게 시해되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을

       비롯하여 많은 장병들이 일본인 낭인과 싸우다 목숨을 바쳐 죽었다.


       순종이 황태자 당시에 쓴 '奬忠壇' 글씨

 

        고종은 그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1900년11월, 현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사당祠堂인 장충단奬忠壇을 짓고 비를 세워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 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죽은 충신들의 제사도 모셨다.

        사당은 6·25 때 파손되었고, 비만 남아 196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의 정면에는 순종이 황태자 당시 쓴 '奬忠壇'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민영환이 지은 14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 수표교 (水標橋)

        이 다리는 원래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높이를 측량하는 관측

       기구인 수표(水標)를 세워 수표교라 불렀다. 한양 도심을 흐르는 개천(開川)의

       다리는 조선 초에 흙(土橋)이나 나무(木橋)로 지었다. 하지만 태종 연간부터

       석교로 교체했는데, 수표교도 태종~세종 기간에 돌로 개조했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시작하면서 철거하여 처음으로 옮겼다가 1965년

       이 곳으로 옮겼다. 다리 길이 27.5m, 폭 7.5m, 높이 4m이며 재료는 모두

       화강암이다. 수표교와 함께있던 수표(水標)(보물 제838호)는 장충단까지 같이

       왔다가 청량리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2015년 리모델링한 장충체육관 전경

 

        - 장충체육관

        한양도성 장충동다산성곽길 구간의 시작은 장충체육관이다. 1955년 6월23일

       육군체육관으로 개관한 장충체육관은 노천체육관으로 국내 최대 규모이었다.

       1959년에 서울시가 인수·운영을 맡았고, 1963년 2월 한국의 첫 돔 경기장으로

       탄생하였다. 현재의 체육관은 2015년 1월에 리모델링한 새 시립체육시설이다.

        항간에 ‘필리핀 원조로 지었다’는 말이 돌고 있지만, 실제로 자금·설계·시공

       모두 국내기관과 기술진에 의해 지어졌다. 1960년대 김기수의 권투와 김일의

       프로레슬링을 통해 삶에 지친 시민들을 위로해 주던 곳이다.


 

        - 장충동 다산성곽길

        장충체육관을 끼고 신라호텔 면세점 뒤편에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산책길이 있다. 장충동 한양도성 다산성곽길이다. 오른쪽엔 호텔신라

       야외 정원과 왼쪽으로는 야트막한 성곽이 이어진다. 성 안인 호텔과 성 밖의

       주택가 사이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길이다. 장충동 주민들의 건강 산책길이고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 온 연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데이트 장소이다.

 

       다산성곽길 중간에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통문

 

        비밀의 정원에서 암문(暗門)으로 불리는 통문(通門)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면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높다란 성벽이 이어지고 오래된 주택과 구멍가게들 사이

       예쁘게 단장한 카페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성밖길에서 올려다보는 높다란

       성곽은 성안 비밀의 정원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오래된 돌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는다. 다산성곽길

       에서는 시대별 축성기법의 차이를 관찰할 수 있다.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면

       ‘생(生)’자(천자문 42번째)와 ‘곤(崑)’자(천자문 47번째)가 새겨진 각자성석을

       찾을 수 있다. 이 구간의 성벽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쌓았다고 한다.

       비바람에 패이고 이끼 낀 성돌에서 600년 조선의 영욕을 생각해 본다.

 

       숲속도서관 '다산성곽도서관'에서 본 한양도성 성곽 /

       다산성곽도서관은 성곽과 마주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과 실내조경을 이용해

       실내에서도 자연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자연 친화 도서관으로 조성했다.

 

        '다산성곽도서관'은 실내서도 조망이 가능하지만 한양도성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는 3층 야외독서쉼터에서 성곽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행복한 추억거리다.

 

       반얀트리 호텔의 골프연습장/ 반얀트리 호텔 밑으로 한양도성 성곽이 묻혀있다.

 

        -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Banyan tree Club & Spa Seoul)

        1km 남짓한 성곽길을 한번은 성 안으로 한 번은 성 밖으로 걷다보면 어느덧

       반얀트리 호텔로 들어선다. 다산성곽길은 팔각정을 지나 반얀트리 골프장에

       접어들면 사라진다. 성곽이 반얀트리호텔 부지를 가로질러 지나고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일제가 패망한 뒤 전쟁도 지나고 1960년대에

       반공지도자를 기른다며 장충동 일대에 아시아민족반공연맹자유센터를 지었다.

 

       '한양도성 흔적표시'에 대해 조치욱 연구사는 “서울시는 4년여에 걸쳐 ‘한양도성 단절

       구간 흔적표시’ 사업을 진행했다”면서 “건물‧주택가로 사라진 구간 내 주요 갈림길에

       바닥 흔적페인팅 총 8개소 235m, 바닥동판 총 300개소를 표시했다”고 설명한다.

