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대한제국, 근대 국가를 꿈꾸다. 본문

박물관 이야기

대한제국, 근대 국가를 꿈꾸다.

불꽃緝熙 2015. 8. 4. 14:08

         대한제국, 근대 국가를 꿈꾸다.

한여름 시원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는 
'대한제국, 근대국가를 꿈꾸다'를 7월 21일부터 9월 13일가지 전시중입니다. 
 
금년 2015년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제국의
근대국가를 꿈꾼 이야기를 간략하게 올리오니 많은 관람 바랍니다.


가장 오래된 태극기

太極旗,조선,1890년 경, 등록문화재 제382호, 
1981년 윌리암 롤스턴 William Ralston 기증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오웬 니커슨 데니 Owen N,Denny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고종이 선물했던 태극기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1883년 공식 반포된 태극기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태극기의 초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데니는 청의 리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고종의 외교 고문이 되었으나, 
[청한론淸韓論(China and Korea)]을 저술하여 
 
조선에 대한 청의 부당한 간섭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선이 주권독립국임을 주장하였다.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 독립한 대황제 국大皇帝國이 되었으니
[독립신문] 광무 원년(1897) 10월 14일





庸工難用連抱奇材 (용공난용연포기재)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 (斷指圖章)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글씨

안중근 遺墨, 대한제국, 1910년(융희 4), 보물 제569-7호, 
1966년 니시가와 西川 기증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 있으면서 쓴 글씨 중의 하나이다. 
 
"재주가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나무나 
진기한 나무를 잘 다루지 못한다[庸工難用 連抱奇材]"는 뜻으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인재를 기용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글씨는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경에
쓴 것으로 왼쪽에 약지가 잘린 안중근의 왼손바닥도장이 찍혀 있다.




대한제국 연표(大韓帝國年表)

1896 --- 아관파천단행,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결성
1897 --- 고종,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 대한제국 선포
1898 --- 독립협회, 1차 만민공동회 개최, 황국협회 창립, 독립협회 해산
1899 --- 한성에 전차 개통(최초의 전차 시운전), 대한국국제 반포
1900 --- 파리만국박람회 참가, 경인선(인천-서대문역)완전 개통
1901 --- 신식화폐조례 공포(금본위제 채택), 서울시내 전등 점화식
1902 --- 한성~인천간 최초 전화 개통, 고종 황제 즉의 40주년 기념 잔치
1904 ---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제1차 한일협약
1905 --- 경부선(영등포-부산 초량)전 구간 개통, 가쓰라-태프트 밀약, 을사늑약 체결
1906 --- 일제, 남산에 통감부 설치
1907 --- 국채보상운동 시작, 헤이그 특사 파견, 순종 황제 즉위, 통감부, 한국 군대 강제 해산
1908 ---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1909 --- 순종 황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남.서북순행,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0 --- 경술국치, 조선총독부 설치




일본 황태자 한국방문 기념 사진
일본황태자한국방문기념사진, 대한제국, 2011년 구입
1907년 일본 황태자(다이쇼 大正 천황)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의 기념 사진이다.
앞줄 오른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아리스가와 노미야, 영친왕, 일본 황태자,
둘째 줄에는 조중웅, 한 사람 건너뛰어 가쓰라 타로, 도고 헤이하치로,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등의 모습이 보인다.


엽서
회화엽서, 대한제국, 2012년 구입
대한제국기에 발행된 그림엽서다. 이 당시에 발행된 그림엽서들은
주로 일본을 포함한 외국에서 발행되었다. 우리나라 관리의 복식, 풍물 등이
주된 소재였지만 점차 풍경, 명승고적 등이 선호되었다. 1907년 7월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된 이후에는 일제의 반식민 통치를 선전하기 위한 그림엽서들이 유행하였다.
일본황태자의 한국 방문, 영친왕의 일본 동북지방의 방문, 순종의 서북순행,
한일병합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순종황제 초상화의 초본
純宗御眞, 김은호金殷鎬(1892~1979), 20세기, 종이에 엷은 색,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김은호가 그린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의 초상화를 위한 초본이다.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점잖은 인상이며 얼굴 윤곽이 뚜렷하다. 이 초본의 얼굴은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몸체는 윤곽선으로만 표현하였다. 김은호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린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御眞畵師다.


