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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2014년 6월 28일 토요일 ) 본문

가톨릭 교회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2014년 6월 28일 토요일 )

불꽃緝熙 2014. 6. 28. 11:06

2014 6 28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성 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요한 외드 성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성모 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반포하였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1996년 1월 1일자 교령에서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이 축일을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하였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41-51)


“Why were you look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to them.
He went down with them and came to Nazareth,
and was obedient to them;
and his mother kept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노래한다. 이사야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그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그분께서 구원과 의로움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제1독서).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모습이다.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소년 예수님을 부모가 황급히 찾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느냐고 반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고, 마리아께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지냅니다. 이 신심은 1917년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발현하신 성모님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더없는 위로입니다.

 
오늘 복음이 알려 주듯, 성모 성심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시는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죄와 고통과 번민을 아시고 그것을 품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울고, 기대고, 그리고 다시 구원의 빛을 향할 용기를 얻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을 특별히 공경하는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무너진 마음을 바라보고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의 우울한 마음으로 절망에 빠진 많은 이를 성모님의 마음에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은사 신부님이 번역한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의 『우울한 마음의 의미』라는 책을 새 신부 시절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우울한 마음’이라는 말이 긴 여운을 주었습니다. 은사 신부님은 사제로서 사람들을 만나며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 아주 좋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우울한 마음으로 신음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이 겪는 ‘남몰래 아파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길고 불안하고 고독한지’를 안타깝게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번역하였다고 밝힙니다.


역자 신부님의 이러한 말씀에 그때는 큰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제로 살아가면서, 또 이제 본당 사목자로 지내면서, 무너진 마음을 안고 사는 많은 사람에게서 우울한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과르디니 신부는 우울한 마음에 위대한 것이 깃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울함은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동경, 누구보다 더 고귀한 사랑의 동경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울한 마음, 무너진 마음이 일어서려면 사람의 노력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스며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오늘, 성모님의 옷자락을 잡으며 그분의 전구를 간절히 청합니다.

 

 

☆☆☆

 

오 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 곧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예루살렘에서 나자렛으로 돌아가던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립니다. 부지런히 걸어가다가 하루가 지난 다음 문득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다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서 사흘이 지나서야 겨우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부 모들 대부분이 한 가정의 책임자로서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가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스스로 던지게 됩니다. ‘나는 가정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우리 가족은 화목하지 못할까?’ ‘나는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게 해 주십사고 부지런히 기도했는데, 왜 우리 집은 아직도 분위기가 나아지지 않을까?’

이 러한 생각이 든다면 그동안 자신이 걸어오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찾으려고, 걸어가던 길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던 것처럼 그렇게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곧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부모를 예수님으로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성가정이란 예수님을 자기 식구로 맞아들이는 것이고, 이는 곧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또 다른 예수님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모님 마음

-김석영 수사-


오 늘 복음은 환희의 신비 제5단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나는 평상시에도 곧잘 연극무대 같은 이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곤 한다. 때: 서기 12년, 니산달. 장소: 예루살렘 성전의 어떤 부속실. 등장인물: 중후한 차림의 학자들 그리고 소년 예수, 어수룩한 차림의 성 요셉과 성모님.

막이 열리면, 당당한 소년 예수를 가운데 세워두고, 몇 명의 학자가 빙 둘러앉아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그때 주위가 떠들썩하며 갑자기 나타난 성모님과 성 요셉의 반갑고도 놀라운 표정과 동작들…. 그리고 흥분된 어조로 촌 아낙네 같은 성모님이 말씀하신다. “아이고, 얘야! 예수야, 네가 우리한테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소년 예수는 퉁명스런 반응을 보이며 “왜요, 뭐가 잘못됐는데요? 제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줄 모르셨어요?” 그리고 성전에 있던 학자들은 구구하면서도 비슷한 반응으로 말한다. “아이는 기막히게 똑똑한데, 그 부모들은 영락없는 갈릴리 촌사람들이구먼!” 아마도 성모님은 아무 말도 못 들은 척하시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한 채, 예수님을 끌다시피 데리고 나와 한적한 곳에 가서 아들을 안고 펑펑 우셨을 것이다.

복 음서에는 이 사건 말고도 예수가 성모님을 애태운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성모님은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다고 전한다. 그 마음은 비수에 찔린 심장이다. 일찍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할 때 네 마음은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시메온은 예언했다. 

이를 두고 예술가들은 <스타밧 마테르> 같은 음악으로 또는 <피에타> 같은 미술로 그리고 수많은 시를 통해 표현하려고 애썼다. 오늘은 이같이 예수님의 수난에 마음으로 함께 고통당하셨고, 지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며 애태우고 계신 성모님의 성심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는 날이다.

 

-조명연신부-


한 때 자신의 묘비명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묘비명을 지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목표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상적인 묘비명들이 꽤 알려져 있지요.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인간적인 회한이 가득 담긴 묘비명을 남긴데 반해서,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조르주 퐁피두는 ‘나는 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라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묘비명을 전해 주지요.

