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중에는 '용장암 소숯불'로 발음하기도 한 식당에서
‘한우암소숯불구이 정식’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전 건배사는 함수곤 대표님께서 했는데
‘당신-멋저(져가 아님)’였습니다.
함 대표님의 음성이 힘차게 들려서 좋았습니다.
한우 3년생 암소의 안심 1.5인분(1인당)을 숯불구이로 요리해서
배를 가득 채운 회원님들께서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10대
문화유산 도시 경주에서의 첫발을 더욱 힘차게 내딛었습니다.
불국사 앞길을 거쳐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숲길은
학생 때 석굴암 해맞이를 보러 새벽에 올라가던 그 길이었으나
가을철에 버스를 타고 오르는 맛도 또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버스로 석굴암 주차장까지 이동하여 내려서
진풍길 회원님의 선도로 준비 체조를 하고 난 후, 가을 단풍의
햇살이 아름답게 빛나는 석굴암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맑고 쾌적한 가을 날씨에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숲길을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 석굴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유리벽을 통해 바라본 것이지
직접 부처님 앞에까지 들어 갈 수는 없었습니다.
학생 시절 수학여행을 와서 석굴암 안쪽으로 쑥 들어와
조각 작품 문화재를 만져보았던 그 시절이 아련하기만 합니다.
구경 후 내려와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인증 샷을 찍는
바로 그 돌계단에 앉아 우리 일행도 사진을 찍었습니다.
단체사진의 윗쪽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 안에는 통일신라
불교 미술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석굴암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석굴암 전망대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본 후,
다리가 아프거나 몸이 불편한 회원은 석굴암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불국사 정문 앞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회원들은 한창 나이 때처럼 빠른 걸음으로
계단이 있는 숲길 2km를 걸어서 불국사로 내려왔습니다.
걷기 위해 온 우리 회원님들께 경주의 다른 곳은 몰라도
그간 수없이 들었을 석굴암과 잠시 후에 도착할 불국사에 대하여
설명한다는 것은 오히려 노이즈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유명 작가의 수려한 문체의 기행문이
국어교과서에 실려 거의 외우다시피한 고적들이 아닌가.
또한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삼한 통일을 이룬
무열왕과 문무왕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 신라에서 정치,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신라 역사상
최고의 융성기가 어느 때일까 하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바로 경덕왕 때인데 이 때에 재상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현재 이름은 석굴암)를 세웠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신라 오악 중 동악(東岳)으로 신라인에게 존중 받았던 토함산은,
용의 신앙과 결부된 영지로서 죽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대왕에서 동물인 용이 된 문무왕의 대왕암이
토함산 바로 아래에 있는 수도 경주의 가장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당시 천하무적 석탈해는 동악의 수호신이 되고
통일 신라를 이뤄낸 문무왕이 토함산 아래 바다에 호국대룡이 되었으니
이 두 분 왕에 대한 숭앙 정신은 석굴암 창건에 녹아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김대성의 발원은 신라인의 염원이었고
국민의 마음을 모아 인공적으로 쌓아서 만든 석굴암은
신라인의 창의와 예술적 기품이 응집된
민족정신과 예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석굴암에서 불국사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내려온 것은
우리 나이에 아무래도 무리였다는 사실은 다음 날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국사 정문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후, 천왕문을 거쳐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불국사 경내로 들어가, 한사모 기를 앞세우고 걷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돌을 밀가루 반죽처럼 다루었다는 국어교과서의 글이 생각나게 하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축과 백운교, 청운교는 아직도 그대로인데
50년대, 60년대에 수학여행을 왔었다는 당시 10대의 회원님들은
어느덧 70, 80 고개를 넘긴 노익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국사는 다보탑, 석가탑, 백운·청운교,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1995년 석굴암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이 경덕왕 10년(751)에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되었습니다.
선조 26년(1593)에 왜란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으나
1969~1973년에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일합방 후 1912년 이래 왜정이 몇 차례 시멘트를 바르는 공사로 원형을
훼손한 석굴암보다는 형편이 나은 것이 아닐까 하고 역사학도도 아닌 내가 감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역사학도보다 먼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960년대에 대학 다닐 때 석가탑과 다보탑의 재료인 암석 연구 용역을
받아 연구한 지질학 교수님께 들은 것입니다.