경술국치-한일병합 기념 메달 및 증서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일본, 1912년, 2012년 구입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일본에서 발행한 '한일병합기념장'이다.
그 날은 우리에게는 '나라의 치욕'으로 기억되지만 일본에게는 축하해야 할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기념메달.엽서 등이 만들어졌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1910년 8월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들은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불법적인 성격이 강하다.

경부철도선로약도京釜鐵道線路略圖 부 동양철도선로약도 附 東洋鐵道線路略圖
일본 도쿄, 1905년 이후, 2004년 구입
1898년 경부철도 부설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1901년 8월 기공식을 거행한 경부철도는
일제가 러일전쟁을 치르는데 이용되었고, 1901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자원을 
수탈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위임장 내용
대한제국 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첨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위임장
대황제는 칙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천하 여러 나라가 공인하는 바라,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로부터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가진 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나라 사이에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리의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뿐더러 그 침략적 야심은 인도에도 위배되는 것이기에 
좋게 기록할 수가 없다. 짐이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다.
이에 여기 종2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델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나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우리의 여러 우방과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이번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궁내부 현판(宮內府懸板)
조선, 1894년 이후
이화문을 새긴 의례용 칼(李花文彫刻寶劍)
대한제국, 1952년 입수
궁내부 소속 예식원禮式院의 고위 관리가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의례용 칼이다.
손잡이의 활모양 금구와 코등이, 칼집장식 등에 모두 이화문을 돋을새김하였다.
칼날에는 이화문과 초룡문草龍文을 표현하였고, 손잡이에는 금선을 돌리고 활모양의 
자루머리장식 끝부분은 못이나 망치머리처럼 뭉툭하게 마감하였다.

勅命
黃德昌陞正三品通政大夫者
光武六年九月二十五日
大皇帝陛下八
耆社時士庶年八十人單 恩加資事奉
勅
국새가 찍힌 임명장
칙명勅命, 대한제국 1902년(광무 6), 2001년 구입

대한제국기 국새國璽
칙명지보勅命之寶, 대한제국, 1897년(광무 1), 1954년 입수

대한제국기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 대한제국, 1897년(광무 1), 1954년 입수
대원수보大元帥寶, 1899년(광무 3), 1954년 입수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당시 한국관 모습
르 쁘띠 주르날 Le Petit Journal, 프랑스, 1900년 12월 16일, 2005년 구입
1900년 12월 16일자 프랑스 일간지 "르 쁘띠 주르날"에 게재된 파리만국박람회 당시
대한제국의 전시관 모습이다.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1900년 4월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 회장에 대규모 전시관을 지었다.
경복궁 근정전을 재현한 한국관의 이국적인 모습은 당시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대한제국기에 발행된 근대 화폐
근대 화폐(近代貨幣), 대한제국
개항 이후 일본.청.미국.영국 등 여러 나라들과 통상을 시작한 조선은 근대적인 화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는 등 경제적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1905년 1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화폐조례]가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화폐인 백동화.엽전이 강제로 일본 화폐로 교환되었고 화폐 발행은
일본제일은행으로 일원화되었다. 특히 1905년 중순경에 금융공황이 일어나 민족 자본이
무너지면서 일본 자본이 국내 금융시장을 재빨리 장악해 갔다.

백동화 사용을 금지하는 고시문
舊 白銅貨 無效에 關한 告示, 대한제국 1909년(융희 3), 2005년 구입
1909년에 공포된 백동화 사용을 금지하는 고시문이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 후
대한제국은 화폐의 주도권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금융 및 재정 부문에서 점차 일본에
예속되어 갔다. 1905년부터 백동화를 일본 제일은행권의 화폐로 교환할 수 있었으나 
1909년 이후부터 완전히 사용이 금지되었다.
<문서 원문 내용)
구 백동화는 지난 융희 2년(1908)11월 말로써 일반 통용을 금지하고 다만 공납에만 한하여
본년 십이월말까지 사용함을 허하였으나 명년 일월일일부터는 결코 통용함을 금지할 터이니
인민들은 그가 가진 구백동화를 본년내로 공납에만 사용하되 오히려 남은 것이 있거든
역시 본 기한 내로 매수함을 청구하여서 이외의 손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함이 가함.
융희삼년십일월일일
탁지부대신

