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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제5과 / '묵상과 생활' 본문

가톨릭 교회

이사야서 제5과 / '묵상과 생활'

불꽃緝熙 2025. 5. 21. 16:39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사야서"  그룹성경공부한 내용을 여기에 올리는 것이

과연 어떠할지는 하느님의 뜻에 맡겨드리며,

부족한 내용이지만 제가 공부한 자료를 기쁜 마음으로 올려드립니다. 

"이사야서"를 공부하시는 여러 형제자매님들의 배움과 묵상 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일뿐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내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4. 6. 13  김포 고촌 본당 / 이경환 라파엘

 

 

5과 이사야의 묵시록(24-27)

 

묵상과 생활 1. 이사야는 구원의 날에 있게 될 어두운 면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25,10-12). 교만한 자가 낮아질 것이라는 여러 차례의 말씀은 장차 모압이 처할 운명으로 거듭 강조됩니다. 우리 시대의 모압은 누구일까요?

 

이사야서 25,10-12의 내용을 25,6-10과 함께 읽어보면,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민족들에게 주어지는 데, 오만한 이들은 그 오만함이 꺽이지 않고는 구원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즉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한 하느님의 잔치(25,6-9)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모압의 파멸(25,10-12)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그러나 검불이 거름 구덩이에서 짓밟히듯 모압이 제자리에서 짓밟히리라.

11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내뻗듯 모압이 그 구덩이 속에서 손을 내뻗지만 허우적거리는 그 손과 함께 그의 오만은 꺾이리라.

12 견고하고 드높은 너의 성벽은 무너지고 헐려서 먼지 바닥에 내던져지리라.

 

 

저는 이사야 25,10-12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모압은 과연 누구일까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포함하여 우리 신앙공동체에도,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모압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직장 내에서도 부조리한 상명하복이나 서열에 따른 오만과 독선은 젊은 세대의 불신을 초래하기도 하고, 약자나 강자에 대한 편견은 각종 부조리를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특히, 학벌이나 지역에 따른 교만은 사회적인 불평등을 초래하여 극단적인 대립이 생기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세속적인 자그마한 권력이나 권세에 매달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오만해지기만 하는 욕망이나 욕구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공동체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마음가짐이 바로 모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부부가 고촌으로 이사 와, 언덕 위 고촌 성당을 처음 찾아왔을 때의 기억입니다. 20066월 초, 그 당시의 고촌성당은 유난히도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시골스러운 모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성전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는데, 왼쪽 독서대 위 하얀 벽면에 쓰인 요한복음 3,30의 말씀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이 요한복음 말씀은 겸손과 배려가 과연 무엇인지, 또 어떠해야 하는지를 저희 부부에게 일깨워 준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성전에 새겨진 이 말씀을 바라볼 때마다 겸손한 마음과 자세를 우리들에게 알려준 예수님의 가르침에 늘 감사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정말 높은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높여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디서나 항상 끝자리로 가는 겸손과 배려를 먼저 실천하지 못하는 오만하고 교만한 모압과 같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지닌 교만은 그동안 내가 쌓아둔 수많은 지식을 한꺼번에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겸손은 비록 내가 적은 지식을 가졌다 할 지라도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는 성현의 이야기를 되새겨 봅니다. 오만한 마음에는 더 이상 채울 것이 없으나, 겸손의 그릇은 늘 비어 있어서 하느님께서 그 그릇에 더 좋은 내용물을 가득 채워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신앙공동체에서 직책이 높을수록 또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 자신부터 먼저 겸손의 모범을 보이려 노력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과 항상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천주교 고촌교회 / 이경환 라파엘]

묵상과 생활 2.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내 안에 있는 참평화와 거짓 평화(무관심, 무감각, 안주)를 찾아봅시다(26,3.12-17: 참조 마태 10,34-39).

 

이사야서 26,3.12-17의 내용과 마태오복음서 10,34-39의 참조해 보면서, 저의 지난 삶의 여정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한 일이 있는지’,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참평화와 거짓 평화(무관심, 무감각, 안주)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이사야 26,3 :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6,12-17 :

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13 주 저희 하느님, 당신 아닌 상전들이 저희를 지배하였으나 저희는 당신만을, 당신 이름만을 생각하였습니다.

