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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384호(윤종영의 역사이야기(1)/'16/6/2/목)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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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384호(윤종영의 역사이야기(1)/'16/6/2/목)

불꽃緝熙 2016. 6. 2. 19:32

 

 

 

 

한밤의 사진편지 제2384호 ('16/6/2/목)

 

[한사모' 공식 카페] - '한밤의 사진편지 romantic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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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덕궁 후원에 있는 '영화당(映花堂)' - 현판은 영조의 어필입니다.>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 광해군 시기의 국제정세와 관형향배(觀形向背) ①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



            * 때 :    2015년 9월 9일(음 7월 27일) 밤10시



            * 장소 : 창덕궁 영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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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종영 (한사모 수석고문, yooncy1936@hanmail.net )


 

 


   * <서강(西江) 윤종영  : 전 교육부 역사담당 편수관>

    

 

 

        [서강]: 제가 도원수님을 모시겠다는 연락을 받고 놀라셨죠.    


        제가 도원수님을 모시게 된 것은 역사를 공부하며 조선 역대 군왕 가운데    

      광해군 전하를 좋아하고 높은 평가를 드리고 있어 전하에 관한 글도 수편 쓰고    

      10 여 년 전에는 전하를 모시고 말씀을 나누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도원수님이 화제가 되어 전하로부터 도원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기에    

      도원수님을 한번 꼭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든 차에 며칠 전 도원수님의 묘소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소재)를 찾을 기회가 있어 도원수님 기일이 며칠 안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원수님을 제일(祭日)에 맞추어 모시기로 하고 연락     

      을 드렸습니다. 모시는 장소를 어디로 할까 생각하다 전하와 깊은 인연을 갖고    

      계신 창덕궁 영화당(暎花堂)으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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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호를 서강(西江)이라구, 별로 찾는 사람 없는 나를 기일(忌日)까지    

      알고 불러주어 고맙구먼. 나에게 미지의 인물인 서강이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한다고 연락이 와, 나도 서강에 대해 나름대로 알아보았지만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좀 망설이다가 오늘이 기일이구 해서 혼자 보내기도    

      쓸쓸해 바람도 쏘이고 세상이야기도 들어볼 겸 나왔구먼.     

 

        참, 말은 놓겠네. 수 백년 나이 차이가 나니 괜찮겠지? 지금 들으니 서강이     

      나를 부른 것이 서강이 역사를 공부하며 전하와 인연이 있고 그래서 더욱     


      나에게 관심이 있어 부르게 됬다고. 어떻든 불러주어 고맙구먼. 그리고 나의     

      호칭을 나의 마지막 벼슬인 도원수라 불러주어 마음이 편안해.     

 

 

 

 

        [서강]: 제가 말씀 드린 대로 도원수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보려고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도원수님이 남기신 글을 볼 수 없고 왕조실록 등    

      당시 사료에 극히 단편적인 글 몇 편만이 남아있어 참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의논도 안 드리고 결정해서 연락을 드렸    

      기에 안 나오시지 않나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도원수님 기일이구 해서 제가 제례음식을 좀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도원수님, 술은 좋아하시는지요?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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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술은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까운 지우들과 만나면 몇 잔    

      드는 정도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한잔 하지. 내가 서강을 자네라 부르겠네,    

      자네도 한잔 하지.술맛이 좋구먼, 옛날에 들던 약주 술 맛이 나네.     

 

        이곳에 앉아보니 잊을 수 없는 그 옛일이 생각나네. 나의 인생에 큰 전환점    

      이 되었던 그날 일이, 퇴청 후 집에 있는데, 궁으로 부터 전하가 찾으신다는     

      전갈을 받아 입궁하여 이곳으로 안내되어 오니 어스름 달밤에 전하가 주변을     


      물리치고 명나라에 파병문제를 의논하며 나를 도원수로 부탁하시던 옛일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구먼. 내가 이곳에서 전하와 만났던 옛일이 기록에 안     

      나와 있는데 서강이 이를 어떻게 알고 이곳에 장소를 정했는지.     

 

 

   * <조선 왕조 왕세자가 동궁 시절 글 공부하였던 '성정각(誠正閣)'>

 

 

        [서강]: 저는 전하가 창덕궁을 복원하시고 이곳에서 중신들과 야간에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셨다는 기록을 본 기억이 떠올라 이곳을 만나뵙는 장소로 정하였    

      는데, 우연하게도 도원수님과 그런 큰 인연이 있었다니 정말 행운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전하가 복원하셨던 것이 낙후되어 후대에 다시 손을     

      보았다고 하지만 원형이 잘 보존된 것 같습니다.     

