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사도행전 제3과 묵상과 생활 본문
제가 쓴 내용이 여러분의 성경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묵상과 생활'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정리해 보세요.
- 서호 이경환 라파엘 드림
사도행전 제3과 묵상과 생활
1) 태생 앉은뱅이 앞에서 베드로가 가지지 못한 것과 가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가지기 원하는지 생각하여 봅시다.
저는 이 묵상에 대한 복음 말씀으로 사도행전 3장 6-10절에 있는 내용을 다시 읽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위의 사도 3,6을 보면,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3,6) 하고 말하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들은 은, 금 등의 재물이나 돈은 가진 것이 없어도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3,6)이라는 권능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비참한 동족상쟁의 6.25 전쟁을 겪으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세월이 너무나 길었기에 그 어려운 생활상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으려고 대부분 많은 노력을 하여 왔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내가 73년 전 자유를 찾아 매러디스빅토리호를 타고 그야말로 빈손으로 피난을 왔던 6.25 전쟁 이야기를 하고, 지금도 우리는 검소한 생활과 남을 배려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면, 또 6.25 이야기이냐고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내 삶을 되돌아보더라도, 전쟁의 공포와 삶의 고달픔 속에서 아직까지도 근심 걱정 가득하게 살아가는 사람, 짜증이나 신경질, 화나 증오심, 어둡고 음울함, 공허감과 허무감으로 인하여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 삶의 의미나 보람, 기쁨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이 늘 안타깝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서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으면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하신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기에 교회를 벗어난 생활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 지나간 옛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등록금이 없어 나의 진로를 바꾸어야만 했던 젊은 시절부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참으로 인복이 많다”고 하면서 나를 부러워할 정도로 내 주변에는 항상 나를 도와주고 이끌어준 선배와 동료, 후배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큰 은총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삶을 되돌아 보며 이제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가지기 원하는지 또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부족한 삶이었으나 내 삶 속에는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면서 ‘대한민국 U자 걷기’를 함께 하였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한밤의 사진편지를 사랑하는 걷기 모임’의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편수 업무의 고달픔 속에서도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사랑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의 멤버들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정년 퇴임 후에는 아무런 보수나 댓가도 없이 내가 가진 작은 것을 서로 나누며 그로 인해 내가 얻는 기쁨에 만족하였던 자원봉사활동 회원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면 내 주변에 계셨던 이런 분들과 내가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 삶의 행운이었고 행복이었으며 내가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도와주고 함께 하였던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내 삶이 있었기에 앞으로도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님, 항상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며 삶의 보람이나 기쁨을 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사도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3,6.16; 4,12)을 위해 모욕당함을 기뻐하며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쳤습니다(5,41-42).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받은 것은 무엇이며, 그 이름을 위해 나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묵상에 대한 복음 말씀으로 사도행전 3장 6절과 16절, 4장 12절, 5장 41-42절에 있는 내용을 차례로 다시 읽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3,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3,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4,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5,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5,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이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최고 의회는 기다려 보자는 가말리엘의 제안을 수용하여 사도들을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거듭 위협한 뒤 석방하였습니다(5,39-40). 그러나 사도들의 반응은 ‘기쁨’, ‘가르침’, ‘선포’의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사도들은 그(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합니다(5,41). 사도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섬길 수 있어 기뻐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최고 의회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쳤다(5,42)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메시아”(5,42)라고 선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전 개신교 목사님의 설교 중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미국 뉴욕에서 교회를 다니는, 믿음이 좋은 어떤 여학생이 조금 늦은 시각에 집으로 가는데, 그날따라 인적이 드문 길에 한 건장한 흑인 강도가 칼을 들고 갑자기 나타나 위협하며 가진 것을 모두 다 내놓으라고 하였답니다. 나였다면,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였을까요? 그런데 그 순간, 이 여학생은 큰소리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멈추라”하고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강도는 그만 칼을 떨어뜨리고는 뒤로 돌아 줄행랑을 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강도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 여학생의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에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실증적인 하나의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하고 있거나 하였던 일 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받은 것은 무엇이며, 그 이름을 위해 나는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2006년 3월 정년 퇴임을 한 후, 저로서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오히려 내가 받은 기쁨을 되새겨 봅니다. 박물관이나 궁궐에 나갔을 때는 직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식사할 때나 일을 하기 전. 후,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다고 하는 감사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행한 나의 작은 봉사는 기쁨이 되어 오히려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한 작은 봉사가 나에게 건강, 배움, 사랑을 다시 한번 깨우쳐주었으니 이로 인해 내가 받은 기쁨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총이었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이런 봉사활동도 대부분 그만두었으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일을 하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늘 더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제가 감사드리는 이 기쁨이 사랑하는 내 이웃에게도 그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아멘!”
