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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852호(한양도성 순성길 [3] '21/9/16/목) 본문
한밤의 사진편지 제2852호 ('21/9/1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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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은 태조가 백악, 낙타, 목멱, 인왕 등 내사산을 따라 18.627㎞의 성벽을 쌓은 후, 역대 왕이 개·보수를 거듭하면서 600년 역사가 오롯이 살아 있는 서울의 대표 문화유산이다. 17세기 후반 영국 런던 인구가 15만명이었을 때 한양 인구는 20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세계 에서 가장 큰 수도 중 하나였다.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 중 한양도성의 규모가 가장 크다.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걸으며...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3)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한양도성을 설계한 정도전은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새로 정한 도읍의 8가지 경치를 읊은 시)의 도성궁원都城宮苑에서 “성은 높아 천길 철옹성이고, 구름에 싸인 궁궐은 오색찬연해, 상원上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 해마다 서울사람들 놀며즐기네” 라며 도성의 풍광을 예찬했다. 城高鐵甕千尋(성고철옹천심) :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성이고 雲繞蓬萊五色(운요봉래오색) : 구름에 싸인 궁궐은 오색 찬연해 年年上苑鶯花(연년상원앵화) : 해마다 어원에는 봄 경치가 좋은데 歲歲都人遊樂(세세도인유락) : 오래토록 도성 사람들 즐겁게 노네.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대표작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는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비가 개이면서 안개가 산등성이를 따라 흐르는 인왕산의 모습을 장쾌하고 호탕한 필묵법으로 그려낸 만년의 걸작이다. 어릴 적부터 인왕산 인근에 살며 시화쌍벽으로 평생을 교우해 온 사천 이병연(1671~1751)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3>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비가 그칠 무렵, 인왕산 아래 옥인동에 위치한 ‘수성동계곡’에 가면 겸재 정선을 만날 수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마치 양팔을 벌인 듯 광화문 광장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인왕산을 마주보고 우측에 반쯤 핀 모란 같은 바위산이 백악산이다. 백악산 뒤로는 서울의 상징처럼 우뚝 솟은 삼각산도 보인다. 인왕과 백악산 사이에 보이는 의연한 모습의 봉우리가 보현봉 이다. 서울은 산과 산이 이어져 있고, 산과 능선 위에 오래된 성곽은 서울이 역사 도시임을 말해준다. 추적추적 내리던 봄비가 그치면 도심에서 바라보는 인왕산과 백악산은 구름 속 바위들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다. 비를 머금은 바위들, 색깔이 더욱 선명해진 나무들은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이다.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와 너럭바위 모습 / 빌딩 숲을 잠시 벗어나니 이처럼 아름다운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서울 사람들에게는 큰 복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은 비 오는 날 집을 나서 인왕산 수성동에 도착했다. 인왕산에 비가 잠시 멈춘 모습을 기다려 붓으로 힘 있게 그리고 빠르게 그림을 그린다. 비가 온 수성동계곡의 기린교와 너럭바위를 건너는 모습을 화폭에 담는 순간이다. 빗물이 쏟아지는 폭포도 기린교와 함께 그려넣는다. ‘수성동’ 그림 속 에는 통돌 2개가 너럭바위를 건너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하였다. 마치 상상 속 동물 ‘기린’이 바위와 바위를 이어주는 것 같은 다리가 기린교麒麟橋다.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는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수성동 계곡의 아담한 폭포아래서 만난 버들치가족/ 청계천의 발원지인 수성동계곡에는 맑은 물에서만 서식하는 도룡뇽을 비롯해 가재, 버들치 등이 살고 있다.