 

        어떻든 이곳에서 도원수님을 뵙고 있으니 옛날 전하와 이곳에서 마주앉으    

      시어 나라 일을 걱정하시며 말씀을 나누시던 당시 모습을 뵙는 것 같습니다.     


      좀 이야기 방향이 다르지만 저는 도원수님을 뵈면서 제가 머릿속에 그렸던     

      병사들 앞에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호풍스러운 옛 장군의 모습과는 달리     

      단아(端雅)하고 빈틈없는 요즘 장군 같은 지장(智將)을 뵙는 것 같았습니다.     


      참 도원수님은 원래 무반 출신이 아니고 문반출신이시죠. 제가 알기에 도원수     

      님 집안도 문반 집안으로 알고 있는데 집안 이야기 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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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내가 후금(後金)에 투항했다고 하여 나의 행적이나 우리 집안이     

      별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내입으로 이야기하기는 쑥스러우나 당시로는 우리     

      집안은 자랑스러운 집안이었지. 나의 선친(姜紳)은 참찬(參贊:정2품)을 지내셨    

      고, 모친은 영의정 정광필의 증손녀이고 조부(姜士尙)는 우의정을 지내셨으니     


      나는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기에 착실하게 과거준비를 할 수 있었고     

      더욱이 학문에 관심을 갖고 몰입하여 내 나이 29 세 되던 선조 22(158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그 뒤 내 나이 37세 되던 선조30(1597)년, 대과에 급제     


      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지, 그 때가 임진왜란 중이었지만 벼슬길이 비교적     

      순탄하였어. 처음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곳이 왕세자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     

      (侍講院) 설서(說書)로 이곳에서 전하를 뵙고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지.     


        그때 전하의 연세가 22세이셨을 거야, 정말 의기충만(意氣充滿)하셨고 임란    

      중이었기에 조정을 대신한 분조(分曹)나 뒤에 무군사(撫軍司)를 이끌며 전선을    

      누비던 전하를 가까이 뵈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지. 전하에 대한 이야기는 좀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내 이야기를 계속하지.     


        내가 주로 중앙관서 문반직에 보직되었다가 선조32년, 함경도 도사(都事)로    

      임명되어 당시로 북방에 최전방인 함경도에 부임하면서 국방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지. 더욱이 선조 40년 함경도 순검어사(巡檢御史), 그리고 전하가     


      즉위하신 다음해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등용되면서 나는 여진족의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갖고 북방 여진족 방어에 전심전력하면서 나름대로 여러 방법을 생각     

      하곤 이를 구체화하여 건의하기도 하였지.     

 

 

   *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정(芙蓉亭)>

 

 

        [서강]: 도원수님이 함경도에 부임했던 것은 기록에서 보았지만 여진과의    

      이런 깊은 인연이 있어 북방 방어에 많은 계책을 건의하셨던 것은 미처 몰랐    


      습니다. 도원수님, 그럼 당시의 여진족들의 동향(動向)을 좀 말씀해주시면서     

      여진족 방어를 위해 조정에 제시했던 계책을 설명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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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서강이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니 혹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기록을 본적이 있는지, 실록에도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임진난이    

      일어난지 3년 되던 해(선조28년)에 남부주부(南部主簿:종6품) 신충일(申忠一)    


      을 왕명으로 당시 흥기 중인, 뒤에 청 태조가 된 누루하치(奴兒哈赤)의 거성에    

      파견, 여진족의 실정을 살펴보고 오게하여 그가 조정에 제출한 견문(見聞)보고    

      서이지. 이는 당시 우리가 왜의 침략을 받자 건주위도독으로 있던 누루하치가     


      우리를 돕겠다고 원병을 자청한 일이 있고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원병을 거론할 정도로 그들의 세력 확장이 만만치 않아 북방에 상당한     

      위협으로 간주(看做)되어 조정에서 여진의 내부정찰까지 하였던 것이지. 나도     


      뒤에 무관으로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신충일 장군을 만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어 여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이 있었고 원정군을 이끌 때    

      많은 도움을 받았지.    