3) 루카는 복음서에서 죄인을 용서하며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가 사도행전에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이야기(참조 사도 5,1-11; 창세 3,3-5; 여호 7장)를 전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저는 이 묵상에 대한 복음 말씀으로 사도행전 5장 1-11절에 있는 내용과 창세 3,3-5; 여호 7장의 내용을 참고로 하여 다시 읽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5,1-11)
1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2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 발 앞에 놓았다.
3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4 그 땅은 팔기 전에도 그대 것이었고, 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
5 하나니아스는 이 말을 듣고 쓰러져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6 젊은이들이 일어나 그 시체를 싸서 메고 나가 묻었다.
7 세 시간쯤 지나서 하나니아스의 아내가 그동안에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한 채 들어왔다.
8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대들이 땅을 이만큼 받고 팔았소? 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예, 그만큼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9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어쩌자고 그대들은 서로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오? 보시오, 그대 남편을 묻은 이들이 바로 문 앞에 이르렀소. 그들이 당신도 메고 나갈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10 그러자 그 여자도 즉시 베드로의 발 앞에 쓰러져 숨지고 말았다. 그 젊은이들이 들어와 여자가 죽은 것을 보고 메고 나가 그 남편 곁에 묻었다.
11 그리하여 온 교회와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초대 공동체 생활의 부정적인 사례를 읽으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 묵상에 대한 대답이 어려워 해설서(p.111)에 쓰여진 내용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니아스 부부는 누구를 죽이거나 다른 신을 섬긴 것도 아니고 단지 거짓말을 하였을 뿐인데 죽음을 내리다니 왜 그랬을까? 그들의 잘못은 속임수였습니다. 그들이 땅을 팔든 팔지 않든 내 놓든 내 놓지 않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탐욕과 명예를 함께 움켜쥐려 했던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신앙공동체에서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마태 18,21-22)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루카가 사도행전에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이야기(사도 5,1-11)를 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지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지 재산을 빼돌리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핵심적인 이유는 “그들이 사탄에게 마음이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5,3) 또 공동체를 속이고 “주님의 영을 시험”(5,9)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부의 죽음은 성령을 모독한 결과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일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현재의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함께하는 성령을 속이고 시험하려 한 일은 과연 없었는지, 나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반성도 없이 구원만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교리를 왜곡하거나 거스르는 죄를 반복하지는 않았는지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이가 든 현재까지도 신앙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며, 여기에는 성령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이므로 나부터 먼저 성령께 마음을 열어드리도록 늘 노력해야 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일흔일곱 번이라도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한 죄인이 나도 모르게 성령을 속이고 모독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게 저를 깨우쳐주시고, 늘 성령과 함께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 3,3-5)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는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수아기 7장) 아칸의 죄와 그 결과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완전 봉헌물과 관련하여 죄를 지었다. 유다 지파 제라의 증손이고 잡디의 손자이며 카르미의 아들인 아칸이 완전 봉헌물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를 터뜨리셨다.
2 예리코에서 여호수아가 베텔 동쪽 벳 아웬 부근에 있는 아이로 사람들을 보내면서, “올라가 그 땅을 정탐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들이 올라가 아이를 정탐하고,
3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말하였다. “백성이 다 올라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천 명이나 삼천 명쯤만 올라가도 아이를 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으니, 온 백성을 그리로 가게 하여 고생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4 그리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삼천 명쯤이 그리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 사람들 앞에서 도망쳤다.
5 아이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에서 서른여섯 명을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 스바림까지 뒤쫓아 가 내리막에서 그들을 쳐 죽였다. 그러자 백성의 마음이 녹아내려 물이 되어 버렸다.
6 여호수아는 자기 옷을 찢고, 주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저녁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이스라엘의 원로들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들은 또 자기 머리 위에 먼지를 끼얹었다.
7 여호수아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어찌하여 이 백성이 요르단을 잘 건너게 하시고는, 저희를 아모리족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 차라리 저희가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것으로 만족하였다면 좋았겠습니다.
8 주님, 죄송합니다. 이스라엘이 원수들 앞에서 등을 돌려 달아났으니, 제가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9 가나안족과 이 땅의 모든 주민이 이 소식을 들으면, 저희를 에워싸고 이 땅에서 저희 이름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렵니까?”
10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그렇게 엎드려 있느냐?
11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계약을 어기고 완전 봉헌물을 차지하였으며,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 물건을 자기 기물 가운데에 두었다.
12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 자신이 완전 봉헌물이 되어 버려,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게 되고 그 앞에서 등을 돌려 달아났던 것이다. 이제 너희 가운데에서 완전 봉헌물을 없애지 않으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겠다.
13 일어나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라.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완전 봉헌물이 있다. 그 완전 봉헌물을 너희 가운데에서 치워 버리기 전에는, 너희가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다.’
14 너희는 아침에 지파별로 앞으로 나와라. 주님이 제비로 뽑는 지파는 씨족별로 앞으로 나오고, 또 주님이 제비로 뽑는 씨족은 집안별로 앞으로 나와라. 그리고 주님이 제비로 뽑는 집안은 장정별로 앞으로 나와라.
