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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3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에수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복음 (마태11,25~3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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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3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에수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복음 (마태11,25~30)

불꽃緝熙 2017. 6. 23. 17:25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5~26)

 

 

원문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여기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는 호격이다.

 

사실 예수님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마태오 복음 11장 27절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의 독특한 친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마태26,39.42).

 

하지만 유다인들은 이것을 빌미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죽이고자 했다(요한5,18).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만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성드러내는데 적합한 용어였지만, 무지한 유다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하느님을 망령되이 부르는 신성모독적 언행으로 비쳐진 것이다.

 

한편,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말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사도17,24).

 

그리고 창세기 14장 19절에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Maker of heaven and earth)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14장 19절에서 이 말을 했던 사람은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른 영원한 대사제였다(히브6,20).

 

멜키체덱보다 이천여 년 뒤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예표하는 구약의 인물인  멜키체덱과 같은 말로써 하느님을 호칭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주되심을 다시 한번 확증하셨던 것이다.

 

창조주이시기에 당신이 가지는 창조물에 대한 주권(이사64,8)높여 표현한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호칭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 '이것'은 무엇인가?

 

원문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타우타' ; tauta : '아우타' ; auta ; them)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한 가지 사실이나 가르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건과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의 주된 관심사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며, 앞의 마태오 복음 11장 20~24절의 예수님의 책망과 심판 경고의 주된 이유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하느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 즉 복음을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 '철부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슬기롭다는'에 해당하는 '쉬네톤'(syneton) '이해력을 가진', '신중한', '학식이 있는', '지성을 갖춘'이란 뜻이다.

 

보통 자칭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를 가리킨다고 말한다(마태23,24).

 

그러나 단지 그들만이 아니고, 마태오 복음 11장 16절에 나오는 '이 세대',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받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든 불신자들을 언급한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철부지들'로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젖먹이', '경험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의 제자들' 혹은 '순박한 사람들'을 말한다.

 

결국 본문은 많이 배워서 자기 스스로 사리분별에 신중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제 젖먹이처럼 경험없고 순박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아이러니같은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의 진리를 나타내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얻어 입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끝으로,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에서 '아버지'로 직역된 '호 파테르'(ho pater)에서 정관사 '호'(ho)가 사용된 것하느님과 예수님이 일반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아니라 유일하고 특이한 부자(父子)관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요한10,14.15).

 

더군다나 '뜻'으로 번역된 '유도키아'(eudokia)'좋다', '잘되다'는 뜻의 부사 '유'(eu)'생각'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도키아'(dokia)의 합성어로서 원래 '선의'(good will), '기쁘신 뜻'(good pleasure), '은혜로운 뜻'(gracious will)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고 자비로운 뜻을 알고 있는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감격적인 표현이 잘 담겨져 있다.

 

즉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든지 감추지 않는지는 순전히 하느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음에 대한 예수님의 전적인 동의가 나타나고 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은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 (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3장,4장).

 

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카이'(kai ; and)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 묵시14,13).

 

그리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prays ; gentle meek)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키며(마태5,5),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 humble ; lowly)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취하셨고(이사42,2.3 ;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셧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 yoke)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