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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862호(한양도성 순성길 [8-1] '21/12/6/월) 본문
한밤의 사진편지 제2862호 ('21/12/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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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명물 친환경전기버스를 타고 남산 정류장에 내려 한양도성 순성길에 나섰다.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을 걸으며...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8) 일제가 할퀴고 우리가 덧낸 남산 [1]
서울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전망대 계단에서 한양도성과 인왕산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던 화가이자 건축가 김석환(61) 씨를 만났다. “서울은 삶터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남산에 올라 시내를 바라보면 한양도성의 지형지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차분히 그림을 그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600년 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고 말했다.
화가이자 건축가 김석환 씨가 남산전망대에서 화폭에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담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돌아보고 특별한 고증 없이 급히 쌓은 백범광장아래 회현 구간 성곽도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본 후, 다시 1.7km 국치(國恥)길의 시작인 조선신궁 배전터로 올라왔다.
남산공원 입구에서 백범광장으로 오르는 성곽길
'국치길'은 '나라의 수치’인 일제침탈의 흔적을 돌아보는 남산다크투어(Dark Tour) 코스다. ‘다크투어’란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 보는 ‘역사교훈여행’이다. 이 길 아래엔 일제가 훼손한 남산의 흔적과 아픔 외에도 공포정치 산실 중앙정보부의 상흔들도 함께 짚어보는 ‘인권의 길’을 만나게 된다. 최근 남산되찾기사업의 하나로 남산예장공원이 문 열었다. 이곳 이회영기념관에서 독립운동가 우당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국치길 통감관저 터를 찾았다.
'통감관저 터/ 기억의 터'에 위치한 <세상의 배꼽> 조형물, 중앙의 반석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고 각자되어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이곳에는 일제에 짓밟힌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공원 ‘기억의 터’가 조성 되어있다. ‘기억의 터’ 한 가운데 설치된 조형물 ‘세상의 배꼽’에 쓰여진 문구가 오래도록 시선을 머물게 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기억의 터)까지/ 순성길에서 만난 국치길과 인권길
일몰이 아름다운 남산길을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일제가 할퀴고 우리 손으로 훼손한 ‘남산’ 경복궁과 마주한 목멱산을 바라보며 조선의 왕들은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백성들도 목멱산 정상의 봉수대에서 해질 무렵 피어오르는 한 줄기 봉화에 변방의 무사를 확인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조선시대 목멱산은 국토와 왕경을 수호하는 신산(神山)으로 산 정상에는 목멱대왕을 모셔놓은 국사당國師堂이 자리했다. 이처럼 목멱산으로 불렸던 남산은 왕과 백성이 모두 우러러 보는 한양 중심의 영산(靈山)이었다. 조선 500년 도읍지 한양의 수호산인 남산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건 1880년대 중반부터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정국이 요동친 직후인 1885년, 조선 지배권을 놓고 다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해 ‘왜성대(倭城臺)’라 불렸던 예장동(藝場洞)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한다.
경성신사 전경
남산을 거점으로 본격적으로 조선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입경하는 일본인 수가 해마다 배 이상 급격히 늘어나면서 1898년, 지금의 숭의여대 자리에 경성신사를 세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정치가 실시되면서 일본은 남산에 통감부 청사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식민통치에 들어간다. 이미 을사늑약 체결 전인 1904년 통감부 동쪽에 일제 무력통치의 중추기관이 되는 일본헌병대사령부(현 남산골한옥마을)가 들어섰다.
1900년 초 한양공원 전경
1900년대 초 남산 일대는 경성이사청 외에도 정무총감 관저, 일본 적십자사 등이 들어서며 식민통치의 심장부로 자리잡았다. 1906년에 설치한 경성이사청은 예장동 주변을 경성공원으로 만들고,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회현동 일대 30만평을 고종에게 영구 무상임대 형식으로 받아내 1908년 한양공원을 조성한다. 마침내 한일병합 일주일 전인 1910년 8월 22일, 고종에게 전권위임장인 ‘칙어’를 받아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남산 자락의 통감 관저를 찾아가 데라우치가 내민 한일병합조약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버리고 말았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조선왕조의 500년 명맥이 완전히 끊기는 순간이었다.
일제강점기 남산에서 촬영한 남촌 일대 전경
조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백성의 출입과 개발이 제한되었던 남산일대를 마음대로 훼손하면서 핵심 통치기구인 통감부와 총독부를 비롯하여 각종기관과 일본 거류민을 위한 주거지, 상업시설 등을 전면 배치하였다. 남산자락인 충무로와 퇴계로, 명동 일대는 일본식 신시가지로 꾸며 북촌에 견주어 ‘남촌’으로 불렀다. 식민지배층 특권공간 남촌에는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경성우편국(현 중앙우체국),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등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주로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북촌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1906년 1만 명이 조금 넘던 일본인들은 한일병합이 되던 1910년 서울 인구의 14%인 3만 3천 명에 달했다. 3,1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남산 산록 중 가장 눈에 띄는 회현 자락에 조선신궁을 세워 조선인의 정신까지 옭아매었다. 경성의 랜드마크인 남산은 그들이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경성-용산 축의 중심이었다.
