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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857호(한양도성 순성길 [5]-(2) '21/11/3/수) 본문

한밤의 사진편지

한밤의 사진편지 제2857호(한양도성 순성길 [5]-(2) '21/11/3/수)

불꽃緝熙 2021. 11. 3. 14:34

 

 

한밤의 사진편지 제2857호 ('21/11/03/수)

[한사모' 공식 카페] - '한밤의 사진편지 romantic walking'

< cafe.daum.net/hansamo9988 >

-[클릭]-

 

 

       와룡공원에서 혜화문 지나 낙산공원까지의 성곽마을은 함께 가꾸어야 할 미래유산으로

       특히 성북동은 한양도성 밖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은 마을입니다.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걸으며...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5)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 [2]

 

첨부이미지

 

 

       도성과 한 몸을 이룬 듯 형성된 성곽마을은 그 자체로 독특한 역사경관 자원이다.

       2014년 4월, 서울시에서는 ‘한양도성 주변 성곽마을 보전관리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총9개 구역에 걸친 22개의 지역을 성곽마을로 지정했다.

 

          <5>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2]


       선잠단지(사적 제83호)에서 선잠제가 개최되었다. 선잠제는 누에치기 풍요를

       기원하며 왕비가 주체가 되어 양잠의 신인 서릉씨에게 제사를 올리던 국가제례다.

 

        - ‘옷(衣)의 풍요를 빌다’ / 선잠단지

        선잠단지는 조선 성종(1457~1494) 때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는 기원을 드리기 위해 혜화문 밖에 세운 제단이다.

       나라에서는 일반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왕비가 손수 뽕잎을

       따고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는 행사인 ‘친잠례(親蠶禮)’를 열기도 했다.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선잠단지 전경

 

        사적 제83호로 지정된 서울 선잠단지(先蠶壇址)는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 황제의 비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신(잠신 蠶神)으로 모시고 국가의례

       선잠제를 지내던 곳이다. 이 단은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성북선잠박물관 내부


        선잠단의 설치 이후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다가 1908년 일제가 국가제사를

       축소하고 선잠단의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있다.

       2016년 복원사업을 위한 유적 정밀 발굴 작업을 통해 선점단 제단의 위치와

       유구를 확인했다. 인근 '간송미술관'은 수장고 신축 공사와 내부 복원 공사로

       아쉽게 휴관 중이다.

 

       '시인의 방'을 찾은 학생들이 잠시 성북동 시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인의 방은 전통 한옥의 처마와 마루를 모티브로 삼아 벽과 바닥을 만들었다.

       열린 공간에는 잔디를 깔고 청동주물로 만든 의자들을 들여놨다.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방우산장(시인의 방)

        성북동은 문학과 관련이 깊은 마을이다. 조선 후기, 마을이 생기면서 김정희,

       이덕무, 채제공 등이 성북동에 와서 자연을 노래했다. 도성 안과 가까우면서

       시골의 정취가 남아있는 성북동에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해방 이후에도

       성북동에는 문인들이 많이 살았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1968)도 있었다.

       그는 성북동에서 32년을 살았다. “마음 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며 자신이 기거했던 모든 집을 방우산장으로

       불렀다. 자신의 영혼이 깃든 곳은 모두 자신의 거처라는 뜻이다. 박목월, 박두진

       과 함께 펴낸 ‘청록집’을 비롯해 대표작 대부분이 성북동에서 창작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인의 집은 1998년에 헐렸다. 성북구는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을

       2014년 성북동 초입에 세웠다. 성북동 문학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도록 조형물

       디자인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시인의 집터 방향으로 문을 내서 바깥벽에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로 시작하는 조치훈 시인이 가장 아끼던 작품

       ‘낙화’가 새겨 넣어져 있다.

 

       한양도성 혜화동전시안내센터는 총 5개의 전시실과 카페로 꾸며져있다. 제1전시실은

       ‘한양도성과 혜화문’, 제2전시실은 시장공관과 한양도성에 관련된 전시실이다.

