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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386호(윤종영의 역사이야기(2)/'16/6/7/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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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386호(윤종영의 역사이야기(2)/'16/6/7/화)

불꽃緝熙 2016. 6. 8. 00:44

 

 

 

 

한밤의 사진편지 제2386호 ('16/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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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창덕궁 인정전>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 광해군 시기의 국제정세와 관형향배(觀形向背) ②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



            * 때 :    2015년 9월 9일(음 7월 27일) 밤10시



            * 장소 : 창덕궁 영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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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종영 (한사모 수석고문, yooncy1936@hanmail.net )


 

 


   * <서강(西江) 윤종영  : 전 교육부 역사담당 편수관>

    

 

 

        [서강]: 도원수님 말씀대로 광해군 전하는 왜란 후의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     

      어느 군왕보다도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군왕이신데 뒤에 당쟁에 휩쓸려 허망하    


      게 왕위에서 쫓겨나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왕조 군주가운데 대표적인 폭군으로     

      기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요지음 전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이 전하의 대외정책    

      입니다. 도원수님, 앞에서도 좀 말씀하셨지만 당시의 우리나라 주변에는 명,     


      후금, 일본의 정치적인 변화와 이에 대한 전하의 대외교정책, 그리고 조정     

      중신, 사대부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었는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약주 한잔 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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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서강도 잘 알고 있겠지만 왜란을 전후해서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 삼국은 큰 변혁기였지.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풍신(豊臣秀吉:도요토미히데요시) 집안이 몰락하고     

      덕천(德川家康:도쿠가와이에야스) 집안이 일본의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고     


      중국의 명나라는 임란의 출병과 농민반란 등으로 쇠망의 길에 들어섰고     

 

        만주의 신흥세력인 여진족은 건주위를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확대,     

      전하 재위8년(1616) 국호를 후금 국이라 하고 급속히 팽창, 주변국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지. 이러한 속에서 즉위한 전하는 주변국가와의 새로운 관계설정     

      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지.     

 

        전하는 어떻게 하던 전쟁을 막고 백성들에게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리학적인 대의명분(大義名分)보다 국익을 으뜸으로     


      하는 실리적인 경세관을 대외정책의 바탕으로 삼으셨지. 그래서 전하는 후금과    

      일본을 적대국으로 삼아 남북으로 협공을 당하는 최악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나     


      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최선의 방략이라 생각하시었고 그래서 조정의 중신이나    

      사대부는 물론 백성 모두가 반대하고 왜라하면 치를 떠는 일본과 임란 뒤처리     


      강화 조약인 기유약조(己酉約條:광해군 1년)를 체결하고 국교를 재개하였어.     


        정말 당시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로서 전하는 오랜 숙제인 일본    

      문제를 해결하고 북방문제에만 전념 할 수 있으셨지. 명과 후금문제는 좀 쉬었    


      다가 명의 파병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기로 하면 어떨까?     

 

 

 

 

        [서강]: 좋습니다. 약주 한 잔 하시면서 좀 쉬셨다가 제가 그러지 않아도 명     

      파병문제를 주제로 도원수님에게 여쭈워 보려고 했는데 잘 되었습니다.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도원수님,술맛이 어떠하신지요? 이 술은 경기도 일동에 있는    

      양조장에서 만든술로 오순주(五筍酒)라는 가양주인데 제가 좋아하는 술입니다.    


      저도 한잔 하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명나라가 원병을 요청한 것은     

      언제이고 어쩔 수 없이 파병을 결정한 배경은 어떠하였는지 말씀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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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나는 그렇게 술은 즐기지 않지만 오순주라고 술맛이 독특한 게 괜찮    

      은데, 두잔 먹었는데 핑하고 도는 군, 술이 좀 독한 것 같구먼.     

 

        서강은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였으니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으    

      리라 생각되지만 당시 상황을 직접보고 참여한 나로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보겠네.     