아 무튼 비석에 문구를 새긴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비석에 어떤 묘비명을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단순히 멋있는 문장을 남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살았던 모습을 담은 묘비명을 자신 있게 새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 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어떤 소리를 낼까요? 정말로 소리 없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게 지나가면서 그 어떤 신호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물쭈물하다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시간만 지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화려해야 잘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사회의 사람들은 그러한 삶이 열심하고 성공한 사람의 삶이라고 부러워하지요. 그러나 정작 성공한 삶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삶, 바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간 사람입니다. 만약 세상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정답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돈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한 모습을 보여주셨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삶은 세상의 것이 아닌, 당신의 모든 것까지 내어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오 늘 우리들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의 사건을 전해주지요. 그때 성모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른 엄마들처럼 자신을 걱정시켰다고 화를 내고 혼을 냈을까요? 성경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전해주지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그 냥 네 마음대로 살라는 식으로 방치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인 것입니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믿음과 사랑을 항상 당신의 마음속에 담으셨지요. 그리고 이 성모님의 마음을 닮자고 오늘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살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마음, 성모님의 마음으로 살 때에만 먼 훗날 나의 멋진 묘비명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삶, 사람, 사물에 관심을 가져라. 풍요로운 보물과 아름다운 영혼으로 넘쳐나는 세상에 가슴이 뛴다. 자신을 잊어라(헨리 밀러).



TV를 끄면?


아래는 EBS 지식채널의 프로를 책으로 묶은 ‘지식e1’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TV끄기 첫째날, 아침부터 조용한 하루. 낯선 하루.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일찍 잠자리에 든 하루.

TV끄기 일주일째, 오랜만의 대청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궁금해 신문은 들고 자연스럽게 책을 들고.

TV끄기 이주일째, TV가 사라진 그 자리에 돌아온 가족이라는 존재. 가족들은 TV가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국인 하루 평균 3시간 TV 시청, 1년에 한 달 반, 평생 10년.

Turn off TV, Turn on Life, TV를 끄고 삶을 켜자!

‘TV를 끄고 삶을 켜자.’는 말에서 크게 공감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해야 할 것들이 많은 세상, 그러나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TV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말입니다. 혹시 TV나 보면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멋진 주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바꾸시면 어떨까요?

 


마음은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김대열신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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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세상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도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유를 찾기 힘들고, 조급함이 어디에서도 보인다.
아래 윗집에서 생기는 소음에도 서로를 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눔에도 사랑에도 계산이 들어간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큰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혼자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우리도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마음에 간직하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쁜 마음을 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곧바로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조금 여유 있게 부딪힌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연습을 하자는 것이다.
세상이 인스턴트가 되다 보니, 우리의 삶도 인스턴트로 변하고 마는 느낌이다.

일부러 하늘도 쳐다보고, 별들도 쳐다보고 들꽃들에 눈도 좀 주고, 새소리에 귀도 기울일 수 있는,
그래서 아름다움에 눈물도 흘릴 수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야기 둘

 

그럼에도, 세상에는 참 열심하고 아름답게 사는 이들이 많다.

얼마 전에는 로봇소년 세진이가 세상에 소개되면서 그의 때없이 맑고 순수한 눈빛과
그 어머니의 사랑에 울먹이고 말았다.
어제는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한 여든 살이 넘으신 병든 부친을 위해 9년간 매일 세 시간 이상 걸어서 사이다를 사러 다니는 지적 장애자 두 형제의 아름다운 효심과 형제애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오 늘은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 네 살에 교통사고로 왼쪽 팔과 왼쪽 다리를 잃었지만, 건강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서조차 찾기 힘든 정말 아름답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청년과 요즈음 세상에서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듯한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한 처녀의 갸륵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 또 울먹거린다.
또 최근에 시작된 ‘못난이 주의보’라는 매일 드라마를 저녁 식사를 함께 즐겨 보고 있는데, 남자 주인공의 여리고 착한 마음이 울컥거리게 할 때가 많아 숟가락을 자주 놓게 된다.

엉터리로 사는 이들은 눈에 잘 띄고, 잘 사는 이들은 잘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들 안에서도 정말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믿는다.
아름답게 잘 살고 있는 이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아름다운 삶을 사는 이들이 있고 아름다운 마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는 한 세상은 희망적이다.
아니 늘 세상에는 이런 이들이 있었고 그러기에 세상은 늘 희망적이다.


이야기 셋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이다.
성모님처럼 티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그 마음을 닮아보려는 마음은 가능하다.
티없이 살고자 하는 모습이 세상의 눈에는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바보로 보는 사람들이 진짜 바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윤동주 시인의 더없이 아름다운 고백으로 맺을까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사랑을 사랑이 되게 하는 받아들임 >

-전삼용신부-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혈육 하나 없이 일생을 고독하게 살아온 노인이 양로원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평생 가꿔온 호화주택을 내놓았습니다. 집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순식간에 10만 파운드까지 집값이 치솟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집값은 올라가고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노인은 허전한 마음에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단돈 1만 파운드만을 들고 집을 사기 위해 노인을 찾았습니다.

