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한밤의 사진편지 제2856호(한양도성 순성길 [5] '21/10/15/금) 본문

한밤의 사진편지

한밤의 사진편지 제2856호(한양도성 순성길 [5] '21/10/15/금)

불꽃緝熙 2021. 10. 15. 20:44

 

 

한밤의 사진편지 제2856호 ('21/10/15/금)

[한사모' 공식 카페] - '한밤의 사진편지 romantic walking'

< cafe.daum.net/hansamo9988 >

-[클릭]-

 

 

       와룡공원에서 혜화문 지나 낙산공원까지의 성곽마을은 함께 가꾸어야 할 미래유산으로

       특히 성북동은 한양도성 밖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은 마을입니다.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걸으며...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5)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 [1]

 

첨부이미지

 

 

        성북 마을버스 03번 마이크로버스 차창 너머로

        빗물 머금은 봄꽃들과 친근한 풍경이 다가온다.

        쌍다리 - 팔각정 - 노인정

        가파른 언덕 일방통행길을 오르며

        잃어버린 시간 여행을 떠난다.


 

        보슬비 내리는 북정마을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

        희미한 기억 속 풍경들이 파노라마 되어 지나간다.

        돌 틈 사이 피어난 노란 씀바귀

        텃밭 사이 아무렇게나 피어난 유채꽃

        좁다란 골목길에 심겨진 초롱꽃이 어둑한 돌담길을 밝힌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 야경

 

       성곽아래 북정마을 전경 / 도성과 한 몸을 이룬 듯 형성된 성곽마을은 그 자체로 독특한

       역사경관 자원이다. 서울시는 2014년 4월 ‘한양도성 주변 성곽마을 보전관리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총9개 구역에 걸친 22개의 지역을 성곽마을로 지정했다.

 

          <5>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 사람 향기 묻어나는 북정마을 외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물결이 거세던 해방 이후, 성북동 산동네 성벽 아래로

       사람들이 하나 둘 정착하며 형성된 복정마을은 시간이 비껴간 듯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다. 도시 서민의 생활터전 북정마을은 서울에서 몇 안 남은 산동네

       중 하나이다. 마주치는 사람과 어깨가 스칠 것 같은 좁다란 골목길을 걷다보면

       복잡한 현대의 삶에서 만날 수 없는 정겨움이 느껴진다. 유채꽃 닮은 노오란 갓

       꽃이 제멋대로 핀 마을 텃밭에서 만난 장혜자(76)씨는 “50년 전 시집와서 여태

       북정마을에 살고있다”며 “우리 아이들 키울 때는 대문 활짝 열어놓고 살 정도로

       인심 좋은 마을이다”라고 말했다. “내일이 초등학교 다니는 증손녀의 생일이다.

       푸성귀를 따서 경기도 양주의 외손녀 집에 갈 것”이라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신희권(서울시립대) 교수는 "한양도성 성곽마을은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경관적 가치,

       건축사적으로 독특한 학술적, 역사적 가치, 문화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 주민과 함께

       가꿔온 삶의 터전으로서의 가치,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 등 중요도가 크다"고 말한다.

 

        마을 골목마다 마을 사람들의 인심과 여유를 보여주는 것 같은 꽃 화분들이

       즐비하다. 담장너머 탐스럽게 핀 5월의 붉은 장미 넝쿨과 함께 골목의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노란애기똥풀과 씀바귀, 하얀찔레꽃이 어우러진 파란 지붕

       위로 한양도성이 장쾌하게 이어졌다.


       한성대입구역에서 오르는 낙산구간 전경. 시대별 축성모습을 살펴보기 좋은 구간이다.

 

        조선시대의 한양도성 주변 지역은 개발이 엄격히 금지된 보호구역이었다.

       성벽 훼손을 막는 것은 물론 주변의 식생과 경관을 보호함으로써 도심 홍수를

       예방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흔히 사산금표(四山禁標)라는 표석을 세워

       한양도성 일대에서는 일체의 경작과 주거, 매장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내내 푸르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고, 때가 되면 도성민

       들에게 풍류와 여가를 즐기는 놀이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69년 1월 착공해 창신동 쪽 낙산지구에 시민아파트 30동을 지었다.

