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한반도의 두 번째 통일 왕조로 918년 건국하였다. 송악(개성) 출신의 왕건이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규합하여 성립한 고려는 고대 국가와는 구별되는 중세 국가적인
면모를 보였다. 백성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억제하기 위해 전시과 제도를 만들고 각지에
지방관을 지속적으로 파견하였으며,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층을 확보하였다.
고려의 사상으로는 불교뿐 아니라 유교나 도교. 도참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상적인 측면 외에도
고려는 이민족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개경의 문벌 귀족 문화와 각 지역의 독특한 지방 문화가
병존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를 다원多元적인 사회로 만들었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자국이었다.
또한 고려는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는 동시에 발해 유민을 흡수하면서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추진하였고,
송 . 거란(요) . 여진(금)과 실리 위주의 외교 정책과 군사 정책을 펼침으로써 격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혔다.
남쪽과 북쪽의 오랑캐들이 스스로 찾아와 (우리 천자를) 뵙고 백 가지 보물을 우리 천자의
섬돌 위에 바치네. [고려사] 권71, 지25 악2 속악 풍입송風入松
막새(瓦當)
만월대에서 출토된 막새이다. 고려시대 막새는 전체적으로 삼국시대 이래 유행하던
연화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점차 이전 시기와는 차별화된 고려의 특징적인 새로운
일휘문이 등장하였고, 후기에는 원의 영향을 받은 범자문이 출현하였다. 만월대에서도
연화문 . 일휘문(日暉文) . 범자문 . 귀면문 막새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동물장식 기와(좌측 위 2)
만월대에서 출토된 장식기와로 보인다. 장식기와는 주로 지붕마루나 기와가 서로 만나는 위치에서
마감을 깔끔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주로 새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월개신중"을 새긴 기와("月盖信中" 銘 靑磁 瓦)
(좌측 아래 4)
청자로 만든 기와(靑磁 瓦),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청자 연봉(靑磁 蓮峰)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출토, 고려 12세기
(우측)
*청자 연봉(蓮峰)이란 지붕기와의 일종으로 기와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숫기와 위에
쐐기 즉 Bracket 역할을 하는 청자기와를 말한다.
참고로
*토기와 청자의 차이
토기는 점력(粘力) 즉 가소성이 높으면 가능하지만 청자는 태토(胎土)에 유리질이 될 수 있는
실리카나 알루미나의 함양이 높아야 한다. 토기는 자연유(自然釉: 뭉치거나 흐르는 등 고르지 않음)
이나 청자는 인공회유(人工灰釉: 그릇 표면에 고르게 입혀짐),또한 번조 온도(燔造 溫度-굽는 온도-)도
토기는 산화번조(酸化燔造)하여 1,000도 정도이지만, 청자는 1,200도 이상에 환원번조(還元燔造)하고
요(窯)의 구조도 등요(登窯-오름가마)이어야 한다.
*비색(翡色-물총새 비)이란?
화학적으로 유약과 태토(바탕흙)속에 함유된 미량(1~3%)의 酸化第二鐵(Fe2O3)이 불에 구워내면,
酸化第一鐵(FeO)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색이다.유약속에 남아 있는 기포(氣泡)의 크기나 밀도,
그릇표면의 凹凸에 따른 유약의 두꺼움이나 얇음 등이 잘 어울릴 때에만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비취색(翡翠色-물총새 취)의 녹색이다.
고려시대 이규보선생은 靑磁를 "綠磁" 라고 부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쇠못(鐵釘). 철제 건축 양식
개성 만월대 출토
인종(재위 1122~1146)의 시호(諡號)와 생전의 업적 등을 새긴 시책(諡冊)
[인종 시책]중에서 일부
王臣晛 謹再拜稽首 上玉冊 -신 왕현(아들 의종의 이름)은 삼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옥책을 바칩니다.
大行大王聰明寬裕... -돌아가신 임금께서는 총명하고 너그러우시며...
求諫樂聞其過失 -간언을 구하고 자신의 과실을 듣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再祫論經 -한 해에 두 차례 조상들께 제사를 올리고 국가 경영을 논하였으며,
肇祀圓丘 -원구에서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修睦以固約 -(밖으로)화목을 도모하면서 맹약을 공고히 하시었고,
戡鎬京之亂 -(안으로는)호경[지금의 평양]의 (묘청의)난을 평정하시고
則殲魁以靖民... -그 우두머리를 섬멸하여 백성을 안정시키셨습니다. ...
尊諡曰恭孝大王 廟號口口 -시호를 높이오니 공효대왕이요, 묘호는(인종)이시라.
