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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647호(이규석.이영례의 바이칼호 여행기 6 /'18/9/22/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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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647호(이규석.이영례의 바이칼호 여행기 6 /'18/9/22/토)

불꽃緝熙 2018. 9. 22. 12:52

 

 

 

한밤의 사진편지 제2647호 ('18/9/22/토)

[한사모' 공식 카페] - '한밤의 사진편지 romantic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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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석, 이영례의 바이칼호 여행기] (6)

 

"시베리아 첫걸음 이르쿠츠크와 바이칼호 여행"

 

* 제 6일 : 2018년 8월 8일(수) *


 

첨부이미지

 

글 : 이규석 (한사모 회원,  ksyesks@naver.com )


편집 : 이영례 (한사모 회원, varvar@naver.com )


 

 

 

 

       [ 제 6일 - 8월 8일(수) ]

 

       이틀 밤을 자면서 낮과 밤으로 초원과 숲, 호수의 물과 별, 절벽과 오색 헝겊이 달린

     나무를 보며 원시에 가까운 자연을 맘껏 보았던 알혼섬을 떠나는 날이다. 연락선을 빨리

     타기 위하여 일찍 서둘러 아침 8시에 호텔을 떠났다. 그래서 선착순은 아니지만 비교적

     일찍 배를 타고 건너서 이르쿠츠크 쪽으로 이동했다.

 

       러시아산 미니버스 대신 한국산 관광버스를 타니 더 없이 좋다. 더구나 나는 어제

     점심 때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미니버스에 타서 이동 중에 하필이면 깜빡 졸고 있는데

     차가 심하게 흔들려 오른쪽 팔꿈치를 까였고, 약을 못 바른 채 하루 밤을 자니 그곳이

     쓰라렸다. 이것이 결국 덧나서 9일 귀국하자마자 피부과에 다녀왔으나 이글을 쓰고

     있는 12일에도 별 진전이 없다.

 

 

 

 

 

       선착장에서 이르쿠츠크 시내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으므로 ‘제독의 연인(2008)’이란

     한글 자막이 있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비디오를 틀기 전에 가이드가 간략하게 정리된

     지식을 사전에 이야기해 주었다. 그 중 에피소드는 라스푸틴이라는 요상한 수도승이

     리콜라이 2세의 아들 혈우병을 고쳐주고 신임을 얻어 국정을 농단해 로마노프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러시아 문화성이 후원하여 만든 것으로

     콜챠크제독과 그의 연인 안나의 관계를 제외하면 비케이투어가 소개한 내용과 같아

     그 내용을 요약해서 여기에 옮기면 다음과 같다.

 

       즉 전형적인 제정 러시아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콜챠크는 1894년 명문 해군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해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예리하고 과학적인 판단력과 강렬한

     애국심으로 뭉친 그는 43세의 젊은 나이에 제독으로 승진하였으나 1917년 2월 혁명에

     반발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인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10월 혁명의 소식을 듣고 모스크바로 가던 발길을 돌려 시베리아로 들어갔다.

 

       콜챠크는 지도자의 자질을 발휘하여 옴스크에서 백군을 조직하였다. 1918년 영국의

     지원 아래 시베리아 정부를 수립하고 육해군을 총괄하는 사령관이 되었으며 그 달

     러시아 국가 최고집정관에 올라 레닌의 붉은 군대와 맞섰다. 승전을 거듭하던 백군은

     내부 반란과 체코군의 배신으로 궁지에 몰리고 결국 적군에 의해 콜챠크는 체포되어

     이르쿠츠크에서 총살 당한다.

 

 

      * < 콜챠크 제독의 동상 >

 

 

       이것으로 사실상 영화의 내용은 끝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기 전에 우리 일행은 중간에

     현지식으로 점심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제공된 것은 부랴트족의 전통 만두였다.

     이후 이르쿠츠크로 1시간 반 이동하는 동안 남은 부분을 보면서 영화는 끝을 맺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본 것이 콜챠크의 동상이었다. 콜챠크가 죽은 후

     84년이 지난 2004년 죽었던 콜챠크가 그의 주검이 발견된 그 자리에 눈을 부릅뜬 모습

     의 동상으로 부활한 것이다. 마지막 황제 니꼴라이 2세를 복원시키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을 때, 이 동상이 세워지면서 콜챠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그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져서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다.

 

 

      * < 즈나멘스키 수도원 >

 

      * < 수도원 내부와 이노켄트대주교 묘 >

 

      * < 셀레호프(러시아의 콜럼버스)묘지 >

 

      * < 예카쩨리나 여사와 그의 3남매의 묘 >

 

 

       콜챠크의 동상 앞에는 시베리아에 현존하는 수도원 중 제일 훌륭한 건축물로 평가

     된다는 즈나멘스키 수도원이 있고, 우리 일행은 이를 구경했다. 이 수도원 안에는 성인

     반열에 오른 이노켄트 대주교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는데 수도원 내부의 데코레이션은

     엄청나게 화려했다. 수도원 안뜰에는 쿠릴섬과 알라스카 지역을 처음 탐험하여 국토의

     일부로 편입시킨 셀레호프의 무덤이 있는데 이 사람은 러시아의 콜럼버스로 불러진단다.