만약 이 집을 저에게 파신다면 어르신은 영원히 이 집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함께 차도 마시고 신문도 읽으며 제가 말벗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결국 노인은 그 집을 젊은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팔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또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집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고독이고, 또 내가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고독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란 상대 안으로 내 존재를 선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어줌받아들임으로 모든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자신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관계 단절이고 고독이고 죽음이었습니다. 어제 강론에서 헨델이 가발을 찾아준 여인에게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악보를 선물하였지만 그 여인은 그 악보를 그저 머리 마는 것에 사용해버려 헨델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아무리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해도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랑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성모 성심 기념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에 으로 따라옵니다. 예수 성심은 한 영혼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마음이라면, 성모성심은 그 예수님의 사랑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양 99마리를 남겨놓고 그 1마리를 찾아왔는데도 끊임없이 목자의 마음을 몰라준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아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 성심 기념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에 (커플)’로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짝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짝이 자유로이 자신을 받아주는 이라야 내 안의 고독은 사라지게 됩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카사노바처럼 산다면 외롭지 않을까요? 가장 외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안주해야 할지 찾지 못한 떠돌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자신의 갈비뼈를 찾아 나섭니다. 왜냐하면 그 비어있는 갈비뼈가 채워지지 않으면 영원히 허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또한 남자의 옆구리를 찾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안주하지 못하고 항상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허전함과 불안함, 고독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고 마음 속으로 깊이 새겼던 성모 성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986년 여름, 흑해에서 배 두 척이 충돌해 많은 생명을 앗아간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참사의 원인은 전파탐지기의 고장이나 짙은 안개가 아니고 인간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양쪽 선장은 앞에서 배가 접근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충돌을 피해 배의 진로를 바꿀 수 있었지만 서로 자존심을 내세워 양보하지 않았고, 잘못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강하면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모든 관계는 끝나고 맙니다.

 

자존심은 자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와 내가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하십니다. 즉 요셉을 당신 앞에 놓으십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자존심 상해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존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자아를 죽인 분입니다. 이것이 깨끗함이고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본질적으로 교만한 자아를 죽였다는 뜻인데 그 의미는 자아가 차지하고 있던 나의 공간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비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없어 화를 내거나 없었던 일로 잊으려 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셨던 것입니다. 사랑엔 자존심이 없습니다. 성모 성심을 본받는다는 의미는 아주 단순하게는 자신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랑으로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것을 버린 아멘!’, 이것이 사랑이 사랑이 되고 하는 순결한 성모 성심인 것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김찬선신부-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즉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과연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어떠한 마음일까?
복 음서가 성모님에 대해서 전해주는 바는 많지 않다. 성모님은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비쳐지는 성모님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축일을 준비하며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 마음 속에 계속 울려퍼지는 하나의 격언이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그 자식이 자신들이 뜻과 다른 길을 간다고 해도 그의 뜻을 결국은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이 죄와 악의 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 런데, 사실 현실에서는 자식을 이기고야 마는 부모들도 있지 않은가? 자식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 그러한 부모들도 자식을 사랑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사랑, 자기애일 뿐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요, 욕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진 정한 사랑은 자신을 버리고, 참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길을 찾으며,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상대방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비우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 안에서만 거룩한 사랑이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성모님의 마음을 일컬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바로 이렇게 순수하고 비워진 마음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당신 아들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먼 저, 마리아는 자신이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하는 인간적인 치욕과 그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받아들인다.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이시요,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위대한 일을 이루시고자 한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신을 비웠다!

그 리고 과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아기가 태어나고, 천사들과 목자들이 일러준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까 2,19). 또, 아들 예수를 성전에서 찾았을 때에도 무작정 화를 내고, 소년 예수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보다는, "예수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까 2,50-51).
그 리고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찾아나선 어머니를 옆에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묵묵히 듣고도 서러움이나 모욕감 없이 그저 마음 속에서 예수에게 불행한 일만이 일어나지 않기를 묵묵히 기도하며 방해하지 않고자 짐짓 모른 체 물러나 계시고자 했다(마르 3,21-35 참조).

결 국, 당신 아들 예수가 사도 요한을 성모님의 새로운 아들로 맡기시며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숨을 거두실 때에도 여느 어머니들처럼 울부짖으며 "안 된다" 고 하기 보다는 그저 마음 속으로 고요히 슬픔을 삭이기만 하셨을 뿐이다. 당신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자식을 이겨 내지 못하는 "못난 어머니", 예수를 사랑하기에 그의 뜻에 온전히 따르며,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그 자리를 숨죽여 성령으로 채우시는 거룩한 성심의 소유자였다.

오 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 즉 성령으로 그 자리를 채움으로써 성모 성심을 본받기로 하자. 우리가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묵주기도" 만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