14 죽은 자들은 이제 살아나지 못하고 그림자들은 이제 일어서지 못합니다.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을 벌하여 멸망시키시고 그들에 대한 기억도 모두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주님, 당신께서는 이 겨레를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 겨레를 번성하게 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이 땅의 경계를 모두 넓히셨습니다.

16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17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참조 마태 10,34-39: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이사야서 26,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을 살펴보면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한 일이 있느냐는 묵상 과제를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기도를 통하여 저에게 늘 평화를 주시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제 삶을 돌이켜볼 때, 하느님께서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평화를 두 번이나 경험하게 해 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첫 번째는 서로를 신뢰하는 제 아내와의 결혼이었습니다.

저는 28살에 아내(26)와 결혼하여 딸 둘, 아들 하나를 둔 행복한 삶을 이루었는데, 이 결혼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가장 큰 은총과 평화의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장가를 참 잘 갔다고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6.25 전쟁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겪은 우리 세대들은 결혼이 하나의 인생 전환점이나 도피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였던 1960년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 등 여러 가지 혼돈과 방황의 과정을 겪어나가던 저에게 있어서는 저를 믿어준 아내와의 결혼은 하느님께서 주신 평화의 선물이었지만, 방 한 칸 마련할 여유조차 없었던 저를 믿고 따라준 아내의 입장으로 보아서는 사실 큰 희생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를 돌보아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지금까지도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저희 부부가 고촌 성당에 함께 찾아와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은 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장로교회 장로이셨던 아버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도 열심히 다녔으며, 결혼식도 서대문교회 목사님의 주례로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가끔가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에 나가기도 하였으나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계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모르는 바쁜 직장 생활을 핑계로 신앙생활에는 소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린 시절부터 종로성당에 다닌 경험이 있었던 아내가 저에게 정년 퇴임 후에는 성당에 다니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였습니다. 아내의 제의를 받은 나 또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여 이사 온 후, 두 사람은 함께 고촌 성당을 찾게 되었습니다.

고촌성당을 다니며 아내는 연령회, 구역 모임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열성을 다하여 수행하였고, 저도 자그마한 봉사활동을 하거나 성경공부를 계속하였는데 이 모든 일들이 그 하나 하나가 다시 기쁨이 되어 나에게, 우리 가정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한 감사와 배려의 마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임을 나에게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 내 안에 있는 참평화와 거짓 평화(무관심, 무감각, 안주)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참평화는 사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선물이며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들은 각자가 지닌 생각에 따라 여러 가지를 떠 올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틈틈이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 속에서 제가 깨달았던 기쁨을 제일 먼저 찾아보고 싶습니다.

 

지난 8년 여 동안 말씀 봉사자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성서 40주간, 창세기, 탈출기, 마르코복음서, 요한복음서, 사도행전, 이사야서 등 구약 및 신약성서에 대한 성경공부를 해 나가면서 저는 내 안에 있는 참평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이라 하셨던 것이 기억됩니다. 성경, 해설서, 문제집을 가지고 묵상도 하고 기도를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매일 미사를 다시 읽고 평화방송에서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가톨릭교회 교리서, 생활.교리 성구 사전도 살펴보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이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하는 어떤 느낌이 있는 새로운 깨달음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느끼면서 감사하며 기도드리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 ‘깨달음’, ‘감사하는 마음등과 같은 것들이 내 안에 있는 참평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특히, 내 안의 참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내 안에 있는 거짓 평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찾아봅니다.

저는 일상생활 속에서 머리로는, 또는 입으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위선과 거짓을 깨닫고는 내 안에 참평화와 거짓 평화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거나, 신앙공동체 활동에 무감각인 자세,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는 거짓 평화라 하겠습니다. 특히,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짓 평화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시기심이 생겨 일어나는 이기적인 평화,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거나 비방, 비난, 평가를 하는 이중적인 평화, 권력을 쥔 자들이 주변을 초토화하고 적을 제거하면서 움켜쥔 평화, 폭력과 압제가 교묘하고도 은밀하게 가려져 있는 평화 등으로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 가고 이루어 낸다고 생각하는 평화는 모두 거짓 평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 안의 거짓 평화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찾을 때까지 거짓 평화와 싸워 이겨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저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천주교 고촌교회 / 이경환 라파엘]