 

       이 수도원 뜰에는 데카브리스트들인 남편을 따라 맨 처음 이르쿠츠크에 온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예카쩨리나 여사의 묘도 있는데, 여사의 묘는 7남매 중

     3남매와 같이 있다. 여사는 19세기에 모스크바에서 황량했던 시베리아로 남편을

     따라 와서 교육의 씨를 뿌림으로써 오늘날에도 추앙을 받는다고 한다.

 

 

         * < 발콘스키(톨스토이 숙부) 기념관 >

 

         * < 실내에 있는 온실 >

 

         * < 그랜드피아노 >

 

 

       이어서 지금은 기념관이 된 발콘스키의 집을 방문했다.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

     대관식에서 봉기했던 600여 명 중 5명은 교수형, 일부는 이곳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1856년 사면 받을 때까지 이들은 주로 이르쿠츠크 일대에서 유형생활을 했다. 이들을

     따라왔던 부인과 약혼자들의 사랑 이야기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들어

     있고 영향을 주었다. 발콘스키와 마리아 부부, 위에서 잠간 나왔던 트루베츠코이와

     예카쩨리나 부부가 살았던 집은 기념관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발콘스키는 톨스토이의 숙부로, 유명한 소설인 ‘전쟁과 평화’의 모델이 된 사람이라고

     한다. 발콘스키의 집을 보면 당시의 귀족의 생활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1000여 평은 됨직한 대지 위에 3층 저택을 짓고 4가족이 살았다는 집에 방과

     가구와 악세사리는 대단했다. 예를 들면 마리아부인이 치던 피아노는 세계에서 두 대

     밖에 없는 수제 진품이란다. 마당에는 종들이 생활하던 별채가 따로 있었고 오늘날의

     코스요리가 이 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 < 피라미드피아노 >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 되어있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의 발콘스키 공작의 집에 있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피라미드 피아노(pyramidal piano). 18세기 말엽, 1700년대 끝무렵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피아노는 발콘스키 공작의 부인 마리야가 유배지 이르쿠츠크에서

     구입했다고한다. 19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내져 복원되어 돌아온 후 발콘스키의 집에

     전시되고 있다. 또한 이 집 1층 거실에는 유명한 리히텐탈(Lichtenthal) 피아노가 있다.

       벨기에의 거장 리히텐탈이 1831년 만든 그랜드 피아노다. 이 피아노는 1837년 마리야의

     오빠 알렉산더가 피아노를 잘치는 누이동생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리히텐탈 피아노는

     19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내져 세심한 복원 작업을 거쳐 1999년10월 발콘스키의 집

     거실에 놓여졌다. 이 널찍한 거실에서는 종종 시낭송회 등 문학 모임과 음악회가 열리고

     데카브리스트 시대의 음악을 듣기도 한다.

 

      * < 발콘스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계보 >

 

      * < 앙가라강변의 다리위에서 >

 

      * < 멀리 카자크 용사의 동상과 정교회가 보인다 >

 

      * < 2차 대전 참전 용사의 동상 >

 

      * < 앞은 시청 뒷편 승리의 광장, 뒤는 늙은 병사의 거리 >

 

 

       오후 4시 40분 경 안가라강가로 이동하였다. 일부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가이드가

     안내를 계속했는데, 다 돌아보고 나니 참 잘했다고 생각된다. 안가라강은 앞서서도

     말했지만 바이칼호에서 흘러나가는 유일한 물줄기로 길이는 약 1800km, 유역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큰 10.6만㎢나 된다. 상류에 건설된 댐을 거쳐 흘러오기 때문에

     이르쿠츠크시를 관통해 나가는 이 강물은 혹독한 시베리아 겨울추위에도 얼지 않는다.

 

       강변에는 카자크 용사의 동상, 제2차 대전 참전용사의 동상이 있다. 강변에서 주정부

     청사까지는 너른 공원 같은 길로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 늙은 군인의 다리를 거쳐 청사

     뒤편인 승리광장(추모광장)까지 이어진다. 이 광장에는 ‘베츠늬이 아곤’이라 부르는

     꺼지지않는 영원의 불이 계속 타고 있으며 청사건물 벽면에 전쟁 영웅들의 명단이 있다.

     제2차 대전 때에 이르쿠츠크 출신 참전 용사는 약 20만 명이었고 그 중 약 5만여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청사 앞은 시민의 공원으로 키로바광장이라 부른다.