 

        5개 건물로 이뤄진 자유센터 중 가장 남쪽에 있던 17층 높이 국제자유회관은

       도성을 허물고 그 위에 지었는데, 타워호텔로 불리다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며

       지금은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이란 이름으로 현대그룹이 운영 중이다.

       당시 건축을 위해 허문 도성의 성돌은 곳곳에 축대를 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반얀트리 호텔에는 이곳 아래 한양성곽이 묻혀있다는 매립흔적 표시가 도로에

       그려져 있다. 조치욱 학예연구사는 "‘문화재란 선조들이 남긴 유산으로서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라고 문화재

       보호법에 정의되어 있다"면서“언젠가는 세상에 그 얼굴을 들어내겠지만 내 발

       아래 우리의 역사가 잠들어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민다”며 안타까워했다.

 

       자유센터 전경 / 60-70년대 최고의 건축가로 활동했던 김수근은 우리에게 익숙한

       특징적인 건축물을 지었다. 자유센터 외에도 88올림픽 주경기장, 워커힐 호텔의 힐탑바

       육군사관학교교훈탑, 인천상륙작전기념탑, 세운상가, 청계천3·1고가도로, 주한미국대사관,

       치안본부청사, 민주인권기념관(구 남영동 대공분실)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 한국자유총연맹(자유센터)

        1960년대의 남북 이념 대결을 위해 장충동 일원에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이

       건축되면서 한양도성 남산구간은 우리 손으로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와 함께한 역사여행

 

        반공지도자를 양성하고, 반공을 홍보하기 위한 자유센터. 1963년 자유센터는

       반공세력의 총본산으로, 타워호텔은 반공대회 참여 인사들의 숙소로 건설됐다.

       두 건물의 남쪽에서 600년을 지켜 온 한양도성의 성곽을 헐어내고 그 성돌로

       건물의 축대를 쌓고 담장을 둘렀다. 이념이 역사를 이긴 이 '시대의 아이러니'

       자유센터는 국내 최고의 건축가로 불리는 김수근이 설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1세이었다. 그는 대학원생 시절인 1959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응모를

       통해 한국건축계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5년 뒤인 1964년 자유센터 건립 시

       국회의사당 현상공모 실력이 크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천재건축가로 칭송받는

       그가 우리 건축사에 남긴 그 어떠한 업적도 이 자유센터 건축을 위해 600년의

       한양도성을 훼손한 것을 가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업적을 위해

       귀중한 문화 유산과 역사를 땅에 묻고 훼손한 과오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센터 석축 아래에는 한앙도성 장충동 성곽에서 옮겨온

       ‘崗字 六百尺(강자 육백척)’으로 쓰여진 각자성석이 눈에 띈다.

 

        반얀트리호텔에서 자유센터로 내려오면 수많은 성곽 성돌들이 축대를 이룬다.

       이 성돌들 중에는 ‘崗字 六百尺(강자 육백척)’이 새겨진 '각자성석'도 있다.

       ‘崗(강)’은 천자문의 48번째 글자다. 이는 한양도성의 48번째 구간이며 길이가

       600척임을 의미한다. 성곽이 사라진 반얀트리 골프 연습장 부근에 있던 성돌

       이라 추정된다. 현대의 건축을 위해 600년 한양도성 역사가 파괴된 현장이다.

       제자리를 떠난 성돌들은 오늘도 그 치욕을 그대로 떠받치고 있다.

 

       장충단로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 바로 아래에 남소문터 표석이 있다.

 

        - 남소문(南小門) 터

        한양도성 성문은 4대문과 4소문 외에 '남소문'이 더 있었다. 남산국립극장에서

       현재의 장충단로를 따라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있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2년 11월 20일 임금이 종친과 재상들과 함께 청학동(현 장충동

       일대)에 나가 남소문 건립 예정지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은 한남대로가 간선도로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옥수동이 더 중요했다. 한강

       을 따라 내려온 물산의 집적지인 두모포의 위치가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이었다.

       광희문을 지나 옥수동 부근 한강에 접근하나 너무 멀었다. 이에 세조3년(1457)

       경에 남소문을 만들어 거리를 단축하나 통행량이 많지 않자 10여년 만에 폐쇄

       됐다. 표지석에는 “서울의 소문으로 세조 때 세우다. 예종 원년(1469) 음양설에

       따라 철거,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주초마저 없어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립극장 전경

 

        - 국립극장

        1950년 창립한 국립극장은 1973년 10월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개관 당시에

       약 1,322㎡ 넓이의 무대와 3개 층 1,494석의 객석,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인

       회전무대, 수동식 장치봉 등을 갖췄다. 쾌적한 관람환경 조성, 무대시설 현대화

       및 자연음향 개선, 장기적 안전성 보강을 위해 총사업비는 658억원을 투입해

       2021년 5월, 리모델링하였다.

 

 

[글, 사진 : kukinews의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Paul Mauriat - Natasha Waltz(나타샤 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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