전 인종 장릉 출토품(傳 仁宗 長陵 出土品)
(사진 위)
3. 은 숫가락과 젓가락(銀匙箸), 4. 도장(靑銅印)
명종 지릉 출토품(明宗 智陵 出土品)
(사진 아래)
5. 완碗(靑磁 陰刻 蓮瓣文 鉢), 6. 접시(靑磁 楪匙)
"복녕궁방고"명 은제 도금 화형 접시("福寧宮房庫"銘 銀製 鍍金花形楪匙)
고려의 관료
고려시대 관료층이 본격적으로 확립된 것은 성종대 중서문화성과 상서성의 2성6부 체재와
관직제도가 성립되면서부터이다. 관료는 왕족을 제외한 당대 최고의 신분층으로 문반과 무반으로
구분되어 통틀어 양반이라고 하였고, 전시田柴나 녹봉祿俸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생활이 보장되었다.
고려시대 관료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과거科擧와 음서蔭敍가 대표적이었다.
고려시대의 관료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계가 있었으며, [고려사] [백관지] 문종 때에는
문반 532명, 무반 3,867명 등 모두 4,399명에 달하는 관직이 있다.이들은 등급에 따라
다른 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모자와 허리띠도 등급에 따른 구별이 있었다.
아무리 명경.대부라 하더라도 과거를 거쳐 진출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니, 과목 이외에 또
유일遺逸의 천거, 문음에 의한 서용, 성중애마成衆愛馬(애마:원나라 궁중의 경비부대)의 선발과
보충, 남반南班과 잡로雜路를 통한 승진과 전보 등의 여러 제도가 있어 관리로 진출하는 길이
하나만은 아니었다.
([고려사] 권73, 지27 선거選擧1 서문)
발걸이(鐵製 銀入絲 鐙子), 잔(靑磁 象嵌 馬上杯)
예제의 정비와 국가 의례
성종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고려 사회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중국의 예제를 도입하여 환구제와 태묘, 사직, 문묘 제사 등 유교적 예제를
적극 시행하였다. 1113년(예종 8)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고,
의종대에 [상정예문詳定禮文]을 완성하면서 유교적 국가 의례체재를 갖추었다. 한편
의레에 쓰이는 제기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도 있었지만 송의 예서禮書를 참고하여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실 및 국가 의례를 비롯하여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 의례 등에
이러한 제기들을 널리 이용하였다.
잔과 잔받침(靑磁 托盞), 주전자(靑磁 象嵌 瓜形 注子)
시가 새겨진 연꽃넝쿨무늬 병(靑磁 象嵌 蓮唐草文 詩銘 甁, 靑磁 陽刻 蓮唐草文 瓢形甁)
고려 12세기
細鏤金花碧玉壺(세루금화벽옥호) : 푸르고 아름다운 술병에 금꽃을 아로새기니
豪家應是喜提壺(호가응시희제호) : 호사로운 집안에서 이 술병 좋아했네.
須知賀老乘淸賓(수지하로승청빈) : 풍류를 즐긴 하지장(賀知章)이 기분 좋을 때
抱向春深醉鏡湖(포향춘심취경호) : 늦은 봄 호숫가에서 이 병을 안고 실컷 취했으리.
*하지장(659~744) : 도교에 심취하여 술과 풍류를 즐긴 것으로 유명한 당나라 시인
완(靑磁 盌), 퇴주기(靑磁 陽刻 牡丹唐草文 退酒器)
지방 제도와 향촌 사회
고려는 지방 통제의 수단으로써 거주지를 중심으로 성씨姓氏를 부여하는 본관제本貫制를 시행하여
지방 사회에 계층적 질서를 부여하는 독특한 지방 제도를 확립하였다. 또 성종과 현종대를 거치면서
5도와 양계의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지방관의 파견 여부에 따라서 주현과 속현을 구분하였고 향. 소. 부곡 등의 특수 행정 단위를 두었다.
고려의 지방 세력은 점차 지방 통치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예전에 그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향리직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은 읍사邑司를 중심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며
고을의 업무를 총괄하였고 지역민들을 동원하여 사찰. 불상 등을 조성하는 등
지방 문화의 창조자 역할을 하였다.
이것으로 중앙박물관 고려실 전면 개편 제 1집 설명을 마칩니다.
이어서 2편,3편,4편으로 이어 지겠습니다.
도록이 없어서 박물관 전시실 펜널내용을 사진으로 담아 올렸습니다
사진과 글
권진순
2016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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