겸재 정선의 인생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비 개인 인왕산의 풍광을 검은 묵과 하얀 여백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이다. 76세 노구에 인왕산 수성동 계곡 그림터까지 걸어와 인왕산 치마바위를 타고 흐르는 비안개를 바라보며 겸재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병이 깊어 삶이 얼마 남지않은 50년 지기 친구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한평생 마음을 담아 장쾌한 필법으로 화선지에 채워놓았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날은 정확히 1751년 5월25일(음력 윤)이다. 두 사람 모두 인왕산과 백악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당대 최고의 시인과 화가로 ‘좌사천, 우겸재’로 불리며 평생을 교우해온 두 사람이다. 인왕제색도를 받은 81세 친구 사천 이병연(1671~1751)은 기쁨의 눈물을 흐르며 며칠 후 눈을 감는다. 박노수 미술관과 윤동주 하숙집터를 거쳐 수성동계곡에 다다르면 겸손한 선비 겸재를 만날 수 있다. 인왕산 구석구석 발길 닿는 곳마다 겸재 정선이 지나간 시간의 켜가 느껴진다.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지난 4월 28일 삼성그룹이 발표한 故 이건희 회장의 고미술 기증 목록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국보 제216호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이다." "가로 138.2㎝, 세로 79.2㎝로 정선의 400여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9월 26일까지 전시 된다고 하니, 비오는 날 그림을 감상한 후 수성동 계곡을 찾으면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올 것이다.”
인왕산 정상 우측 아래 넓은 바위가 '치마바위'이다.
- 애틋한 사랑과 아픈 상처 보듬은 치마바위 조선의 왕비 가운데 가장 짧은 7일의 왕비 단경왕비.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는 왕비 즉위식도 치르지 못하고 폐서인이 되어 인왕산 아래 사가로 쫓긴 비운의 왕비이다. 야사에 의하면 중종은 정쟁에 휘말려 궁에서 쫓겨나간 조강지처를 그리워하며 혼이 나간 사람처럼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했다. 이 말을 들은 단경왕후는 매일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인왕산 정상 아래 바위에 걸쳐 놓고 중종에 대한 그리움을 바람에 실어전했다고 한다. 이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치마바위의 주인공인 단경왕후는 사후 1739년(영조 15년) 복위되어 경기도 양주 온릉에 잠들어 있다.
오른쪽부터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九月十六日(황기2599년 9월 16일), 朝鮮總督南次郞)(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작은 글씨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기념각자를 남기는 이유를 잔뜩 새기고 말미에는 '조선총독부학무국장 시오바라토키사부로(鹽原時三郞)'라고 새겨놓았다. 황기2599년는 1939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단경왕후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치마바위에 400년 후 일제는 만행을 저지른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을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아 전시동원체제로 수탈을 가속했다. 조선을 무력으로 병합한 일제는 1939년 가을, 경성에서 ’대일본청년단회의‘를 개최하고 그것을 기념한다며 인왕산 치마 바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朝鮮總督南次郞)(조선 총독 미나미지로) 그리고 작은 글씨로 바위 한가운데 각자를 남기는 이유를 잔뜩 파 놓았다. 나라를 빼앗 기니 중종과 단경왕후의 애틋한 사랑이 깃든 바위조차 제국주의 깃발 아래 조선 청년들을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몰아넣는 선전 도구로 전락시키는 만용을 저질렀다. 해방 후 치마바위에 새겨진 일제 만행을 삭제하여 읽을 수는 없지만 아픈 상처는 바위에 그대로 남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인왕산 초소책방 _더숲II'/ 인왕산 중턱에 경찰 초소로 이용되어온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기에 '초소'라는 이름을 붙였다.시민들이 소통하며 사색하는 쉼터이자 '책방'이다.
- '인왕산 초소책방 _더숲II' 가는 길 인왕산 수성동계곡 거슬러 올라 인왕산을 가로지르는 도로 한편에 도성 안을 굳건히 지켰던 초소가 보인다. 인왕산 중턱에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50년 넘게 경찰 초소로 이용된 건물이다. 낡고 허름했던 건물이 산보하는 시민들과 한양 도성을 둘러보는 여행가들에게 소통의 공간으로 변했다. 걷는 자들에게 사색의 쉼터로 만들어져 낮에는 초소 책방카페로, 밤에는 서울의 야경을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걸어서 또는 주차공간은 부족하지만 승용차로도 접근 가능한 이곳은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의 자랑이 될 듯하다. 잠시 앉아 숨을 돌린다.