노블 태극기
태극기, 조선, 1890년경, 2010년 엘렌 맥카스클 Ellen McKaskle 기증
우리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미국인 윌리엄 아서 노블 William Arthur Noble 목사가
소장하였던 태극기다. 박음질로 천을 덧대어 태극문과 사괘문을 만들었다.도안의 형식,
명주 바탕 재질, 색채 등으로 볼 때 박영효가 1882년에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같은 형태이다. 미국 해군성 황해국에서 1882년 발간한 "해상국가들의 깃발 Flags of Maritime
Nations"에도 같은 태극기가 실려 있다. 


태극기와 우표를 도안한 엽서

대한제국기에 발급된 전보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대한제국 애국가, 프란츠 에케르트 Franz Eckert(1852~1916), 복사본
군악대 교사로 초빙되어 온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1902년에 작곡한 애국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애국가는 금지곡이 되었고, 기미가요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혜옥주를 산 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고종이 1902년 1월 27일 지시하였다.
" ~~~애국하는 방법에는 국가國歌를 지어 부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마땅히 국가를 만들어야겠으니 문임文任에게 지어 바치도록 하라."
                                      [관보] 1902년 8월 15일 게재



대한의원 개원일에 순종이 내린 칙서
大韓醫院開院勅書, 대한제국 융희2년(1908), 등록문화재 제449호,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 소장
59.5x43.0cm
대한의원 개원일 1908년 10월24일에 순종 황제가 내린 칙서.
대한의원이 대한제국의 공식 기관임을 선포하는 공식 문서이다. 칙서는 선왕인 고종대부터
추진한 일을 매듭지은 것임을 밝히고 백성들에게 의료의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는 황제의 뜻을
담았다. 가로, 세로 11cm 크기의 국새 '칙명지보'가 찍혀 있다.

고종황제의 초상화
高宗御眞, 채용신蔡龍臣(1850~1941), 대한제국 1902년(광무 6)이후, 비단에 색
1981년 이홍근 기증
채용신이 그린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초상화다. 익선관翼善冠에 대한제국의 황제임을
상진하는 황색 곤룡포를 입고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전통 초상화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이며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황성신문, 민족의식을 깨우쳐준 신문
皇城新聞, 대한제국, 1898년(광무 2) 4월29일, 2005년 구입
1898년 남궁억 등이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위하여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게재되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황성신문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지식인층 독자가 많았다.

최초의 한글 신문
독립신문 獨立新聞, 대한제국, 1899년(광무 3)5월16일, 2005년 구입
1896년 4월 7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최초의 한글 신문이다.
근대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사상, 자주적 근대화를 강조하여 국민 계몽의 역할을
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보통 신문지의 절반 크기) 총 4편, 격일간지로
발행되었다가 1898년 7월 이후 판형이 구 배로 확대되고 일간지로 발행되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창립된 뒤에는 기관지의 역할을 하였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되고 말았다. 

법학통론
法學通論 대한제국, 1905년(광무 9), 2002년 구입
1905년 강화도의 사립보창학교私立普昌學校에서 출판한 법학 개론서다.
사립보창학교는 강화대대장으로 있던 이동휘가 1904년에 강화도에 설립한
육영학교를 개명한 것이다. 이동휘는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이 국권회복의
최우선이라고 여기고 보창학교 지교를 곳곳에 설치하였다. 보창학교는
이준의 보광학교, 이종호의 보성학교와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라고 불린다.



