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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교과서

책의 향기와 교과서에 담긴 혼

불꽃緝熙 2014. 11. 19. 18:37

<아래의 글은 한국교과서연구재단에서 계간으로 발행하는 교과서전문연구지

"교과서연구"(제78호)의 권두언으로 작성하여 2014년 10월 25일에 보낸 원고입니다.>

 

책의 향기와 교과서에 담긴 혼

 

                                                                                               이 경 환

                                                                         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회장)

1. 책의 향기

 

창덕궁 후원 울창한 숲속에 들어가면 단청을 칠하지 않은 채,

일반 사대부의 살림집 구조를 본떠 지어진

연경당(演慶堂)이라는 아름다운 전각이 있습니다.

 

원래의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창건된 것이라 하지만,

아마도 당시의 세도가인 신하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려 온 아버지를

이 곳에서나마 편히 모시고자 하는 뜻에서

지은 것으로 짐작해 보기도 합니다.

 

이 양반집 건물의 사랑채 왼편에는

청나라 풍의 벽돌 벽과 동판을 씌운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모습을

보이는 서재가 있는데 선향재(善香齋)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선향재는 ‘좋은 향기가 서린 집’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책을 보관하고 책을 읽으며 오신 귀한 손님과

담소하던 서재이기에

좋은 향기란 책 향기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선향재 주련(柱聯)의 첫 부분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道德摩勒果(도덕마륵과) - 도덕은 마륵의 과일이요,

文章鉢曇花(문장발담화) - 문장은 우담바라의 꽃이로다.

 

‘황금과일처럼 고귀한 도덕과 우담바라 꽃처럼 진귀한 문장’이라는 뜻으로

그러한 도덕과 문장을 갖춘 사람을 찬양하는 표현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정년퇴임을 한 후에 가끔 창덕궁에 나가 관람객을 모시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후원에 있는 서향각(書香閣)이나 선향재에 들리게 되면

‘책의 향기’ 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책을 아끼고 사랑했던

우리 선조들의 마음가짐을 되새기게 됩니다.

 

2. 교과서에 담긴 혼(魂)

 

 요지음도 유난히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과거 교육부에서 교육과정과 교과서 편수행정을 담당하였거나

지금도 그 일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지금부터 24년 전(1991년)에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를 만들어

지금까지 교육과정과 교과서 개선을 위한

여러 가지 연구와 친목 활동을 꾸준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회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국어교과서(1-1, 바둑이와 철수)를 저작, 발행한 날을 기리어

10월 5일을 ‘교과서의 날’ 로 제정, 공포하고,

2006년부터 매년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금년도에도 교육부와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제9회 ‘교과서의 날’ 기념식과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거행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현재 국가교육과정정책 자문위원회 위원인 함수곤 교수가

‘교육과정과 교과서 편수행정의 전문화 및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주제발표를 하고, 교육부의 교육내용행정 개선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경복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임한 김영일 편수관은

이 주제발표에 대한 지정토론을 통하여

편수행정 업무는 국가 교육과정 개정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경험이 축척되고 진화하면서 개선,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교과서를 편찬하는 편수관에게는

교육과정의 정신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교과서에 담아야 하는

투철한 교육철학, 즉 영혼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육과정과 교과서 등 교육내용행정 업무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은

교과 교육과정에 대한 고도의 전문적인 능력은 물론

확고한 교육철학과 원칙에 따라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중립성을 지키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책임감이 뚜렷한 사람, 영혼이 있는 편수관이어야 합니다.

 

영혼이 있는 편수관은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각급학교의 교육목표를,

그리고 각 교과의 교육목표와 교육내용을

자라나는 우리 학생들이 배워야 할 미래의 교과서에

교육과정의 정신을 제대로, 또 바르게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교육과정의 상세화 작업

 

이제는 국가의 교과서 정책이

검인정교과서 발행 체제로 전환하여 나감에 따라

민간의 교과서 전문 출판사나 시․도교육청에서

학생들이 배워야 할 교과서를 편찬하거나

교육내용을 다루는 편수업무를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들이 대폭 증가되었습니다.

 

어떤 출판사나 시․도교육청에서 교과서를 만든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중점적, 전문적으로 수행하여야 할 일이

바로 교과별 교육과정 상세화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교과서를 만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육과정 상세화’ 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흔히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국가수준의 교육과정 기준에는

어떠한 교육과정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를 면밀히 분석하여

체계적, 단계적으로 상세히 표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는 적어도 몇 십 년 앞을 내다보며

미래사회에 대비하여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떠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할 것인지,

이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각 급 학교별 교육목표와 교육중점 등

학교교육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교육의 방향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교과 교육과정에서는

각 교과의 교육목표,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평가에 관한 사항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므로

이를 학년별, 단계별로 더욱 세분하여

교과서에 담을 사항을 구체화하여야

쉽고, 재미있고, 친절하며, 활용하기에 편리한

좋은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입구에 가면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문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책을 좋아하던 교보생명 창업자 고(故) 신용호 회장이 즐겨 하던 말이라 합니다.

매우 단순하지만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명언입니다.

 

책을 통해 수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지만,

책이 사람의 인격 성숙을, 즉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고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육과정은 장기간에 걸쳐 시행되고 정착되어 온

교육의 역사와 맥락 속에서 조직, 구성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교육과정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있고,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 가치관과 민족성이 서려있기에

이를 ‘교육과정의 기본 정신’이라 표현합니다.

 

창덕궁의 후원에서 보았던 책의 향기,

심포지엄에서 들었던 교과서에 담긴 혼 등과 같은 내용은

미래에 대비한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이 교육과정 정신을 교과서에 분명히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례들이라 생각해 봅니다.

Ma Vlast Moldau (Vltava) [City of Prague Philharmonic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