종로구 최초 한옥공공도서관으로 인근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등과 함께 문학 인프라의 중심으로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한옥 본채 곁, 작은 연못 위에 지어진 아담한 정자에서는 옛 선비들이 즐기던 풍류도 느껴 볼 수 있다.
- 한옥으로 지은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성곽 아래 단아한 한옥 도서관이 도심을 바라 보며 자리 잡고 있다. 인왕산 자락길 아래 한옥 담장에 반쯤 핀 모란이 오가는 사람들을 반긴다. 벽천이 흐르는 정자 안에는 시민들이 편안한 자세로 책장을 넘기고 연인은 여유롭게 도서관 주변을 산책한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도서관 열람실에는 다양한 도서들이 사람들을 기다린다. 도심 속에서 만나는 산사의 풍경소리가 들릴듯한 공간이다. 창호지를 곱게 펴 바른 문창살 넘어 노란 수선화가 핀 작은 정원도 소담스럽다.
한옥 정자 안에서 아내와 함께 책도 읽고 자분자분 이야기를 나누던 부부는 “물소리 새소리와 함께 책을 읽고 산책 하고 주변의 맛 집 순례를 하면서 부부 사이가 더욱 돈독해 졌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한옥도서관을 배경으로 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니 윤동주 시인 언덕이 보인다. 아담한 담장 아래 꽃과 계곡 물소리가 있는 한옥 도서관과 윤동주 시인 언덕은 한권의 책과 함께 작가를 만나러 가는 산책 코스이다.
종로구 청운동 청운공원 내에 위치한 윤동주 시비 / ‘윤동주 시인의 언덕’ 표석 앞에 ‘서시’ 시비가 있다. 시비 앞에 서면 젊은 나이에 타국 형무소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시인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서서 청운문학도서관에서 나무 계단을 오르면 인왕산 성곽길을 만날 수 있다. 저 멀리 삼각산이 보이고 등 뒤에 인왕산, 그리고 눈 앞에 백악산이 보이는 이 언덕을 겸재 정선도 올랐다. 이곳에서 ‘창의문’과 도성 안 ‘장안연우’ 그림을 그렸다. 윤동주 시인은 이 언덕을 어떻게 알고 올라왔을까? 시인의 언덕에 서니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숭례문 너머 목멱산도 보인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을 친구처럼 바라보았을 동주의 삶이 그려진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잠시 눈을 감고 청년 동주가 부르던 서시(序詩)가 새겨진 언덕 위 바위 앞에 서서 시인 윤동주를 그려본다.
도성 밖 ‘무계정사’ 내부 전경 /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찾아서 별장을 지은 곳이다.
- 안평대군이 이상향을 찾던 곳, ‘무계정사’ 인왕산 구간 유일하게 소실된 성곽길 따라 오르니 청운동과 부암동의 경계다. 인왕과 백악에서 흘러내린 도성 안의 물은 옥류동천과 백운동천을 따라 청계천 으로 흐르듯, 도성 밖의 물은 홍제천으로 흘러내려 한강을 찾아 내려간다. 안평 대군의 별서는 도성 안 인왕산 아래에 비해당이 있었고, 도성 밖 기차바위 아래 무계정사가 있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선비들과 함께 1만권 책을 쌓아 두고, 글을 읽고 시를 쓰며 이상 세계인 무릉도원을 꿈꾸었던 곳이 바로 인왕산 아래에 있는 무계정사(武溪精舍)이다.
안견이 안평대군 이용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 / 일본 덴리대학 소장
커다란 바위에 ‘무계동(武溪洞)’이라 쓴 글자만이 역사의 흔적이 되어 무계원에 전해지고 있다. 인근에 흥선대원군이 사랑한 별장 석파정(石坡亭)이 있다.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집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별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석파는 대원군의 아호이다. 조선 상류사회의 대표적 사랑채로 규모는 작으나 사용된 건축재료와 만든 솜씨가 뛰어나다.
인왕산 도성 안 정자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의 전경 왼쪽으로 백악산과 그 아래에 청와대도 보인다.
[참고 자료 : kukinews의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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