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제1독서(탈출1,8~14.22)말씀 본문

가톨릭 교회

제1독서(탈출1,8~14.22)말씀

불꽃緝熙 2015. 7. 13. 13:23

"그 무렵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8)

흉년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뿐 아니라

여러 많은 고통을 겪게되는 야곱 일가는 먼저 이집트로 끌려가 성공한 요셉에 의해

이집트의 고센땅에서 정착하게 된다.

그당시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고센땅에 내려갔을때 가족수가 불과 70명 정도였다.

고센땅은 이집트 카이로에서부터 나일강의 삼각주를 통과해서

홍해바다로 가는 영역속에 존재하는 아주 비옥한 땅이다.

야곱 집안은 대대로 목축을 했기에

그 당시 고센땅에는 목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요셉의 코치에 의해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당시 부러울게 없는 최대 강국이었고,

또한 목축하는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 근처에는 가기 싫어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관심밖에 놓여 있을 수 있었다.

성서학자들은 이 고센땅을 가리켜

이스라엘 민족의 '인큐베이터'였다고 말한다.

어린 생명, 즉 아주 연약한 생명이었던

이스라엘 부족을 잘 키워가지고

바깥으로 내놓는 역할을 하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46장 3절을 보면,

이집트에 넘어 가기 전 가나안의 경계 브에르 세바에서

제사를 드린 야곱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야곱 집안의 고통을 보상해 주시고,

자신이 선택하신 이 민족을 키워 사용하시고자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과 번영이 오래지 않아

어느 한 순간에 또 뒤집히기 시작한다.

그것이 오늘 독서의 탈출기 1장 8절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이 새 임금이 누구인가?

출애굽의 역사의 무대를 B.C. 15 C로 보느냐?

 B.C. 13 C로 보느냐? 에 따라 견해가 달라질 수 있다.

성서고고학이 더 발전되면,

명확하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성경을 근거로 추정하는 한가지 설을 소개해 본다.

열왕기 1권 6장 1절에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한 해가 출애굽 사건이 있은지

480년이 지나 솔로몬 즉위 제 4년이라 밝히고 있다.

솔로몬 즉위 제 4년을 거의 B.C.960 년으로 보고,

여기에 480년을 더 했을 경우에

출애굽 연대는 B.C. 1440년이 된다.

그리고 판관기 11장 26절을 보면,

 B.C.1100년경에 활동했던 판관 입다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거한지 300년이 흘렀다고 말한 것을 종합하면,

출애굽 연대를 B.C.1445-1440년경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집트 제18왕조인 투트모세 3세와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했다고

추정하는 설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셉을 알지 못했던 새로운 파라오,

즉 이집트의 통치자가 일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점점 강해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 앞에 위협을 느끼는 새로운 파라오는

이제 탄압의 음모를 꾸미고, 이스라엘 부족의 운명은 노예의 자리로 전락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핍박의 회오리 속에 빠져들게 된다.

파라오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줄곧 이스라엘을 괴롭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멸절하고자 하는 음모,

 

즉 갓 태어난 사내 아이를 다 나일강에 던져 죽게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가 시작된다.

이런식으로 하느님의 선민, 계약의 백성을

이 땅에서 끊어버리기 위한 사탄의 음모는

역사를 통해 계속 반복된다.

그렇게 해서 사탄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목표는

메시아(구세주 예수님)인 것이다.

그 예수님이 구원자로 역사 안에 들어 오지도 못하고

들어오더라도 제거하기 위해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을 탄압하고 사내 아이들을 겨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주는 장본인은 항상 사탄이며,

하느님은 아니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하느님께서 뜻이 있어 사탄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땅 고센에서

계속 축복과 번영을 누리고 살았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

시온의 땅을 생각했겠는가?

아마 까맣게 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땅에서 고통을 받게 되니까

비로소 '아~우리 민족을 가나안 땅에서

다시 한번 놀라운 백성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지'하며,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고,

시온을 향한 꿈, 시온의 본향을 향한 생각을 다시 일깨우게 된다.

고통은 하느님의 백성을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훈련이다.

탈출기 3장 7절에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나온다.

그들은 고통을 당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느님과의 통교가 살아나게 되며,

하느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고,

하느님을 의지하니까 하느님의 쓰임받는 도구가 된다.

끊임없는 현세적 번영과 복에는 언제나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지워버리며 자신이 하느님이 되는

세속화(극도의 인본주의)가 반드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멸절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과정에 있어서

 

당신을 경외하는 산파들을 도구로 쓰시며 (탈출1, 20~21)

당신의 일을 진행해 가신다.

이집트 고센땅으로 내려간 70명의 야곱 가족을 200만명으로 키우시고,

그들을 해방시켜 가나안을 향하게 하는 모세를 준비시킨다.

탈출기 1장을 정리해본다.

번영과 복이 올 때 그 자체를 너무 기뻐하지 말 것이며,

그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겸허하게

하느님의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고통이 올 때 너무 낙심하지 말며,

그 배후의 하느님의 뜻을 살펴봐야 한다.

사탄이 핍박하면, 사탄에게 외쳐야 한다.

'너의 계교는 성공할 수 없는 음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계교와 거짓의 사탄아 물러가라.

물러가서 예수님 십자가 발치에 가서 그분의 명을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