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의 여름>
[서강]: 도원수님과 전하와의 인연은 앞에서도 잠깐 말씀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원정군 도원수로 임명되실 때까지 전하와의 관계를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내촌]: 나와 전하와의 첫 인연은 잠깐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내가 관직에
첫발을 디딘 시강원(說書)에서 세자이신 전하를 뵈었고 당시 왜란 종결을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는 전하를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었기에 나는 그곳을
떠난 후에도 기회 있을 때 마다 자주 찾아뵙고 가까이 교류하며 지냈지.
임란 뒤, 적자 영창대군의 탄생(仁穆王后)과 더불어 비장비적설(非長非嫡說:
장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니다)이 횡행하여 전하에 대한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
전하는 나에게 많은 것을 의논하기도 하고 나는 북인은 아니었지만 전하를 위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했지. 그리고 내가 임란 과정 중, 내원한
명나라 군을 보며 중국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에 나는 중국어를 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고 나의 중국어 실력이 인정되어 선왕(宣祖)재위 시 어전통사
(御前通事:국왕통역)가 되기도 했지만 특히 전하가 즉위식에 참석한 명 나라
책봉사(冊封使)를 맞는 어전통사로 나를 임명해 나는 전하를 위해 진력했었지.
그런데 전하가 즉위한 후, 조선과 명국 간의 가장 큰 문제가 명나라가 전하
를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 후궁(恭嬪金氏) 출생인데다 장자(長子)도 아니고
차자(次子)라 하여 이를 트집 잡아 우리를 외교적으로 궁지로 몰았어. 더우기
선왕(宣祖)이 승하하신 후 이를 알리기 위해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
使)로 명 나라에 갔던 이호민(李好閔)을 명의 예부에서 장자인 임해군(臨海君:
광해군 친형) 대신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을 추궁하자 당황한 나머지
임해군이 중풍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없어 차자가 올랐다고 거짓 답변을 해
명에서 이를 조사한다고 사문관(査問官)으로 요동도사 엄일괴(嚴一魁)까지
파견하여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전하는 이런 조선과 명국 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즉위년 6월에
진주사(進奏使)를 파견하며 나를 여기에 가장 중요한 서장관(書狀官:사신일행
의 실무를 총괄)에 임명하고 당시 조정의 중신인 이덕형(李德馨)을 정사(正使)
부사(副使)에 황신(黃愼)을 임명하였어. 이 진주사는 명나라로부터 전하 즉위
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전하의 왕위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아 국정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책무를 맡게 하신 거야. 전하는 나를 믿고 이런 중차대한 일을 선듯
맡기셨는데 나는 몇 번 고사했지만 전하의 뜻이 완강하여 전하를 위하는 일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나는 목숨을 걸고 이를 맡았지.
우리 주청사 일행은 이런 뜻을 가지고 명 나라에 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얻고 귀국할 수 있었어.
*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尊德亭)'>
[서강]: 도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전하가 도원수님을 얼마나 신뢰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진주사를 보더라도 정사, 부사 모두가 당대 최고의 조정 중신
인데, 여기에 도원수님을 서장관으로 임명하신 것을 보더라도 알 것 같습니다.
이런 신뢰는 도원수님이 전하를 믿고 의지하며 전하의 뜻을 최선을 다해 따라
주셨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왕조 역대
군왕 27분을 비교 평가하면서 보는 측면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습니다만 저는
광해군 전하에게 모든 부면에서 높은 평정을 주고 있습니다. 도원수님이 보신
당시의 국내정세나 왕위에 오른 후에 전하는 어떠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촌]: 서강이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니 당시의 정세는 잘 알겠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온 것이니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이야기 해보지. 서강도 알겠지만
전하가 즉위할 때, 7년 여의 왜란 후유증으로 전국의 농토는 거의 황폐화되어
농민들은 농지를 떠나 떼를 지어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등 눈뜨고 보기 어려
운 상황이었고, 더욱이 전하 즉위를 전, 후해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까지
만연해 조세수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국가재정은 거의 파탄 상태였었지.
이런 속에서도 조정 중신들은 정파 간에 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고 북방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강성해진 여진족이 새로운 위협 세력으로 등장하여 전
운이 감도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친 상황이었어. 이런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오른 전하는 암담한 난국을 극복하여 국가적 위기를 구하고 이
전에 어떤 군왕도 엄두를 못냈던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지. 이는 전하가
세자시절 임란와중에 분조를 이끌고 역대 군왕가운데 유일하게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의 생활모습과 애환을 살펴보고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임금이 되신 분이었
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전하의 개혁정치는 서강도 잘 알고 있겠지만, 몇 가지 들어보면 당파를
초월한 과감한 인재등용정책도 들어 볼 수 있지만 내가 가장 높이 손꼽고 싶은
것은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한 경제정책이지.
전하는 즉위한 다음날 일종의 경제개혁선언을 하시었어. 기억나는 것을 보면
"해묵은 포흠(逋欠:관청의 물품을 사용으로 써버림)과 급하지않은 공부(貢賦),
군졸의 도망과 호세가의 침능,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모든 폐단을 일체 줄이고
혁파하라”라고 엄명을 내리시고 이것에 의거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고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세제 가운데 조(調:공물:지방특산물)이고 여기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방납(防納:공물대납)이었지. 이는 농민들이 내는 특산물을
관리나 상인들이 대납하고 이 대금을 농민들로부터 중간 이익을 크게 취하며
징수하여 농민들의 피해가 엄청났던 것인데 이에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하였어.
전하는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이 조를 미곡으로 직접
바치게 하였어. 또 농정과 군정 그리고 조세를 정확하게 실시하기 위해 토지
조사사업과 호패법을 실시했고 또한 피폐한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공업
중시정책을 추진하여 은광개발이나 주전(鑄錢:동전제조)제조도 장려하고 염철
(鹽鐵:소금과 철)의 국가전매제도도 추진하여 그 당시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혁정치를 실시하였지.
이러한 모든 정책은 국가재정을 회복하고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면서 백성
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생활향상을 이루려는 것이었어.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기존의 고위관료층이나 대토지소유자들에게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리던 많은
이익을 내놓아야하니 결국 전하에게 반기를 들어 반 전하의 세력이 되었지만.
이외도 전란으로 흩어진 서책을 수집하고 다시 편찬 보급하고 4대 사고 중
유일하게 남은 왕조실록 전주사고본을 복간 보관케 한 것이나 독서당을 설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을 실시하여 문예 진흥과 인재양성을 한 것이라든지.
참 요지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한의서의 성서와 같은 동의보감도
허준과 전하의 애민정신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최근 한양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궁궐가운데 경복궁을 제외한
모든 궁궐이 전하가 복원(창덕궁, 창경궁)하거나 새로 지은(경희궁) 것이지.
어떻든 전하의 이런 정책들은 국력회복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뒤에
조선후기 문예부흥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해. 아직 더 이야기할 것이 많이
있지만, 이만 이야기하지. 정말 대단하신 전하이셨어.
* <창덕궁 후원 깊숙히 있는 '연경당(演慶堂)'>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따라
대화체로 특색있게 서술된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는
앞으로 4회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편집되어 '한밤의 사진편지'를
사랑하는 한사모 회원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많은 사랑과 성원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2016년 6월 2일, 편집 및 사진자료를 제공하여...
이경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