15 그래서 완전 봉헌물을 가지고 있다가 제비로 뽑히는 자는, 그에게 딸린 모든 이와 더불어 불에 태워야 한다. 그가 주님의 계약을 어기고 이스라엘에서 추잡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16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지파별로 앞으로 나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다.
17 유다의 씨족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였더니 제라 씨족이 뽑히고, 제라 씨족을 장정별로 앞으로 나오게 하였더니 잡디 집안이 뽑혔다.
18 이어서 잡디 집안을 장정별로 앞으로 나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제라의 증손이고 잡디의 손자이며 카르미의 아들인 아칸이 뽑혔다.
19 여호수아가 아칸에게 말하였다. “아들아,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라. 그리고 네가 무엇을 하였는지 숨기지 말고 내게 말하여라.”
20 아칸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참으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이런 짓을 하였습니다.
21 제가 전리품 가운데에 신아르에서 만든 좋은 겉옷 한 벌과 은 이백 세켈, 그리고 무게가 쉰 세켈 나가는 금덩어리 하나를 보고는 그만 탐을 내어 그것들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고서는 제 천막 안 땅속에다 은을 밑에 깔고 숨겨 두었습니다.”
22 여호수아가 심부름꾼들을 보냈다. 그들이 그 천막으로 달려가 보니 과연 천막 안에 그것들이 숨겨져 있었는데, 밑에는 은이 있었다.
23 그들은 그것들을 천막에서 꺼내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있는 곳으로 가져다가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
24 여호수아는 제라의 자손 아칸, 은과 겉옷과 금덩어리, 그의 아들딸들, 소와 나귀와 양들, 천막과 그에게 딸린 모든 것을 이끌고, 온 이스라엘과 함께 ‘아코르 골짜기’로 올라갔다.
25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불행에 빠뜨렸느냐? 오늘 주님께서 너를 불행에 빠뜨리실 것이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이고, 나머지 것은 모두 불에 태우고 나서 그 위로 돌을 던졌다.
26 그리고 그들은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아 올렸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제야 주님께서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셨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코르 골짜기’라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성령모독죄란 게 뭔가, 대략 6개 정도입니다.
1.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고 죄를 저지르거나 ,
반대로 난 하느님 열심히 믿고 기도하니 회개 받았다고 생각하며 죄를 반복하는 행위.
2. 이단에 빠지거나 교리를 왜곡하거나 거스르는 행위.
3. 타인이 은총을 받은 것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행위.
4. 아무 대가(믿음을 통한 선행, 죄의 반성)도 없이 구원받으려는 행위.
5. 죄를 짓기를 그만두지 않고 완고하게 고집하는 행위.
6. 죽을 때 반성이나 회개 없이 죽는 행위.
1~5번은 종파나 신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릴 때도 있지만 6번은 어느 종파나 신학자 성직자도 모두 이견이 없습니다.
이 6가지는 말 그대로 인간의 회개를 위해 작용하는 성령의 도움(은총)을 죄인 쪽에서 거부하고 훼방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구원받을 수도, 죄의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를 해주려 해도 위의 6가지 상태는 인간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용서를 못 받는 죄입니다.
성령 훼방죄 (성령 모독죄)
성경과 기독교 종파들이 규정하는 특이한 죄가 있는데, 그것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 (성령 모독죄)'이다.
"그러므로 잘 들어라.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12장 31~32절)
이 구절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은데, 일단 주류 기독교 종파에서는 '성령 훼방죄 = 아무리 회개해도 한번 지으면 용서 못받는 특정한 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신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없다는 것이 교리기 때문.
주류 기독교 종파인 개신교나 가톨릭, 정교회 등에서는 과거부터 성령 모독죄를 6가지 범주로 구분해왔다.
1. 자신의 구원에 대해 절망(체념)함, 또는 지나치게 자만함.
2. 알면서도 진리(믿을 교리)를 거스르려는 태도 = 이단에 빠짐.
3. 타인이 받은 은총에 대해서 질투하고 시기함
4. 신앙 안에서의 공로(믿음을 통한 선행, 죄의 청산) 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
5. 죄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리기 거부하고 죄를 완고하게 고집함
6. 삶을 마칠 때, 회개 없이 죽는 것
이 6가지는 말 그대로 인간의 회개를 위해 작용하는 성령의 도움(은총)을 죄인 쪽에서 거부하고 훼방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구원받을 수도, 죄의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위치에 서게 된다. 성령(하느님)께서 용서를 해주려 해도 저 6가지 상태는 인간이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상태기 때문에 용서를 못받는 죄다.
특히 마지막 6번째, 죄인이나 불신자가 회개 없이 죽는 것을 최악의 성령 모독죄로 본다. 다른 5가지는 생략하는 경우가 가끔 있어도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6번째의 회개 없는 죽음은 성령 모독죄의 예시로 반드시 언급한다.
일용할 양식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3,6).
기도 지향
선교사와 말씀의 봉사자들을 위하여
* 편집 : 西湖 李璟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