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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에 요절한 천재 화가 조선 시대 나옹懶翁 이정李楨의 명작 본문
조선시대 전이정필 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는 조선 시대 나옹懶翁 이정李楨의 명작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간(公幹), 호는 나옹(懶翁), 나재(懶齋), 나와(懶窩), 설악(雪嶽). 할아버지는 이상좌(李上佐)이고, 아버지는 이숭효(李崇孝)이며, 작은아버지는 이흥효(李興孝)로 대대로 화원 집안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작은아버지 이흥효에게서 양육되었다. 5세 때 승형(僧形)을 그렸으며 이흥효가 가법(家法)을 가르쳐 10세에 이미 대성하여 산수, 인물, 불화(佛畵)를 모두 잘 그렸다고 한다. 11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다가 13세 때인 1589년에 장안사(長安寺)를 개축할 때 산수와 천왕제체(天王諸體)를 그렸다.
1606년 명나라의 사신으로 내조(來朝)한 주지번(朱之蕃)으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최립(崔岦)으로부터 시문을 배웠고, 허균(許筠), 심우영(沈友英), 이경준(李耕俊) 등과 가까이 지냈다. 술을 매우 좋아했으며, 의리가 강하고, 좋은 산수를 보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곤 할 만큼 호방한 성격이었다.
그림뿐 아니라 시와 글씨도 잘하였고 불교에 심취하여 중이 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과음으로 인하여 평양에서 30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하지만 유작들은 원숙한 솜씨와 세련된 화격(畵格)을 보여 준다.
유작들을 통해서 그가 전통적인 안견파 화풍(安堅派畵風)과 당시에 유행하였던 절파 화풍(浙派畵風) 그리고 북경(北京) 화단을 통하여 배운 남종화풍(南宗畵風) 등 다양한 화풍을 구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통주의적이면서도 일면 진보적인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안견파와 절파 화풍이 절충된「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남종화의 영향이 가미된 『산수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전한다.
전이정필 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전이정(傳李禎), 세로 19.1cm, 가로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산수그림(山水圖),조선, 사직-견, 이정(李霆, 1578-1607),2048 X 2676
이정(李楨, 1578-1607)은 이상좌(李上佐), 이숭효(李崇孝), 이정으로 이어지는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승려의 모습을 그리고, 열 살 때 이미 대성하여 산수, 인물, 불화(佛?)를 모두 잘 그렸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겨 산수를 보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곤 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때문이었는지 서른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통적인 면과 진보적 경향을 보이는 원숙하고 세련된 그림을 남겼다. 이 그림 역시 그러한 예로서 왼쪽 위에 ″나옹(懶翁)″이라고 쓰여진 음각의 도장이 찍혀 있다. 산수의 구도와 공간 처리, 나무의 묘사, 산의 형태 등에서 숙부인 이흥효(李興孝)의 산수도와 비슷하다. 중심이 되는 산의 전체 형태를 처리한 모습이나 중경의 비스듬한 구원을 흰 면과, 그것을 둘러싼 검은 면으로 나누어 처리한 점 등은 절파풍(浙派風: 명대 저장 지방 양식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들의 화풍)을 보이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그림은 안견파 화풍의 양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절파 양식이 더해진 새로운 요소들을 반영하고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정보/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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