       1998년 낙산아파트를 철거하고 낙산공원화사업으로 공원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서울이 현대 도시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심은 이미 터를 잡고 사람들이 살고 있어 발붙일

       틈이 없었고, 그나마 서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살 수 있던 곳은 바로 공터로

       남아있던 한양도성 주변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한양도성의 성벽 안팎으로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고향을 떠나 상경한 이주민들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생성된 토막촌이 오늘날 성곽마을로 변모하였고, 낙산 주변의 이화마을,

       장수마을 비롯해 성북동의 북정마을, 장충동 일대, 인왕산 아래 행촌동, 부암동

       등 성곽을 따라 수십 개의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낙산 정상에서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좌룡정' 이라고 쓰여있는 각자성석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의 많은 활터 중 한곳으로, 일제시대 엽서에 실린 활 쏘는 장면은

       바로 이곳에서 찍은 것이다.(서울역사박물관소장)

 

        현재도 한양도성은 국가 사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탓에 성벽 내외 100미터

       이내에서는 대규모 개발이 제한되고 있다. 한때는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재개발을 요구하던 성곽마을 주민들도 이제는 낙후된 환경을 정비해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협조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마을 중 하나가 바로

       이화벽화마을이다. 근래에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무대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아

       적절한 관리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신희권 교수는 “한양도성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제 모습을 지켜 오고 있다. 전차와 자동차가 도입되고 인구

       천만의 대도시로 급성장하는 중에도 서울 시민들은 한양도성을 철거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벽에 기대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어찌보면 서울

       시민에게는 비빌만한 든든한 언덕이었던 셈”이라며, “덕분에 우리는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수도 성곽을 자랑스런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애쓰고 있고, 이를

       고스란히 후손에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성북동 덕수교회 안에 자리한 이 집은 마포에서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의 별장

       이다. 바깥마당을 지나 일각문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행랑채, 오른편에 본채가 있다.

 

        - 도성 밖 문화재 향기 그윽한 '성북동 돌아보기'

        한양도성을 서쪽 울타리로 두고 있는 성북동의 이름은 도성의 북쪽, 도성의

       북문 밖에 있는 골짜기에서 연유한다. 조선시대에 도성 사대문 밖에는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성북동 만이 성의 북쪽을 의미하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산수의 경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빼어나, 예로부터 도성민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 심신의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서 손꼽혔기 때문이다.


       북정마을에 위치한 성북동 비둘기공원

 

        성북동은 혜화문을 나서 왼쪽에 나타나는 계곡 마을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이 어울려 있으며, 복숭아, 앵두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이 빼어난 마을이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성북동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성북동은 한양도성 밖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서울시에서는 2013년 성북동을 ‘역사문화지구’로

       지정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성북동은 훨씬 매력적이고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성북동을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심우장/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은 사적 제550호로 북정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 ‘만해 한용운의 얼이 서려 있는’ 심우장(尋牛莊)

        보슬비가 내리던 늦봄 오후, 심우장에 들어서자 라일락 향이 그윽하다. 맞은편

       오래된 아름드리 개회나무가 만개했다. 민족자존의 공간 심우장(尋牛莊)은 일본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하게 이루어지던 1933년, 지인

       들의 도움으로 한용운이 성북동 골짜기에 두 칸짜리 집을 지어 기거한 곳이다.

       최린, 최남선 등 민족대표들이 변절한 1930년대 한용운은 끝까지 일제와 타협

       하지 않았다. 성북동 북정마을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서면 북쪽을 향한 기와집이 있다. 마당에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심우장은 검소, 소박한 외형을 보여준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은 부엌이다. 서재였던 온돌방엔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쓴 '尋牛莊' 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한다.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1878~1937)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자 한용운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러주었다. 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

       치러진 장례식에 조헌영, 조치훈 부자도 참석했다. 만해는 총독부를 등진 이곳

       심우장에서 민족지사들과 교류하며 문학활동을 했다. 선사는 이 집에서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었으나, ‘조선 땅 전체가 감옥’이라며 생전 아궁이에 불은 때지

       않았다고 한다. 잠시 심우장 툇마루에 걸터앉아 내리는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보슬비에 음율을 맞춰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읊어본다.

 

       최순우 옛집/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잔잔한 파장이 일고 있다.

       최순우 선생이 글과 강연으로 세상에 큰 울림을 전했던 것처럼…

 

        - ‘박물관장의 안목’ 최순우 옛집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으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이 1976년 성북동 집으로

       이사와 사랑방 문 위에 걸어 둔 친필 편액이다. 신희권(시립대) 교수는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 초 지어진 근대한옥으로 최순우선생의 안목이 담긴 집”이라며

       “그는 평생을 박물관 학자이자 미술사학자로 살며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한국

       미술의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글로 세상을 깨웠다.”고 말했다. 마당에

       자연을 들여놓은 듯 무심하게 핀 들꽃과 정갈하게 꾸며진 안채가 새삼 눈길을

       끈다. 최순우 옛집이 특별한 이유는 내셔날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한옥의 양옥화 추세로 허물어질뻔한 것을 시민들이 지켜냈기 때문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하며 전시, 문화강좌,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 북측 통로

 

 

[글, 참고 자료 : kukinews의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A. Dvorák - Largo from the new world>-

 

첨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