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15.31)
엠마오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께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을 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것도 영적인 몸이
아닌, 겉으로는 보통의 육체를 가진 사람처럼
친히
나타나셔서
동행하신다.
루카 복음 24장
14절에 나오는 데로 그동안에 일어난 예수님께 관한
'모든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얼굴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며 이야기를
나누시고 있는,
지척에 있는
예수님을 알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눈이 가리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눈이
가리어'에 해당하는 '에크라툰토'(ekratunto ; were holden ;
were kept)는
'억제하다'를 뜻하는
'크라테오'(krateo)의 미완료
수동태이므로,
직역하면
'그들의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계속
억제되었다'가 된다.
이것은 엠마오의 두
제자들의 의식과 시각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런
수동적 표현에는 하느님의 행위가 암시되어
있는데,
뒤에 나오는 루카 복음
24장 31절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게'될
극적인 반전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의도적인 가림'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상태에
이상이 있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과월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던
제자들일 가능성이
많기에 그들은 뜻하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형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루카 복음
24장 30절 이하에 보면,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것도 '성찬',
혹은 '성만찬'을 의미하는
'빵의
나눔'
(Fractio
Panis)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했던
영적 무지에서 탈출한다.
루카 복음 24장
31절의 희랍어 원문에는 '그들의 눈이 열려'에 해당하는
'아우톤 데
디에노익테산 호이 옵탈모이'(auton de dienoichthesan
hoi
ophthalmoi)'에서 '그들의'에 해당하는 '아우톤'(auton ; their)과
'눈'에 해당하는
'옵탈모이'(ophthalmoi ; eyes)가 떨어져 있어
문법적으로 어색하게
표현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영적
무지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의 눈이 떠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
여기서 눈이 '열려'에
해당하는 '디에노익테산'(dienoichthesan ; were opened)은
'열다'를 뜻하는
'디아노이고'(dianoigo)의 부정(不定)
과거 수동태 3인칭 복수로서
그들의 눈이 자신들의
노력이나 의지에서가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그것도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떠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눈이 밝아지고
나서야 그들은 함께 식사한 낯선 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아보았다'에
해당하는 '에페그노산'(epegnosan ; they knew ;
they
recognized)은 '충분히 알다','완전히 알다'를 뜻하는 '에피기노스코'
(epiginosko)의 부정(不定) 과거형으로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눈을 뜬 제자들이
또렷하게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보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사라지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칭대명사
주격(autos)을 사용하고 있다.
사라지신 분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에 해당하는 '카이
아우토스 아판토스 에게네토
아프
아우톤'(kai autos aphantos
egeneto ap' auton)에서 '사라지셨다'로 번역된 단어는
'아판토스(aphantos ; out of sight) 에게네토(egeneto ; vanished ;
disappeared)'이다.
여기서 '보이지
아니'로 번역될 수 있는 '아판토스'는 부정접두사 '아'(a)와
'나타나다'를 뜻하는
'파이노마이'(phainomai)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신 것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천사들이 인간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2마카3,34)
사라지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의미는
영광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시간과 공간에
더 이상 제약되지 않은 영적인 몸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은 쪼개어진 빵,
곧 성체 안으로 들어가
현존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영적이고도 인격적이며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을
원한다면, 주도적으로 주님께서 영안을 열어
주셔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도적인 주님의
절대적 개입과 성령의 능력의 터치도 마리아
막달레나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그것을 받을만한 주님께 대한 애달픈 갈망과
사랑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고,
항상 우리들의 영안을 열어 주시도록
'오소서, 성령님!'을
간절히
불러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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