        내가 처음 여진족과 접촉한 것은 함경도 도사로 있을 때인데, 당시 건주에    

      누루하치가 세력을 확장하여 우리와 가까운 여진부락을 자신의 세력 하에 아우    


      르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우리와 가까운 지역의 여진부락을 공략할 계획을     

      세워 조정에 건의하였지만 채택되지 않아 뒤에 많은 아쉬움이 남았고 또 내가     


      함경도 순검어사로 있을 때 북방에 병사들을 전국적으로 모집 선발 훈련하여     

      이곳까지 파송하는 엄청난 경비와 어려움을 막기 위해 함경도 지역의 6진에     

      거주하는 병사들만 선발하여 이들에게 풍족하게 경비를 지원하며 이들을 강병     


      으로 육성하여 북방 방어에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 모든 면에 유리하다는 안을    

      건의했지만 이도 채택되지 않았어. 나는 그후 전하가 즉위한 후에도 기회있을    

      때 마다 여진문제를 많이 말씀드렸었지.    

 

 

   *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의  여름>

 

 

        [서강]: 도원수님과 전하와의 인연은 앞에서도 잠깐 말씀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원정군 도원수로 임명되실 때까지 전하와의 관계를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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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나와 전하와의 첫 인연은 잠깐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내가 관직에     

      첫발을 디딘 시강원(說書)에서 세자이신 전하를 뵈었고 당시 왜란 종결을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는 전하를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었기에 나는 그곳을     

      떠난 후에도 기회 있을 때 마다 자주 찾아뵙고 가까이 교류하며 지냈지.     


        임란 뒤, 적자 영창대군의 탄생(仁穆王后)과 더불어 비장비적설(非長非嫡說:    

      장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니다)이 횡행하여 전하에 대한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    


      전하는 나에게 많은 것을 의논하기도 하고 나는 북인은 아니었지만 전하를 위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했지. 그리고 내가 임란 과정 중, 내원한     


      명나라 군을 보며 중국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에 나는 중국어를 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고 나의 중국어 실력이 인정되어 선왕(宣祖)재위 시 어전통사     


      (御前通事:국왕통역)가 되기도 했지만 특히 전하가 즉위식에 참석한 명 나라     

      책봉사(冊封使)를 맞는 어전통사로 나를 임명해 나는 전하를 위해 진력했었지.    


        그런데 전하가 즉위한 후, 조선과 명국 간의 가장 큰 문제가 명나라가 전하    

      를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 후궁(恭嬪金氏) 출생인데다 장자(長子)도 아니고     


      차자(次子)라 하여 이를 트집 잡아 우리를 외교적으로 궁지로 몰았어. 더우기     

      선왕(宣祖)이 승하하신 후 이를 알리기 위해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    


      使)로 명 나라에 갔던 이호민(李好閔)을 명의 예부에서 장자인 임해군(臨海君:    

      광해군 친형) 대신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을 추궁하자 당황한 나머지    


      임해군이 중풍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없어 차자가 올랐다고 거짓 답변을 해     

      명에서 이를 조사한다고 사문관(査問官)으로 요동도사 엄일괴(嚴一魁)까지     

      파견하여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전하는 이런 조선과 명국 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즉위년 6월에    

      진주사(進奏使)를 파견하며 나를 여기에 가장 중요한 서장관(書狀官:사신일행     


      의 실무를 총괄)에 임명하고 당시 조정의 중신인 이덕형(李德馨)을 정사(正使)    

      부사(副使)에 황신(黃愼)을 임명하였어. 이 진주사는 명나라로부터 전하 즉위     


      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전하의 왕위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아 국정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책무를 맡게 하신 거야. 전하는 나를 믿고 이런 중차대한 일을 선듯     


      맡기셨는데 나는 몇 번 고사했지만 전하의 뜻이 완강하여 전하를 위하는 일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나는 목숨을 걸고 이를 맡았지.     


        우리 주청사 일행은 이런 뜻을 가지고 명 나라에 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얻고 귀국할 수 있었어.    

 

 

   *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尊德亭)'>

 

 

        [서강]: 도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전하가 도원수님을 얼마나 신뢰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진주사를 보더라도 정사, 부사 모두가 당대 최고의 조정 중신    

      인데, 여기에 도원수님을 서장관으로 임명하신 것을 보더라도 알 것 같습니다.    


