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버스에서 있었던 이야기 / 김도식 본문

세상사는 이야기

버스에서 있었던 이야기 / 김도식

불꽃緝熙 2020. 1. 14. 18:06

버스에서 있었던 이야기

 

 

  신년 초에 사연으로 들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30대 초반의 직장인이 직접 경험한 일을 보낸 사연이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한 정거장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양 손에 보따리를 잔뜩 들고 탑승하였다. 시골에서 막 올라오신 듯한 할아버지가 자식에게 줄 농산물을 한가득 갖고 탄 것이다. 차는 곧 출발하는 듯하더니 다시 멈춰 서는 것이었다. 운전기사는 차비를 내라고 말했고, 할아버지는 버스비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교통카드나 잔돈이 없는 것인지 잘 파악이 안 되었지만, 하여튼 차비를 못 내서 쩔쩔매고 있었다. 나이로 보아서는 경로우대 교통카드의 발급대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것도 안 가진 분이었던 것 같았다. 기사는 차비가 없으면 내리라는 식으로 할아버지를 난처하게 하고 있었다. 물론 1차적인 책임은 차비를 준비하지 못한 할아버지에게 있지만, 서울 물정에 익숙하지 않은 할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을 바라보는 버스 안의 승객들은 불편한 마음에 몸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였다. 어떤 초등학생이 부스럭거리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앞 쪽으로 걸어갔다. 그 학생은 만 원짜리 하나를 요금함에 넣으며, “기사님, 다음에도 혹시 이런 분이 또 생기면 그냥 타시게 해주세요.”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승객들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조용히 있었다. 얼어붙은 상황을 종료시킨 장본인이 초등학생이었다는 사실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이 사연을 쓴 직장인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초등학생의 주머니에 만 원짜리를 찔러 넣어주고 내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사연을 통해서 초등학생을 영웅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어린 학생의 선택이 그 상황에서 최선이었는지 여부도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할아버지를 억울한 희생자로 만들 생각도, 운전기사를 냉정한 사람으로 몰아갈 마음도 없다. 원인 제공은 할아버지가 했고, 기사는 자신이 맡은 바 책임을 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초등학생의 행동에는 어른들도 선뜻 실천하지 못하는 용기와 할아버지에 대한 따뜻함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미처 행하지 못한 선택을 실행한 초등학생을 바라보며 미안함을 느낀 직장인의 마음에도 잔잔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겨울왕국’의 속편이 얼마 전에 개봉되었다. 원제는 ‘Frozen’으로 얼어붙어 있다는 뜻이다. 버스에서의 이번 일은 얼어붙은 현장을 한 초등학생의 따뜻한 마음이 녹여버린 사건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추운 겨울에도 우리 사회가 얼어붙어 있지만은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글쓴이 / 김도식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By The Morning - Anda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