 

 

      * < 시청 뒤 벽에 새겨진 2차 대전 참전용사 5만여 전사자 명단 >

 

      * < 가운데 꺼지지 않는 불꽃 `베츠늬이 아곤` >

 

      * < 시청 앞에 있는 개선문 >

 

      * < 러시아정교회 입구에 있는 종각 >

 

      * < 벽화가 있는 스파스카야 정교회 >

 

      * < 하나밖에 없는 카톨릭 성당 >

 

 

       1710년에 문을 연 스파스카야 교회는 석조 건물로 내부와 외부까지 벽화로 장식된

     문화재급 대형교회이다. 교회 동쪽 외벽에 3개의 주제로 된 큰 규모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이 교회의 종탑은 19세기에 별도로 세워졌는데 건너편에 러시아정교가 국교인데도

     카톨릭교회가 있다. 이 성당은 폴란드 정치범들의 유배지인 이곳에 이들이 버려지자

     자력으로 만든 시베리아 최초의 성당이라고 한다.

 

       버스로 이동하여 쇼핑할 수 있는 상가와 마트가 있는 나무집 마을 130번가로 갔다.

     시베리아산 잣, 꿀 등 특산품을 사기도 하고 규모가 제법 큰 마트에 가서 장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골라서 담았다. 우리보다 소득이 4분의 1 이어서 그런지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많이 저렴했다. 마트 안의 정리와 청결 상태도 좋았고 천정의 높이와 공간이

     여유로워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시원하게 보였다.

 

 

 

 

 

       이제 시베리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기 위하여 시베리아 전통 식당으로 갔다.

     러시아 돼지고기 꼬치구이[샤슬릭]가 주 메뉴인데 먼저 나온 음식을 먹다보니 양이

     많아서 내가 앉은 식탁의 8명 중에 샤슬릭을 다 먹어치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 음식은 원래 체첸공화국 전통식으로 그 나라는 양고기 꼬치를 만들어 먹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재료를 돼지고기로 할뿐 요리 방법은 같다. 자작나무 향과 소나무

     향이 어우러져서 기가 막힌 향을 낸다고 하는데 이미 포만감으로 가득차서 그런지

     잘 느끼지는 못하였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갈 무렵 공연이 시작되었다. 전통 러시아의상을 입은 나이든

     10여 명의 여인들이 시작을 하여 이들 보다는 젊거나 아주 젊은 여인 5~6명이 역시

     전통의상을 입고 손풍금을 든 나이든 남자 한명과 더불어 춤과 노래로 흥을 돋아주었다.

     우리가 식사를 마친 후에는 우리를 비롯한 두 팀의 손님과 이들이 함께 어울려서

     이벤트 행사를 했다. 어려서 보았던 남 남 남대문을 나와라. 동 동 동대문을 나와라

     하는 노래를 부르며 서로 손을 잡고 돌면서 선두가 사람 사이를 통과하는 놀이도

     했고 마지막은 손에 손을 잡고 다 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식당을 나오니 시베리아의 밤이 깊어 어둡다. 이어서 이르쿠츠크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대기하다가 23시55분(한국시간 8월 9일 0시 55분)발

     인천행 대한항공에 탑승하여 나른한 몸을 이코노석 작은 공간에 맡겼다.

 

       5박6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자정 넘어 탄 비행기 안에서 졸음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원시의 자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이르쿠츠크와 바이칼호였다. 그리고 춥고 황량한

     곳의 대명사인 시베리아가 이젠 아닌 것이다.

 

       시베리아에 실눈같이 박혀있는 보석 바이칼호, 이르쿠츠크시를 벗어나자마자

     나타나는 시베리아 타이가 숲 속에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 자라는 적송과 낙엽송

     그리고 그 사이에 군집을 이루는 숲 속의 미인 자작나무, 타이가 숲과 툰드라 경계

     지대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초원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수많은 꽃들이 모두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세계 제1의 담수호를 바라보며 열차 여행도 했고, 알혼섬의 원시에 가까운 환경과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는 부랴트족의 유물과 유적도 보았다. 인구 65만 명의 중도시

     이르쿠츠크는 추억이 깃든 멋진 명소가 많았고 오늘 날 러시아까지의 근현대사를

     품고 있었다. 동시대 공간에 공존할 수 없었던 역사 그러니까 데카브리스트와 그 후의

     2월혁명과 니콜라이 2세, 레닌의 적군과 콜챠크의 백군 그리고 정교회, 카자크 용사와

     신화를 간직한 원주민 등등이 지금의 이르쿠츠크에는 주민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고

     동상으로 남아있다.

 

       니콜라이 2세, 이노켄트 대주교, 레닌, 콜챠크, 카자크 용사,2차 대전 용사의

     동상들이 이제는 도시 안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되면서도 부러웠다.

     물론 소비에트 시절에 교회들이 인쇄소, 영화제작소, 빵공장, 집회소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가 현재의 러시아에서 다시 교회가 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기는 하다.

 

       함께한 26명의 우리 일행 모두가 서로 배려하며 지낸 일들이 고맙고,

     여행 일정 전반에 걸쳐 수고한 총무가 고맙고, 무릎에 자신 없어하던 아내가 전 일정을

     왕성하게 소화한 것도 고마웠다. 무엇보다도 우리 일행 모두에게는 계속 내일이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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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연주로 듣는 팝 명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