        이런 신뢰는 도원수님이 전하를 믿고 의지하며 전하의 뜻을 최선을 다해 따라     

      주셨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왕조 역대     

      군왕 27분을 비교 평가하면서 보는 측면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습니다만 저는     


      광해군 전하에게 모든 부면에서 높은 평정을 주고 있습니다. 도원수님이 보신     

      당시의 국내정세나 왕위에 오른 후에 전하는 어떠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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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서강이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니 당시의 정세는 잘 알겠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온 것이니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이야기 해보지. 서강도 알겠지만    

      전하가 즉위할 때, 7년 여의 왜란 후유증으로 전국의 농토는 거의 황폐화되어     


      농민들은 농지를 떠나 떼를 지어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등 눈뜨고 보기 어려    

      운 상황이었고, 더욱이 전하 즉위를 전, 후해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까지     

      만연해 조세수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국가재정은 거의 파탄 상태였었지.     

 

        이런 속에서도 조정 중신들은 정파 간에 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고 북방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강성해진 여진족이 새로운 위협 세력으로 등장하여 전    

      운이 감도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친 상황이었어. 이런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오른 전하는 암담한 난국을 극복하여 국가적 위기를 구하고 이     

      전에 어떤 군왕도 엄두를 못냈던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지. 이는 전하가     


      세자시절 임란와중에 분조를 이끌고 역대 군왕가운데 유일하게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의 생활모습과 애환을 살펴보고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임금이 되신 분이었    

      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전하의 개혁정치는 서강도 잘 알고 있겠지만, 몇 가지 들어보면 당파를     

      초월한 과감한 인재등용정책도 들어 볼 수 있지만 내가 가장 높이 손꼽고 싶은    

      것은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한 경제정책이지.     


        전하는 즉위한 다음날 일종의 경제개혁선언을 하시었어. 기억나는 것을 보면    

      "해묵은 포흠(逋欠:관청의 물품을 사용으로 써버림)과 급하지않은 공부(貢賦),    


      군졸의 도망과 호세가의 침능,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모든 폐단을 일체 줄이고    

      혁파하라”라고 엄명을 내리시고 이것에 의거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고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세제 가운데 조(調:공물:지방특산물)이고 여기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방납(防納:공물대납)이었지. 이는 농민들이 내는 특산물을    


      관리나 상인들이 대납하고 이 대금을 농민들로부터 중간 이익을 크게 취하며     

      징수하여 농민들의 피해가 엄청났던 것인데 이에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하였어.    

 

        전하는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이 조를 미곡으로 직접    

      바치게 하였어. 또 농정과 군정 그리고 조세를 정확하게 실시하기 위해 토지     

      조사사업과 호패법을 실시했고 또한 피폐한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공업     


      중시정책을 추진하여 은광개발이나 주전(鑄錢:동전제조)제조도 장려하고 염철     

      (鹽鐵:소금과 철)의 국가전매제도도 추진하여 그 당시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혁정치를 실시하였지.     

 

        이러한 모든 정책은 국가재정을 회복하고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면서 백성    

      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생활향상을 이루려는 것이었어.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기존의 고위관료층이나 대토지소유자들에게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리던 많은     

      이익을 내놓아야하니 결국 전하에게 반기를 들어 반 전하의 세력이 되었지만.     

 

        이외도 전란으로 흩어진 서책을 수집하고 다시 편찬 보급하고 4대 사고 중    

      유일하게 남은 왕조실록 전주사고본을 복간 보관케 한 것이나 독서당을 설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을 실시하여 문예 진흥과 인재양성을 한 것이라든지.     


        참 요지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한의서의 성서와 같은 동의보감도     

      허준과 전하의 애민정신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최근 한양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궁궐가운데 경복궁을 제외한     

      모든 궁궐이 전하가 복원(창덕궁, 창경궁)하거나 새로 지은(경희궁) 것이지.     


        어떻든 전하의 이런 정책들은 국력회복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뒤에     

      조선후기 문예부흥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해. 아직 더 이야기할 것이 많이     

      있지만, 이만 이야기하지. 정말 대단하신 전하이셨어.     

 

 

   * <창덕궁 후원 깊숙히 있는 '연경당(演慶堂)'>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따라

대화체로 특색있게 서술된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는


앞으로 4회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편집되어 '한밤의 사진편지'를

사랑하는 한사모 회원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많은 사랑과 성원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2016년 6월 2일,   편집 및 사진자료를 제공하여...


이경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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