 

묵상과 생활 3. 하느님 외에 어떤 상전이(26,13) 나와 나의 가정,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이사야서 26,13에 있는 말씀, 주 저희 하느님, 당신 아닌 상전들이 저희를 지배하였으나 저희는 당신만을, 당신 이름만을 생각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을 다시 읽어보면서, 하느님 이외에 어떤 상전이 과연 나와 나의 가정,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저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과 4.19, 5.16 등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 격동의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은 나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 경제 성장과 국가 발전, 사회와 집단공동체의 공익 우선의 사고방식 등 집단주의 체제를 우선시하는 교육방식에 더 익숙한 삶을 살아왔고 또 그러한 생활방식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내가 받던 봉급의 일부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다거나 국가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의 기금으로 쓰여지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나의 작은 희생으로 국가 경제가 더 나아지는 데 대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던 세대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도 직장 상사나 선배의 지시, 명령을 더 우선시하는 서열이나 권위주의 체제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직장에서는 직장 상사가, 사회생활에서는 선배의 지시가, 군대와 같은 계급 사회에서는 상관의 명령이, 공직사회에서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의 지시 사항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의식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지배하는 상전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나와 내 가정의 생존을 위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당연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형과 저는 늦둥이 아들입니다. 그러니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보아서는 귀한 아들이 집안의 보배라기보다는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상전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유교 및 유학 사상의 논리에 오랜 세월 지배받아 온 우리나라의 사회 체제 속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상전이었습니다. 또한 남존여비의 전통에 따라 언제나 남자가 먼저이었으며, 가정 내에서도 남편이 먼저이고, 직장 승진 서열도 남자 사원이 우선이라는 편견과 우월주의에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사고나 체제가 바뀌려면 아마도 한 세대가 지나가거나 획기적이고도 개혁적인 변화가 있어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공동체 생활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상전의 지배 속에서 생활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체제 속에서도 항상 하느님의 이름을 기억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을 상전으로, 하느님을 통치자로 믿고 따르려고 하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배려해 나가는 개별화 교육이 하루빨리 우리 공동체에 도입되고 확산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항상 하느님의 이름을 기억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가려는 자세와 믿음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천주교 고촌교회 / 이경환 라파엘]

 

묵상과 생활 4. 해산의 고통이란 이미지가(26,17) 그리스도인 내 삶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이사야서 26,17에 있는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을 다시 읽어보면서, 해산의 고통이란 이미지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삶에 과연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묵상 과제에 제시된 해산의 고통은 저로서는 앞으로 평생 알 수 없을 고통일 것입니다. 경험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해산의 고통이라는 말이 뜻하는 감각을 정확히 가늠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사람에 따라 정도는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출산의 과정을 시시한 모습으로 표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건 저도 상식으로도 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안소근 수녀님의 구약성경 주해 이사야서에서는 해산의 고통이란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해산의 고통이라는 표현은 종말을 앞두고 겪어야 할 시련들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발전된다(마태 24,8; 마르 13,8; 요한 16,20-22참조). 특별히 묵시문학에서는 종말을 앞두고 큰 환난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현재의 세상이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 질서의 철저한 변혁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해산의 고통이 요구된다. [안소근(2024), ‘구약성경주해 이사야서1-39’, p.337.]

 

따라서 해산의 고통이 종말을 앞두고 겪어야 할 시련들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표현된다고 할 때,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나 질서의 변화를 창조하는 일은 해산의 고통이나 아픔을 겪으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변혁이 있어야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축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 새 생명을 맞이하는 기쁨과 감격,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고, 이전의 고통을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 생명의 근원은 하느님이시므로 그분이 거룩한 뜻을 가지고 생명을 주신 은총에 감사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따른 가치 있는 삶을 살아 나가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삶에 해산의 고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변화와 헌신,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의 삶에 바르게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천주교 고촌교회 / 이경환 라파엘]

 

 

-< Love Is Just A Dream (사랑은 꿈만 같은 것) / Claude Choe>-

 

 

* 편집 : 西湖 李璟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