        당시 전하는 국내의 누구보다도 동양 삼국(명, 후금. 왜)의 정세에 달통하    

      셨지. 특히 건주여진(후금)의 급속한 성장과 세 확장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명의    

      장래에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계섰어. 그래서 북방 문제에 전념하기 위해서     


      조금 전에 이야기한대로 왜와의 관계를 정리,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온 국력을    

      정병 양성에 진력하시면서 북방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셨지.     


        당시의 북방 문제 중 가장 어려운 것이 명과 후금과의 관계였어. 우리와     

      명과의 관계는 단순한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가 아니라 당시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어, 그래서 당시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사로잡힌 지배계층인 양반층은 중국과의 사대외교를 절대시하여 중국을 섬기는    

      것이 천리(天理)요 사람의 기본적인 도리라 생각하였지. 더욱이 임란 이후에는    


      이것이 더욱 심화되어 명이 우리를 살렸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분론에     

      근거한 숭명의식(崇明意識)이 양반사회를 지배하였지. 이러한 속에서 누루하치    

      의 건주여진이 점차 세력을 결속하여 전하 재위 8년(1616)에 후금을 건국하고     


      명과 우리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지. 당시의 우리나라의 대여진정책은 기미책     

      (羈靡策:유목민에 대한 유화적인 현상유지책)인 교린정책(交隣政策)이었지.     


      당시 전하는 이러한 전통적인 외교의 틀을 유지하면서 대륙정세 변화에 촉각을    

      세우시고 정보수집에 총력을 기우리며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대책마련에 정신     


      없으셨어.전하의 두 나라에 대한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에 바탕을 두면서도 명분    

      보다 국가의 실리를 우선하는 교묘한 외교정책이었어.    

 

 

 

 

 

 

        이러한 속에서 전하 즉위 10년(1618), 후금은 명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며     

      만주의 요충지인 무순(撫順)을 점령하자 명은 후금에 반격 공세를 취하게 되었    


      어. 그러면서 명은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써오던 대외정책의 기본인 이이제이    

      (以夷制夷)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을 동원하여 후금을 제어하려 하였지. 더욱이     


      명나라는 조선은 임란때 그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켰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    

      에 조선 상하 모두가 명나라가 베푼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대하고     

      있는 순순(順順)한 오랑캐로 생각했지.    


        그래서 명나라는 몇 차례 후금정벌을 위한 파병문제를 제기하다 그 해,     

      조선에 후금을 정벌하는 원병요청을 하였어, 그런데 명이 기대하던대로 전하는    

      선뜻 응하지 않고 이를 여러가지 구실을 만들어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어    


      이는 당시의 삼국 관계 속에 원정군의 파견이 가져올 재난을 예견하고 전하는    

      여러가지 명목으로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리나라가 임란으로 피폐(疲弊)한     

      상황 속에 병력을 동원하기 어렵다고 하였지. 명나라는 조선이 쉽게 응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를 거절하자 명은 분개하여 우리에게 압력을 가했고 그런데다     

      우리 조정의 대부분의 신료들은 성리학적인 대의명분론을 내세워 부모의 나라     

      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는 것은 패륜이라고 전하를 공격하였지. 또 명나라 조정    


      의 일부는 후금을 공격하기 전에 조선을 응징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와서 전하를    

      괴롭혔어. 심지어 왕실에서 까지 파병을 하지 않는 전하를 공격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결국 전하는 파병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면서도 전하     


      는 파병을 하되 후금을 적으로 만들지않고 외교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결실    

      을 맺도록 하는 교묘한 차선책을 택하셨지.    

 

 

 

 

        [서강]: 결국 전하는 어쩔 수 없는 삼국관계 속에서 파병은 하되 이를 현명하게    

      외교적으로 명나라와 후금을 아우르며 두 나라와 적대관계가 아닌 선린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원정군 사령관으로 도원수님을 선정하신 것으로 생각됩    

      니다. 도원수님도 인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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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내가 내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어떻든 전하가 나를 도원수로    

      임명하면서 나를 선정하게 된 전하의 뜻을 나에게 자세히 들려 주셨고 나는     


      내가 무과 출신이 아닌 것을 들어 도원수 자리를 극구 사양했지만 전하는 이     

      도원수 자리가 단순한 무장이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특히 내가 중국어에     


      능통하고 수차례 명나라에 내왕하며 많은 명나라 인사들과 친교를 맺고 있어     

      명장들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우리주장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러면서 내가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 수차례 북방에 근무하면서 비교적     

      여진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전하의 뜻을 잘 받들어 전하가     


      원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전하는 나를 전하 재위 10년(1618)     

      윤 4월 23일 도원수로 임명하셨지.     