고종황제의 기로소 입소 기념 잔치 절차를 기록한 의궤
진연의궤進宴儀軌, 대한제국, 1902년(광무 6), 2006년 입수

옥으로 만든 철인장황후 책봉 문서
황후책봉옥책皇后冊封玉冊, 대한제국, 1908년(융희 2), 1987년 조창수 기증
1908년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옥책이다. 순종이 황제로 즉위한 뒤
진종(영조의 아들 孝章世子). 헌종. 철종 황제의 존호를 올리면서 그들의 비의 존호도 함께 
올렸다. 옥책이란 국왕이나 왕비 등에게 존호를 올리는 문서로, 옥책에는 존호를 받는 사람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문頌德文을 새기고 존호를 새긴 옥보玉寶와 함께 올렸다.
<옥책문 내용>
   維隆熙二年歲次戊申七
   月甲申朔初三日丙戌
 上言
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
哲仁王后金氏 伏以至哉陰功
    寔贊
聖人 洋洋其頌 肫肫其仁 粤在
    己亥
 受命維新 上崇
祖禰 配天明禋 禮有未遑 若待
    今辰 屬値祼將 爰及僉詢
    咸曰 邦禮
    統序 是遵肆於
三宗追隆之日 謹上
尊號曰
章皇后 伏惟
明靈 光膺寶典 俯答忱恂 謹言
융희2년(1908) 7월 3일
황제 척은 머리를 조아려 말씀을 올립니다.
명순 휘성 정원 수녕 경헌 장목 철인 왕후 김씨는
삼가 지극한 음공陰功으로 진실로 성인을 도우셨으니
칭송이 자자하고, 지극히 어지셨습니다.
아! 기해년(1899)에 새롭게 명을 받아 상황이 조상을 높이고
하늘에 짝하여 천명을 밝히었으나 예는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을 기다려 신령이 내리시어 모두에게 물으시니,
모두 말하기를, 나라의 예가 계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삼대를 추존하는 날을 따라 존호를 장황후라고 삼가 올립니다.
밝으신 영령께서는 빛나게 보전을 받으시고
정성스럽게 답하시기를 삼가 말씀드립니다.

위에서 아래로
1.황태자(순종)결혼 기념 메달
2.고종황제탄생51주년. 즉위 40주년 기념 메달
3.고종황제탄생50주년 기념 메달


<금책문 내용>
    維光武元年歲次丁酉九月丁亥朔十
    七日癸卯
皇帝若曰 軆重長嫡 根本鞏固 一有元良 萬
    世之福 咨爾王太子坧 仁孝恭儉 德業
    夙就 學有緝熙 睿知日新 承順淸燕之
    暇 聰達政敎 叶吉离明之象 頌騰謳歌
    純行篤誠 光贊克著 迺者寶位正明 制
    度載新 今冊爾爲皇太子 於戱 守器承
    祧 托付實大 撫軍監國 期望且厚 勉爾
    令儀令聞 永綏我丕基 欽承休命
광무 원년(1897) 9월 17일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태자는 적장자로 근본이 공고하니 만세의 복이다.
아! 너 왕태자 척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하여 덕업을 빨리 성취하였다.
끊임없이 배워 지혜로움이 날로 새롭고
성인의 가르침을 잘 따라 총명함이 정교에 통달하였다.
길한 운세의 왕태자의 모습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순수한 행동과 돈독한 성심 밝게 드러났구나.
이에 보위와 정명, 제도를 새롭게 할 즈음에
지금 너를 황태자로 책봉한다.
아! 대통을 이어받을 큰 임무를 맡기니
군대를 위무하고 나라를 살펴 바라는 바에 힘써 부흥하라.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아름답게 하기에 힘써 영원히 우리의 기틀을 편안히 하라.
공경히 이름다운 명을 받들라.

고종황제의 후궁 순비 엄씨의 인장
순비금보淳妃金寶, 대한제국, 1901년(광무 5), 1952년 입수
1901년 엄씨를 순비에 책봉하면서 내린 도장이다. 고종황제는 1897년 영친왕 
출산 직후 엄씨를 귀인에 책봉, 1900년에 순빈, 1903년 귀비로 책봉하였다.



사진은 전시실에서, 글은 패널의 설명문과 서윤희학예사가 주신 프린트를 활용하였습니다.
작성자
권진순
2015년 8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