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사도행전 제5과 "묵상과 생활" 본문
제가 쓴 내용이 여러분의 성경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묵상과 생활'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정리해 보세요.
- 서호 이경환 라파엘(김포 고촌 본당) 드림
사도행전 제5과 묵상과 생활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며”
사도행전 : 8,4-9,30
1) 필리포스가 유다인들이 멸시했던 사마리아에(참조 요한 4,9) 복음을 전하자 ”그 고을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8,8)고 합니다. 오늘날 필리포스와 같은 선포자들이 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지역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묵상해 봅시다.
저는 이 묵상에 대한 복음 말씀으로 요한 4,9과 사도 8,8에 있는 내용을 읽으며 유다인들이 멸시했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져 기쁨이 넘친 일에 관하여 묵상해 보았습니다.
(요한 4,9)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을 어떻게 유다 사람이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사도 8,8.14)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에 위치한다고 합니다. 아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형성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바빌론 유배 시대 이후로 유다인과 갈라서기 시작하여 신약시대에는 극심히 반목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은 사마리아인이 순수한 야훼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여 그들을 부정한 이단자로 취급하였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도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이 사마리아 고을의 군중은 유다인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필리포스의 말(가르침)을 모두 ‘한마음으로’ 귀담아듣고 또 보았습니다. 이때 필리포스는 예수와 사도들처럼 ‘많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많은 환자와 장애인을 고쳐 ‘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판과 저주가 아니라 복과 구원을 담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사마리아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유다인 지역이 아닌 곳으로,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확장된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필리포스와 같은 선포자들이 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지역은 어디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묵상해 봅니다. 이와 같은 묵상을 위해서는 내 주위의 어려운 사람, 소외된 지역이 없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6.25 전란 중 피난을 왔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무엇보다도 먼저 남북한이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사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이 남북한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통일에 대비하여 국가, 사회적인 여러 분야에서 미리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에는 제가 맡고 있던 교육과정 정책업무와 관련하여 남북한의 통일에 대비한 정책과제와 연구과제를 추진하면서 가슴 뿌듯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과거의 북녘 땅에는 우리와 함께 예수님을 믿는 개신교회의 선교가 참으로 컸던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천주교회에서도 과거에는 평양교구, 원산교구, 함흥교구가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왕성하게 선포하고 믿음의 형제들이 참으로 많았던 지역이 바로 북녘 땅이었습니다. 1945년 공산화된 이후 이제는 침묵의 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회복해야 할 엄연한 우리 민족, 하느님 백성의 교회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 그해 12월 23일에 떠나온 고향 산천이지만 그 당시 예수님을 믿는 수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도 신앙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요?
지금도 물론 우리 천주교 교구 차원에서는 북녘 복음화를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기도하는 일 이외에는 마땅한 역할이 떠오르지는 않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북녘 형제들과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기도하고 현재의 삶에서 제 스스로 복음을 공부해 나가는 일들이 제 역할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봉헌할 열정을 품고 사제로, 선교사로서 우리 겨레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한다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지녀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필리포스가 유다인들이 멸시했던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자 ‘그 고을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남북한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우리 겨레의 노력이 하루속히 이루어져 아직도 신앙을 지키고 있을 북녘 땅의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큰 기쁨’이 넘칠 수 있도록 우리 겨레에게 하느님의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 서호 이경환 라파엘(김포 고촌 본당) ]
2) 사울이 땅에 엎어져서 주님께 누구신지를 물었을 때, 그분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9,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깊이 체험한 때가 언제이며, 그때 그분은 나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느끼게 해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봅시다.
저는 이 묵상에 대한 복음 말씀으로 사도 9,3-6에 있는 내용을 읽으며 사울이 예수님을 깊이 체험한 때가 언제인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도 9,3-6)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뜻밖의 체험에 놀란 사울은 모든 일이 하느님이 나타나 생긴 것이라고 이해하여,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말하며 말씀하시는 분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놀라웠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라고 대답하여 지금 주님으로 나타나신 예수께서 당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히시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박해한 사울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박해하였고, 자신은 ‘하느님의 벗’으로 일한다고 여겼으나 사실상 ‘하느님의 대적자’로 활동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거나 성령을 체험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사실 20여 년 전부터 나의 삶을 ‘덤으로 사는 삶’으로 생각하면서 늘 다른 사람들에게 ‘덕분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자주하여, 친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은 ‘지나친 겸손은 예가 아니다(過恭非禮)’ 라는 말을 살짝 저에게 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의 신앙공동체에서 공손한 마음가짐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겸손한 태도는 아무리 과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동족 상잔의 6.25 전쟁으로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는 남녁에서 새카맣게 몰려오는 B29의 폭격을 피해 생사를 넘나들었던 기억이 생생한데다, 결국은 매러디스빅토리호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7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와 우리 가족의 삶 모두가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의 보살핌이었고 은총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시절부터 훌륭한 선후배들의 사랑과 배려, 보살핌 덕분에 오랫동안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개선 정책을 담당하여 열의를 다하여 수행하는 보람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는 큰 일을 여러 번 겪으며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돌보심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을 여러 차례 겪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담당업무와 관련된 현장협회의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한 후 교대 앞에서 자동차를 타려고 기다리던 중 ‘퍽치기’를 당하여 쓰러졌는데, 당시 국제상사에 다니던 분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한밤중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뒷머리를 꿰매고 살아난 일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들고 있던 책가방에 값비싼 물건이라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잘못 알았던 모양입니다. 또 한번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오전 8시 간부회의를 위해 준비 중 갑자기 진땀을 흘리며 쓰러져 주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긴급히 가까운 강북삼성병원으로 실려갔는데, ‘급성심근경색’이라는 진단에 따라 신속한 치료를 받으며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지낸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은 후, 저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배려해주고 사랑해준 그 덕분에 인생을 덤으로 살아간다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현재의 내 삶이 있게 된 그 자체가 그저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였습니다. 오늘 자매님들과 함께 인터넷으로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 ”덕분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됨은 물론 현재의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30일(2023.5.50) 매일신문 CEO포럼 제7기 9주차 '인생 공부법' 강연에서 변찬우 변호사는 ‘감사하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는 주제로 "세상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10년 간에 걸친 공부법으로 깨달았다"는 강연 내용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현재의 삶과 모든 일들이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고 성령의 보살핌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삶의 현장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큰 축복이기에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 현재의 삶이 있도록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내 삶도 주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도록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서호 이경환 라파엘(김포 고촌 본당) ]
감사하며 사는 삶
행복한 삶을 위하여서는 사람은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일하는 것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기본정신이 필요하다.