 

 

 

 

        [서강]: 전하가 도원수님을 임명하실 때 정세를 보아 후금에 항복하라는     


      밀지(密旨)를 내리셨다는 설이 우리 역사학계에 거의 사실처럼 되어 있는데     

      정말 전하로부터 그런 밀지를 받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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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전하는 내가 도원수 직을 수락하자 많은 말씀이 있었지만 그 중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을 주셨어.    


        첫 번째는 명나라 장수에게 맹종(盲從)하지 말고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    

      하여 결정하라.    


        두 번째는 양군의 군세를 잘 보고 앞으로 대륙의 패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판단하고 만약 상황에 따라 후금에 항복할 경우, 우리 출병이 부득이한 처사     


      였음을 잘 설명하라. 이러한 지침을 한마디로 “관형향배”(觀形向背:형세를     

      보고 공격, 투항을 결정하라)라 하는데 이 지침을 주셨어.     


        이 지침이 밀지라면 밀지겠지, 어떻든 나는 이 지침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고     


      부하 제장에게 이를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경우이던 명나라 장수가 아닌    

      나의 명령만을 따르도록 엄하게 지시했지.    

 

 

 

 

        [서강]: 원정군의 부대 편성은 어떻게 이루워젔는지요. 제가 얼른 생각하기    


      에는 명나라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파병이었기에 병력을 노약졸로 명색뿐인     

      병졸로 구성하진 않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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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전하의 생각은 달랐어, 전하는 임란 후 북방문제 해결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최정예부대를 선정, 파병부대를 편성하여 어떠한 돌발 사태에도    

      소신있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부대편성은     


        포수 3500명(평안도 1000, 충청도 1000, 전라도 1000, 황해도 500)    


        사수 3500명(평안도 1500, 전라도 500, 충청도 500, 황해도 1000)    


        살수 3000명(평안도 1000, 전라도 1000, 충청도 500, 황해도 500)    


      1만명으로 구성하였는데 명나라에서 포수의 수를 증원하여 달라 하여 포수를     

      증원하여 총11,500명으로 편성하였고     


        지휘부는 도원수 밑에 중군관 이계선(李繼先),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중군관 안여늘(安汝늘), 방어사 문희성(文希聖), 좌조방장 김응하(金應河),     

      우조방장 이원일(李元一)로 배정하였어.     


        나는 도원수로 임명된 후, 근 1년 동안 원정군을 편성하고 부대훈련에 전념    

      하여 나름대로 최고의 부대를 만들었지. 나는 후금의 철기부대(鐵騎部隊:강철     


      같은 기병부대)와 조우했을 때 이를 분쇄하고 병사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화포와 조총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기마부대를 제어할 수 있는 당시로는    


      신무기라 할 수 있는 거마작(* 기병대를 막기 위하여 대 따위로 만든 울타리)     

      이라는 장비까지 갖추었지. 그러면서 나는 지휘관 회의를 수 차례 소집하고     


      우리가 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명과의 대의 명분이 아니고, 우리의 국익이     

      최우선이라고 강하게 주지시켰고 전 장병에게도우리의 파병은 명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지.     

 

 

   * <도원수 강홍립의 묘>

 

 

        [서강]: 오래전 일인데도 도원수님은 정말 소상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도원수님, 말씀하신대로 군 병력은 전국에서 소집하여 부대편성을    


      하셨는데 주로 어디에 집결시켜 부대편성을 하고 훈련시키셨는지, 그리고 명이    

      원병을 요청한 것은 요동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만주지역 수복을 위한 것인데     


      언제 출병을 하셨는지, 현재 잔존하는 기록은 극히 단편적이어서 당시의 상황     

      을 도원수님으로부터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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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내가 도원수에 임명되고 부대원을 평안도 창성(昌城)에 집결시켜     

      이곳에서 근 1년 여 동안의 부대훈련을 하고 다음해 전하 재위11년(1619), 명     


      과의 약속에 따라 2월 1일 조선원정군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넜고, 내가 이끈     

      본진은 2월 23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지.    

