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 원정군의 부대 편성은 어떻게 이루워젔는지요. 제가 얼른 생각하기
에는 명나라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파병이었기에 병력을 노약졸로 명색뿐인
병졸로 구성하진 않았는지요?
[내촌]: 전하의 생각은 달랐어, 전하는 임란 후 북방문제 해결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최정예부대를 선정, 파병부대를 편성하여 어떠한 돌발 사태에도
소신있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부대편성은
포수 3500명(평안도 1000, 충청도 1000, 전라도 1000, 황해도 500)
사수 3500명(평안도 1500, 전라도 500, 충청도 500, 황해도 1000)
살수 3000명(평안도 1000, 전라도 1000, 충청도 500, 황해도 500)
1만명으로 구성하였는데 명나라에서 포수의 수를 증원하여 달라 하여 포수를
증원하여 총11,500명으로 편성하였고
지휘부는 도원수 밑에 중군관 이계선(李繼先),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중군관 안여늘(安汝늘), 방어사 문희성(文希聖), 좌조방장 김응하(金應河),
우조방장 이원일(李元一)로 배정하였어.
나는 도원수로 임명된 후, 근 1년 동안 원정군을 편성하고 부대훈련에 전념
하여 나름대로 최고의 부대를 만들었지. 나는 후금의 철기부대(鐵騎部隊:강철
같은 기병부대)와 조우했을 때 이를 분쇄하고 병사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화포와 조총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기마부대를 제어할 수 있는 당시로는
신무기라 할 수 있는 거마작(* 기병대를 막기 위하여 대 따위로 만든 울타리)
이라는 장비까지 갖추었지. 그러면서 나는 지휘관 회의를 수 차례 소집하고
우리가 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명과의 대의 명분이 아니고, 우리의 국익이
최우선이라고 강하게 주지시켰고 전 장병에게도우리의 파병은 명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지.
* <도원수 강홍립의 묘>
[서강]: 오래전 일인데도 도원수님은 정말 소상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도원수님, 말씀하신대로 군 병력은 전국에서 소집하여 부대편성을
하셨는데 주로 어디에 집결시켜 부대편성을 하고 훈련시키셨는지, 그리고 명이
원병을 요청한 것은 요동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만주지역 수복을 위한 것인데
언제 출병을 하셨는지, 현재 잔존하는 기록은 극히 단편적이어서 당시의 상황
을 도원수님으로부터 듣고 싶습니다.
[내촌]: 내가 도원수에 임명되고 부대원을 평안도 창성(昌城)에 집결시켜
이곳에서 근 1년 여 동안의 부대훈련을 하고 다음해 전하 재위11년(1619), 명
과의 약속에 따라 2월 1일 조선원정군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넜고, 내가 이끈
본진은 2월 23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지.
나는 압록강을 도하하기 전날 전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고 만약 만주에서
적과 조우했을 때 후금군이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을 하지 말고, 이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방어적인 목적으로 공격하라고 신신 당부하였어.
우리 원정군이 만주에 들어가자 조선 원정군은 4영으로 편제된 명 나라
원정군 진영 중 요양총병(遼陽摠兵) 유정(劉綎)이 이끈 동로군에 배속되었는데
명 나라 최고 사령관은 양호(楊鎬)로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군 사령관
으로 와 우리나라에 오래 머물었던 인물이지.
그래서 그는 비교적 조선 사정에 달통하였고 전하의 의중도 비교적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군 조총부대의 위력을 잘 알고 있어 후금의 기병부대
를 격멸할 수 있는 선봉부대로 조선군을 내세울 계략을 세우고 있었어. 그래서
양호는 조선군에 유격장군 교일기(喬一琦)를 파견하여 전쟁을 독려하며 우리를
괴롭혔지.
우리는 만주지역이 생소한 곳이었기에 나름대로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지만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고 행군 길은 만만치가 않았어. 우리는 압록강을 건너
가자 우리의 목적지인 후금의 도읍지인 흥경로성(興京老城)까지 방향을 정하고
숙박시설하나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길을 따라 노천에서 숙영(宿營)을 하면서
빠른 길을 재촉하는 명군 지휘부의 독촉을 받으며 어려운 행군을 하였지.
나는 명군 지휘부를 설득하여 일정을 늦추려 했지만, 이들은 우리 군을 명군
앞에 세워 후금군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에 우리 군의 속도를 계속
재촉하였어. 내가 행군 속도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자, 이들은 공격 일자가
황제의 명을 받아 결정된 것이기에 이를 변경할 수 없고, 만약 이를 지키지 못
하면 황제의 명을 어긴 것으로 참수형(斬首刑)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나를
협박하였어.
더욱이 우리 군이 걷는 노정(路程)에는 험준한 산과 강이 길을 막고 있어
우리를 괴롭혔고, 또 날씨마저 늦추위가 몰려오고 눈보라까지 몰아쳐 병졸들의
옷과 군장이 젖은 데다 병졸들은 창성을 출발할 때 10일 분의 식량과 조총과
탄약 등 상당한 무게의 군장을 휴대하였기에 체력 소모가 엄청났지.
그런데다 원정군의 군량 수송을 담당했던 운반선이 눈보라를 동반한 한풍
(寒風)이 몰아쳐 제때에 기항을 하지 못해 식량을 운반하는 후송 부대가 전진
부대를 제대로 쫓지를 못해 식량이 부족하여 병졸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어
하는데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어. 그래서 최후의 방책으로 나는 제장들에게
가능한 주변 여진 부락에 들러 곡식을 강제로 꾸는 형식으로 보충하도록 했고
이렇게 하며 우리는 힘들게 진군을 했어.
어떻든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그런대로 이겨가며 2월24일 앵아구(鶯兒溝)에,
25일 양마전(亮馬佃)에, 27일 배동갈령(拜東葛嶺)에, 28일 우모채(牛毛寨)에,
3월1일 마가채(馬家寨)에, 2일 심하(深河)에 도착하였지.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따라
대화체로 특색있게 서술된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두 번째 편을
여러가지 자료를 첨부하여 '한밤의 사진편지'를 사랑하는 한사모 회원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6년 6월 7일, 편집 및 사진자료를 제공하여...
이경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