충무로의 한 빌딩에서 본 예장자락 중심의 남산 전경
눈을 감고 해방 전 일제가 허문 남산 정상의 국사당 터에 서서 산 아래를 둘러본다. 조선신궁을 시작으로 경성신사와 노기신사, 동본원사(東本願社), 통감부(조선총독부)와 통감부관저, 일본군헌병대, 정무총감 관저가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에는 식민지배층의 특권적 공간인 신시가지 남촌이 화려하게 자리잡고 우측 장충동 방향으로는 박문사와 장충단공원이 멀리 보인다. 뒤를 돌아 한강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서빙고 방향에는 공병대와 기병대, 연병장, 용산쪽으로 오며 사격장, 일본군 20사단 보병 제78연대와 보병 제79연대, 야포병대가 남산 자락을 파헤치고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인 잃은 민족의 영산은 식민지배국의 통치기구와 침략기구에 갇히고 한양도성을 훼손하고 지은 조선신궁의 위세에 짓눌려 신음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동상 / 1956년 8월 15일 남산 중턱에 준공된 동상으로 그 높이가 기단부 포함 모두 25미터에 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신을 경축하여 만들어졌으나 1960년 4·19혁명으로 철거되었다.
안타깝게 남산은 식민지배의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채 광복과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 경제발전과정에서도 훼손이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말에 세워진 경성호국신사 자리에 해방촌이 들어섰다. 이어 적산처리 과정에서 동국대를 비롯해 중앙방송국, 숭의학원, 미군 통신부대, 외인주택, 아파트, 호텔 등과 각종 정부기관, 학교, 군 및 종교단체가 들어서면서 남산은 다시 한 번 우리 손에 의해 파괴되는 아픔을 겪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벌거벗은 전국 산의 녹화사업에 힘썼던 박정희 정권도 유독 남산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동상과 기념물, 터널과 타워는 남북 체제 경쟁과 정치이데올로기 홍보의 상징이었다. 공포정치의 상징 중앙정보부 역시 남산 예장자락을 남모르게 파헤쳤다. 40여개 건물을 차지하고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하는 아픈 우리의 역사 현장이다.
남산 정상에 위치한 팔각정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신궁보다 낮은 위치의 인왕산으로 옮긴다. 현 팔각정이 국사당이 있던 자리이다.
- 남산 국사당 터와 팔각정 현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태조를 비롯해 조선의 왕들은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영산인 이곳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를 지냈다. 국사당은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졌다. 국사당의 첫 명칭은 제사 지낼 사 '祀'를 썼으나, 이후 스승 사 '師'로 바뀌면서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 등을 모시는 사당이 된다. 제1공화국 시절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도 불렀는데,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목멱산 봉수대 터 /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사용했던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이다. 변방에서 긴급 사태가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렸다.
- 목멱산 봉수대 터 목멱산봉수대는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이자 중앙 봉수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視覺)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봉수대는 전국에 620여 개소가 있었고 이들은 목멱산에 있는 5개소의 경봉수(京烽燧)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어 있었다. 목멱산 봉수대는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년 간 존속하였다. 목멱산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고증하여 1993년 남산 제3봉수자리로 추정 되는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이다.
잠두봉전망대 옆 계단에서 바라본 도심 전경
-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예로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북한산을 비롯해 외사‧내사산에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숲과 인왕산 자락에 길게 이어진 한양도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 한양도성유적전시관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일대는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2013년~2014년 한양도성 보존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다. 현 전시관 일원에서는 총 길이 약189m의 한양도성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 결과 땅 속에 묻혀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유구는 조선시대 축성 기법과 석재(石材)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유적전시관이 자리잡은 남산 자락은 한양도성의 오랜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양도성 유적(1396)을 비롯해 조선신궁 배전 터(1925), 남산 분수대(1969) 등을 포괄하는 전시관 권역에서는 조선시대 축성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 도시화, 최근의 발굴 및 정비과정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내내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 유적은 태조(14세기), 세종(15세기), 숙종 이후(18~19세기)에 쌓았던 부분들이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시기별 축성 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발굴한 각자성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성곽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조치욱 연구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발굴작업 도중 평범 하지만 뭔가 다른 성돌 하나를 만났다. 직감으로 각자성석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풍화가 많이 진행되고 돌 자체가 약해서 탁본으로도 글자를 특정하기 쉽지 않았다. 더 훼손될 것 같았다.”면서 “아이디어를 냈다. 휴지를 물에 풀어 조심스럽게 성돌에 새겨진 글자에 한획씩 붙여나갔다. 그러자 ‘내자육백척’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현장에서 붓으로 흙을 털어내며 터득한 일종의 임기응변이 통한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자의 번득이는 지혜로 묻힐뻔한 유물이 세상에 빛을 본 순간이었다. 한양도성의 유구와 함께 6~70년대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남산분수대 자리 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의 기초가 발견되기도 했다. 1956년 당시 2억6백만환의 거금을 들여 제작한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은 4.19로 해체되었지만 본체만 7미터의 높이에다, 기단까지 합치면 무려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이었다.
[글, 사진 : kukinews의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편집 : 西湖 李璟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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