 

        나는 압록강을 도하하기 전날 전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고 만약 만주에서    

      적과 조우했을 때 후금군이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을 하지 말고, 이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방어적인 목적으로 공격하라고 신신 당부하였어.     


        우리 원정군이 만주에 들어가자 조선 원정군은 4영으로 편제된 명 나라     

      원정군 진영 중 요양총병(遼陽摠兵) 유정(劉綎)이 이끈 동로군에 배속되었는데    


      명 나라 최고 사령관은 양호(楊鎬)로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군 사령관     

      으로 와 우리나라에 오래 머물었던 인물이지.    

 

        그래서 그는 비교적 조선 사정에 달통하였고 전하의 의중도 비교적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군 조총부대의 위력을 잘 알고 있어 후금의 기병부대     

      를 격멸할 수 있는 선봉부대로 조선군을 내세울 계략을 세우고 있었어. 그래서    


      양호는 조선군에 유격장군 교일기(喬一琦)를 파견하여 전쟁을 독려하며 우리를    

      괴롭혔지.    


        우리는 만주지역이 생소한 곳이었기에 나름대로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지만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고 행군 길은 만만치가 않았어. 우리는 압록강을 건너     


      가자 우리의 목적지인 후금의 도읍지인 흥경로성(興京老城)까지 방향을 정하고    

      숙박시설하나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길을 따라 노천에서 숙영(宿營)을 하면서     


      빠른 길을 재촉하는 명군 지휘부의 독촉을 받으며 어려운 행군을 하였지.     

 

        나는 명군 지휘부를 설득하여 일정을 늦추려 했지만, 이들은 우리 군을 명군     

      앞에 세워 후금군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에 우리 군의 속도를 계속     

      재촉하였어. 내가 행군 속도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자, 이들은 공격 일자가     


      황제의 명을 받아 결정된 것이기에 이를 변경할 수 없고, 만약 이를 지키지 못    

      하면 황제의 명을 어긴 것으로 참수형(斬首刑)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나를     

      협박하였어.     

 

        더욱이 우리 군이 걷는 노정(路程)에는 험준한 산과 강이 길을 막고 있어    

      우리를 괴롭혔고, 또 날씨마저 늦추위가 몰려오고 눈보라까지 몰아쳐 병졸들의    


      옷과 군장이 젖은 데다 병졸들은 창성을 출발할 때 10일 분의 식량과 조총과     

      탄약 등 상당한 무게의 군장을 휴대하였기에 체력 소모가 엄청났지.     

 

        그런데다 원정군의 군량 수송을 담당했던 운반선이 눈보라를 동반한 한풍    

      (寒風)이 몰아쳐 제때에 기항을 하지 못해 식량을 운반하는 후송 부대가 전진     


      부대를 제대로 쫓지를 못해 식량이 부족하여 병졸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어    

      하는데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어. 그래서 최후의 방책으로 나는 제장들에게     


      가능한 주변 여진 부락에 들러 곡식을 강제로 꾸는 형식으로 보충하도록 했고     

      이렇게 하며 우리는 힘들게 진군을 했어.     


        어떻든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그런대로 이겨가며 2월24일 앵아구(鶯兒溝)에,    


      25일 양마전(亮馬佃)에, 27일 배동갈령(拜東葛嶺)에, 28일 우모채(牛毛寨)에,     

      3월1일 마가채(馬家寨)에, 2일 심하(深河)에 도착하였지.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따라

대화체로 특색있게 서술된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두 번째 편을


여러가지 자료를 첨부하여 '한밤의 사진편지'를 사랑하는 한사모 회원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6년 6월 7일,   편집 및 사진자료를 제공하여...


이경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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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Marradi - The best se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