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이었던 경주 향교는 조선 성종 23년에 서울의 성균관을 본 떠
고쳐지은 것이라 합니다. 경주 향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로 앞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다섯 성인과 기타 성현을 모시는
대성전이 있고, 뒤쪽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주 향교는 성균관이나 문묘와 같은 규모의 신위를 모시는
대설위 향교로 그 위상이 대단히 높은 향교라 하였습니다.
경주 향교에서 직진하여 바로 신라 제17대 내물왕릉으로 갔습니다.
삼국유사에 내물왕릉이 첨성대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 시대 왕의 칭호를 보면, 처음에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의
칭호로 불리다가 내물왕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내물왕 이후부터 신라의 왕은 김씨가 세습하게 되었습니다.
제 옆에서 함께 걷던 회원님이 그러면 어느 왕 때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과연 어느 왕일까요?
정답은 제23대 법흥왕 때부터 랍니다.
(23대 법흥왕부터 56대 경순왕까지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내물왕릉에서 오른쪽 숲이 계림입니다.
어디선가 닭소리 들릴 듯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곳입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서려있는 계림입니다.
홰나무,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탈해왕 4년(서기 60년) 호공이 반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다가 마을 옆의 숲에서 밝은 빛이 금궤에서 나오는 것과
흰 닭 한마리가 우는 것을 보고 탈해왕에게 고했다고 합니다.
탈해왕이 숲으로 가 금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알지는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이 때부터 이 숲을
계림이라고 하였으며 또 훗날에는 나라 이름으로도 쓰게 되었습니다.
계림에는 천년도 훨씬 넘었다는 회화나무가 있어 우리 회원들은
여기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제멋대로 자란 고목들이 신비한
정취를 자아내는 계림에서 나와 오른쪽 월성으로 올라갔습니다.
월성은 신라 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인데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신월성, 반월성이라고 불렸으며,
왕이 사는 곳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현재는 왕궁의 흔적은 찾기가 힘들고 자연 성벽의 일부와
성벽 둘레에 성을 보호하기 위해 팠던 도랑인 해자터가 남아 있고,
널리 알려진 경주 석빙고도 여기 월성에 있습니다.
월성 내에 있는 보물 제66호 경주 석빙고는 신라 시대의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로 1738년 영조 14년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이며 현재 석빙고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 터가 남아있습니다.
예전에는 석빙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입구의 창살 사이로 안을 구경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경주 석빙고 앞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누어 단체 기념 사진도
남겨두고 월성 문화재 발굴 현장도 구경하였습니다.
어제 저녁 야경을 구경하며 한밤 연못에 비친 동궁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였으므로 시간 관계로 동궁과 월지(안압지)에 들어가는 것은
생략하고 신라 왕궁 영상관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하였습니다.
참고로 동궁과 월지에서 주사위 처럼 생긴 놀이 기구('주령구')를
세 개 사서 저녁 때 뒤풀이 상품으로 나누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품을 받은 분들이 뭔지 몰라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안압지에서 발굴한 주령구에 대하여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령구는 1975년 경주 안압지를 발굴하던 중 연못 바닥에서 발견된
크기 4.8cm의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와 유사한 놀이도구입니다.
각면에는 '술 석 잔 한번에 마시기', '술 마시다 크게 웃기', '스스로
노래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등과 같은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는데
오늘날의 미션 수행 놀이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받으신 상품은 버리지 마시고 그 뜻을 새겨보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신라 왕궁 영상관에서 나온 우리는 저 멀리 첨성대를 바라보며
왼쪽으로 이어진 월성 해자 발굴터 옆을 지나갔습니다.
이 곳은 봄철에는 유채꽃 단지로, 여름에는 연꽃 단지로 조성되어
있어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고 합니다.
경주 첨성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지만, 어제 저녁에 본
첨성대는 밤하늘의 별과 어울린 야경이 일품이었으며,
오늘 낮에 보는 첨성대는 또다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국보 제31호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때
만들어진 동양 최고의 천문관측대입니다.
신라 사람들의 과학정신을 반영한 건축물로 돌 하나하나에 고도로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으며 각 석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어 들면서 유려한 곡선을 이루어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초록색 비단벌레를 닮은 전기유람차가 운행 중이어서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한번 타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첨성대를 지나 신라 왕과 귀족들이 잠든 대릉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릉원은 경주에 산재해 있는 고분군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황남동
고분군이라고 하며, 천마총, 미추왕릉,황남대총 등 30기의 고분이 있습니다.
대릉원 전체가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고분들 사이 사이로
걸으면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정취있는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대릉원의 고분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이 '천마총'입니다.
1973년 발굴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같은 것을
망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합니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며, 금관,
금모자, 새날개모양 관식, 금허리띠, 금동 신발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요지음은 천마총이 내부 정비 중이어서
공개하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긴채 되돌아 서야 했습니다.
대릉원을 둘러보면서 모두가 비슷비슷한 고분군인데
어느 것은 릉(陵), 또 다른 것은 총(塚), 그리고 어느 것은 분(墳)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능, 총, 분은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고분 중에서 고분 주인이 왕인 경우에는 능(미추왕릉)이라 하고,
고분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대표적인 유물로 금관이 나왔으면
금관총, 특징이 있는 천마도가 나왔으면 천마총 등과 같이 총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사 기록이 없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거나, 발굴되었다 하더라도
특별한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경우에는 몇 호 고분이라 구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길 건너에 있는 노서동 고분군과 노동동 고분군도
점심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아깝지만 대릉원만 둘러보고 되돌아 나왔습니다.
노서동 고분군에는 대표적으로 서봉총과 금관총이 있습니다.
서봉총은 1926년 발굴 당시 스웨덴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였던 구스타프 6세가
참여해 세 마리의 봉황이 달린 금관을 발굴한 곳입니다.
노동동 고분군에는 금으로 만든 방울이 발견된 금령총과
금동제 신발이 발견된된 식리총이 있고, 고분 위에 나무가 자라
신비함을 더해주는 봉황대도 있어 고분 사이를 거닐어 보고자 하였으나
식당과의 약속 시간 때문에 발길을 되돌려야 했습니다.
둘째 날 점심식사는 대릉원 옆에 있는 '이풍녀 구로쌈밥'(054-749-0600)
식당에서 한국전통쌈밥으로 12:10부터 40분간 식사를 하였습니다.
점심 때에는 이흥주 고문님께서 우렁찬 목소리로 건배를 하였습니다.
"한사모 회원님들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관광버스의 양영경 기사님이 이 식당 주인을 매우 잘 알고 계셨습니다.
원래 점심은 요석궁 식당에서 할 예정이었으나
많은 분들의 추천을 받아 이 식당으로 변경하였던 곳입니다.
12:50 점심식사를 끝낸 우리들은 2.4km 거리에 있는 오릉으로
버스를 타고 다함께 이동을 하였습니다.
둘째 날 오후 걷기의 후기는 연이어서 게재할 예정입니다.
오전 걷기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