 

        -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한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숙정문을 나와 와룡공원을 거쳐 혜화문으로 흘러내리던 성곽은 경신고와

       서울과학고 사이 아스팔트도로를 만나며 길을 잃는다. 종로구 혜화동과 성북구

       성북동의 경계를 이루던 성곽돌 위로 콘크리트담장이 쌓이며 제 모습과 기능을

       상실했다. 혜화문에서 올라오는 일방통행길을 거슬러 내려가다 보면 경신고교

       담장, 단독주택 담장, 혜성교회 입구계단, 두산빌라 담장 아래 부분에 성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경신고등학교 담벼락 / 성돌과 일반돌이 혼재되어 있다. 성북동에서 나고 자랐다는

       마을 주민은 "어릴적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산책할 때 마다 훼손된 성곽이 눈에

       들어와 안타깝다"라고 했다.

 

        한양도성 성곽의 흔적들이다. 아픈 마음으로 성곽이 훼손된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높다란 성벽 위에 성곽을 깔고 있는 일본식 목조건물을 만난다.

       1959년부터 대법원장 공관으로 20년, 1981년부터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일제가 서울 성곽 위에 만든 건물을 서울시장의 공관으로

       사용한 부끄러움이 있지만 이 건물을 보존해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로

       사용하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혜화문 전경 /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 복원하였다.

 

        - ‘도성 동북쪽 관문’ 혜화문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부르는 혜화문은 조선시대에는 여진의 사신이 드나

       들었고 문을 나서면 수유현(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진다.

       당시 북대문인 숙정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

       포천을 지나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는 교통의 시작점이었다.

 

       혜화문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8053 , 일제강점기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일제강점기 시기인 1939년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광희문과 함께 헐어버렸다.

 

       인근에 학교가 들어서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혜화문과 낙산을 잇는 성곽이 끊겨있다.

 

        혜화문은 1992년에 원래 위치에서 도로 윗편에 복원하였다.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 혜화문 부근은 새로 인한 피해가 상당해서 예방하는

       마음으로 봉황을 그려넣었다 한다. 우리 선조들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낙산공원 아래 이화마을 도로변에 조성된 카페촌/ 성곽마을은 철거의 대상이 아니라

       한양도성과 함께 지켜나가야 할 미래융합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 ‘서울의 몽마르트’ 낙산공원과 장수마을, 이화마을

        혜화문을 나와 옛 혜화문이 있었을법한 동소문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낙산을

       오른다. 낙산은 원래 낙타를 닮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으로, 낙타산駱駝山 또는

       왕실에 우유를 공급했다고 해서 타락산이라고 불렀다. 서울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낙산의 높이는 125m로 우백호 인왕산 338m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저녁 시간, 낙산성곽 따라 산책하는 시민들/ 내사산 중 산높이가 가장 낮은 낙산은

       성벽 안팎으로 탐방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듯 걸으면서 한양도성의 다양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낙산공원까지 성곽을 따라 순성길이 깔끔하게 정비되었다. 산이 낮고 완만해

       산책길로 그만이다. 축성시기별 성돌들이 곳곳에 자리해 한양도성을 한 눈에

       공부하기에도 좋다. 서울의 몽마르뜨로 불리는 낙산공원은 도심에서 접근성이

       좋고 산의 고도가 낮아 많은 사람이 꾸준히 찾는다. 성곽의 안과 밖의 옥탑방과

       달동네 골목길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가 되면서 유명세를 더한다.

 

       낙산 성 밖아래 위치한 '장수마을'/ 성곽마을은 집과 골목, 계단들이

       조화를 이루는 서울 근현대화 과정의 생활사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낙산 구간을 오르며 왼쪽에 만나는 삼선동1가 장수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일제 강점기부터 성곽 위에 술집이 있었고

       그 주변에 움막과 판잣집이 들어섰다고 전한다.

 

       낙산공원에서 10분 거리인 창신숭인채석장전망대 맞은편의 카페에서 본

       한양도성 낙산구간과 도심 야경

 

       낙산구간 야경

 

        성 안쪽으로는 벽화마을로 유명한 이화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오후 느즈막한

       시간에 낙산공원을 찾았다면 일몰과 야경을 감상하고 내려오는 것이 좋다.

       연인과 함께라면 인근 채석장전망대의 카페 2곳(테르트르/카페낙타)도 추천한다.

 

 

 

 

[글, 사진 : kukinews의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Amore Grande Amore Libero (위대한사랑)/Paul Maur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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