석가탑에 쓰인 암석은 신라의 여러 강역에서 운반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 건물을 일본 총독부가 지을 때 주된 석재는
창신동의 서울화강암에서 가져다 사용했지만 중앙 홀의 청록색 대리석은
평안도 대석회암 지대에서 가져오는 등 석재를 8도에서 가져다 썼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본에 비교하기는 싫지만 1300년 전에 신라는
불국사를 창건하며 융성한 국운과 찬란한 불교문화를 집대성한 것이라는
당시의 교수님(김대성이 아닌 이대성 교수님으로 작고함) 말씀이 떠오릅니다.
70년대 학생들을 인솔해서 수학여행을 오면
반별 사진을 찍었던 백운교는 출입금지이고, 회원님들은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대웅전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촬영한 후 불국사 경내를 둘러보고
남쪽 후문으로 내려와 버스에 다시 올라 감포 대왕암으로 떠났습니다.
감포 대왕암으로 이동하면서 왼쪽으로 커다란 감은사탑이 보입니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완성한 감은사와
탑 밑으로 물길이 들어오게 만들어 용이 드나들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대왕암은 버스에서 바라보며 지나고
양남에서 내려 양남주상절리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일본으로 지나가는 태풍의 영향으로 4~5m 높이의 큰 파도가 일렁이는
동해를 오른편에 두고 북상하면서 여러 곳에 있는 주상절리를 보았습니다.
성난 파도란 바로 이런 거니 봐라 하듯이 큰 파도가
흰 포말을 일으키며 키를 한껏 키워서 굉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바위를 넘어 해안을 철썩 때리곤 했습니다.
1.6km에 걸친 주상절리가 흰색 파도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했습니다.
결국 절리의 주상보다는 주상의 횡단면인 6각형 모양을 주로 보았습니다.
부채꼴 모양의 부채바위 주상 절리가 대표적인 볼거리이고
큰 바위 위에 곡예사처럼 홀로 굳건히 살아가는 소나무가 일품이었습니다.
왼편 언덕은 우리가 걷던 단구와 또 다른 해안단구인데
퇴적된지 100만 년도 안되어 미생 퇴적암의 층상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동해안은 몇 번의 융기로 해안단구가 생겼는데
지금의 해파랑길은 가장 마지막에 생긴 단구 위에 있는 편평한 길입니다.
저녁 식사는 동해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돌고래횟집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3층에 올라가 ‘자연산 회 정식’으로 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여행을 누구랑 가서 무엇을 먹었는가를 중요하게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사모와 함께 가서 어둠이 내리는 먼 동해를 바라보며
자연산 회를 먹었다면 최고로 처도 되지 않을까.
두툼하고 넉넉하게 썬 회에 길들여진
서울 사람들에게는 너무 얇아서인지 맛이 너무 좋아서인지
충분히 씹을 시간도 없이 넘어가곤 했습니다.
저녁 식사에서 막걸리 잔에 담는 건배사는 윤종영 고문님께서 했습니다.
그야말로 잔을 완전히 비우고 그 잔을 머리 위에 엎는 건배를 요구하셨습니다.
‘멋있다-한사모, 영원하라-한사모, 다같이 건배-건배’를 힘껏 외쳤습니다.
식사 후 호텔 온천욕이 20시에 입욕 마감이라 안내해도
온천욕 대신 동궁과 월지(전 안압지)의 야경을 보자는 회원님들의 말씀에 따라
오늘 새벽부터 강행군을 한 피로도 잊은 채 경주 야경을 보러 이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주에 가시면 꼭 야경을 보세요."라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동궁은 왕자가 거처하던 곳이고,
월지는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 합니다.
삼국통일 후 문무왕 때(674)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섬 3개와 12봉우리인 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명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휘황찬란한 전각과 조형물이
월지 물에 드리운 그림자와 함께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가을철 경주의 매력적인 야경에 감동을 잘하는 회원님들께서
이를 배경으로 멋진 포즈를 사진에 열심히 담았습니다.
평소에 보았던 첨성대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서나 봄직한
환상적인 구조물로, 곡선미를 자랑하며 휘황하게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을 받으며 첨성대가 색다른 모습으로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첨성대의 잔영을 머리에 담고 숙소인 더케이호텔에 들어오니
밤 9시가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만 보아도 한사모 회원님들의 건강은
타고나셨고 평소에 걷기 운동을 계속하셔서 더욱 굳건하다고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