일이 있고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결코 저주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며 축복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아침마다 만원 버스나 전철로 출근을 한다면
일자리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다.
사람에게 일거리가 있다는 것은
일이 없는 것에 비하여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비우고 삶의 현장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감사를 만들고
감사는 축복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입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거리가 밀려있다면
내가 지금도 사람들에게 봉사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고
몸이 피곤하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생각을 조금만이라도 긍정적으로 바꾼다면
내가 살아 있음도 감사의 대상이고
내가 굶주리지 않음도 감사이고
컴퓨터를 다루며 허리 펴고 당당히 산다는 것이
자랑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 카페’에서 옮긴 글입니다. 다래골 著>
3) 주님께서는 왜 사울을 직접 만나지 않으시고 하나니아스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그를 다시 보게 하시는지를 묵상하며, 나에게 하나니아스는 누구인지 생각해 봅시다.
저는 복음 말씀으로 사도 9,10-19에 있는 내용을 읽으며 주님께서는 왜 사울을 직접 만나지 않으시고 하나니아스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사울을 다시 보게 하시는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하나니아스는 사울이 주님의 성도에게 못된 짓을 하는 자이므로 도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9,15) 라고 하시며 사울이라는 질그릇에 당신의 이름과 복음을 담아 쓰고자 하시는 사울의 소명을 드러내십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울을 선택한 이는 주님이시며,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가 사울이 자원했거나 교회가 청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시작하여 이루어 가는 일임을 분명히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역사에서 주님께서는 때로 당사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교회의 오해를 무릎쓰고 당신의 일꾼을 불러 쓰시는 일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을 만나 형제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며 예수께서 사울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자신을 보냈다고 밝힙니다. 하나니아스가 안수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권능으로 시력이 회복된 것입니다.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저항하며 번민하던 사울이 예수께서 주신 성령으로 새 생명과 신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울은 하나니아스와 같은 평범한 동료 그리스도인의 도움을 꼭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제 위와 같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나에게 있어서 하나니아스와 같은 존재는 과연 누구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니아스와 같이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내 아내(임명자 라파엘라)입니다. 성당에 나가도록 이끌어 주고 두 사람이 함께 교리 공부를 시작하여 함께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함께 성당에 나가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권유한 사람도 내 아내였으며,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수소문하여 해 질 무렵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고촌성당에 찾아와서 성전에 함께 들어가 기도하게 이끌어준 사람도 역시 내 아내였습니다. 당시 직장 생활로 여유 없이 바쁜 와중에도 몇 개월 동안 교리 공부도 함께하고 신부님 앞에서 세례와 견진도 함께 받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내는 평생의 반려자이며 동료로서 하나니아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겠습니다.
아내의 신앙공동체를 위한 봉사활동에서 배려와 희생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가 떠오릅니다. 몸이 아픈 교우들을 위한 환자영성체 활동, 양로원 방문 봉사활동, 국내외 성지순례 활동 등 다양한 활동들이 순서없이 떠오르지만,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활동은 바로 연령회 봉사활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교인들을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 하며, 교우들의 장례 예식을 도와줄 수 있는 상장지도사 자격도 취득하여 봉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천주교의 희생, 봉사 정신이 교우들에게도 더 큰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아내는 선교사 과정을 거쳐 선교사로 봉사할 수 있는 자격도 받았고, 고촌의 신앙공동체에서 반장, 구역장, 총구역장으로서의 역할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그리고 본인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사목회에서의 맡은 바 직무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것 또한 아내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사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성당에서 맡은 바 봉사 직분을 내려놓은 후, 아내는 성모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하여 심장 질환 등의 질환을 치료받았고 아직도 통원 진료 중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로 알고 감사 기도 드리는 아내는 모습에 저 또한 고개 숙이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나라의 성지순례도, 외국의 성지순례도 함께 해왔으며, 지금도 건강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성지순레를 하면서 순교자들의 고귀한 신앙의 삶을 배우고 함께 느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나이 든 지금도 성경 공부를 계속하고자 다짐하는 것도 제 아내가 성경을 공부해 나가는 그 꾸준한 노력을 옆에서 지켜본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내 아내가 지닌 믿음의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아내가 나에게 보여준 하나니아스로서의 역할은 서로를 존중해주는 평생의 반려자로서, 평생을 함께하는 동료로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토록 사랑합니다.
”주님, 제 아내와 함께 주님을 믿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멘!“ [ 서호 이경환 라파엘(김포 고촌 본당) ]
일용할 양식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9.5)
기도 지향
그리스도 신비체인 온 교회를 위하여
* 편집 : 西湖 李璟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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