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대입구역에 도착하니 오후 2시 04분입니다.
오늘부터 30분이 당겨진 오후 3시에 한사모 걷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바빠졌습니다.
그런데도 이경환 회장님을 신호로 모두 일찍일찍 도착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흐뭇합니다.
하나 둘 셋... 인원을 점검해보니 40명 회원이 나오셨군요!
모두 식사를 하신다기에 더욱 고마웠습니다.
오늘 걷는 <한양도성 등짐길> 코스를 정리하여 알려드렸습니다.
369 마을 - 삼군부 총무당 - 장수마을 - 한양도성 낙산 정상 - 이화마을
- 한양도성 박물관- 백남준 기념관 - 진고개 식당 순입니다.
한양도성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때 내사산을 타원형으로 감싸
성을 쌓은 18.6km입니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백성 수 십 만명을
부역으로 동원하여 38일 만에 완공하였지요.
이 엄청난 무게의 돌을 첩첩히 그리고 빈틈없이 쌓아올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공사였을지 상상이 가지요?
커다란 돌 하나를 운반하는데 인부 여섯명이 힘을 합쳐야 했다지요?
작은 돌도 가득가득 담아 지게에 등짐을 지고 날랐을 백성들의
피땀어린 수고를 생각하여 <한양도성 등짐길>이라 불렀습니다.
369 마을입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행된 토지구획정리사업 당시
도시 빈민들이 성밖으로 밀려나면서 토막이 생기자
1950년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피난촌을 형성하였지요.
마을이름 369는 삼선6구역 재개발 추진과 다시 이를
주민의 의지로 해제한 것에 의미를 두어 만들었어요.
마을의 정체성, 주민의 주도와 화합,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드는 언덕 마을이라는 의미로 ‘三育丘’ 마을이라고도 해요.
서울시에서 마을 주택을 구입하여 주민들이 스스로 경제활동을 포함한
주민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주민공동운영시설을 만들었지요.
주민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앵커시설로
사랑방, 예술공방, 마실, 예술터 이렇게 4개가 조성되어
한성대학교와 연계하여 문화예술마을을 조성한대요.
한양도성 (漢陽都城)을 지나갑니다.
도성을 쌓느라 조상들의 희생이 많았던 서울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자리앉음새에 600년전 조성된 계획도시입니다.
서울성곽이라 불렸지만
2011년 공식적으로 한양도성으로 변경한 이유는 뭘까요?
단순히 전쟁에 대비한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두른 울타리이기 때문이지요.
삼군부 총무당 (三軍府總武堂)입니다.
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 청사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유형문화재 제37호이다.
원래는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는데 1930년 옮겨왔어요.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과 함께 고종 초에 세워졌지요.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八作) 기와집으로 중앙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광을 두었어요.
총무당 양쪽 옆에 덕의당· 청헌당이 있었는데,
덕의당은 그 당시에 없어지고,
청헌당은 육군사관학교 교정으로 옮겼답니다.
장수마을입니다.
서울의 근대적 서민 주거지의 모습을
여전히 담고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2004년 도시주거환경정비계획에 의해 삼선4구역으로 불리며
한양도성과 삼군부총무당 등 문화재가 인접해 있어
고층 공동주택으로 전면 철거 재개발이 어렵고
급한 경사로 인해 사업성이 떨어져서 마을이 방치되었어요.
낙산공원 확장공사로 마을 일부가 철거되어
공원이 되면서 주민 중심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면서,
재개발 아닌 대안개발 연구모임이 이루어졌어요.
삼선4구역이라는 이름 대신 어르신이 많이 사는 특성을 살려
장수마을이라는 주민이 정한 새이름으로 불려지며
재개발예정구역에서 해제되었지요.
기반시설 정비와 주택개량, 경관관리 등이 꾸준히 이루어집니다.
낙산(駱山) 정상에 올랐습니다.
한양의 좌청룡으로 산 모양이 낙타와 같아서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렸지요.
이화동과 동숭동, 창신동, 신설동, 보문동,
삼선동에 걸쳐 있으며, 높이는 125m랍니다.
오래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이 낙산 인근에 별장을 짓고 살았대요.
오늘은 저녁식사가 푸짐하여 간식을 가져오지 말라고 부탁드렸지만
어김없이 박화서표 인절미가 등장하자 모두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화벽화마을입니다.
낙산공원 바로 아래 이화동은 조선 시대 쌍계동(雙溪洞)이라 불렸으며,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던 도성 내 5대 명소 중 한 곳이었어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을 위한 고급 주택단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이화장 일대의
불량주택 개선을 목적으로 국민주택이 조성되었어요.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는 노후 방치된 지역의 정주 여건 개선을
위하여 복권기금을 이용한 도시예술 캠페인을 진행하였지요.
이화 벽화마을은 TV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사생활 침해를 일으킨다하여 사회적 관심을 받은 곳입니다.
9월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양도성 안쪽을 걸었습니다.
오래전 함께 이 노래를 함께 불렀던 송군자 선배님 생각이 났습니다.
세월은 가도 기억은 영원합니다.
배롱꽃잎 지는 소리
무궁화꽃 피는 소리......
9월의 길목은 꽃이 피고 지는 영원한 갈림길입니다.
한양도성 박물관입니다.
2014년 7월 개관하여 2016년 9월 새롭게 단장 재개관하였어요.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어요.
한양도성의 현재와 과거, 성벽에 남겨진 수많은 기억들,
한양도성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축소 모형과 영상을 보면
한양도성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요.
한양 천도와 수도 건설, 도성의 축조까지 한양도성의 탄생을 비롯한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모습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훼손되었지만 복원과 발굴, 개방 등의 한양도성의 격동의 세월이 보입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입니다.
보물 제1호로 지정된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때 건립되어
단종때 중수되었으며, 고종때 개축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같은 도성 내의 숭례문과 비교하여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거의
비슷하나, 남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옹성(甕城)이 뭐냐고요? 철옹성을 생각하시면 돼요.
성곽에 난 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에
담장을 한 겹 더 설치한 이중 성곽이지요.
창신동 백남준기념관에 들어섰습니다.
큰길가에서 65m만 들어가면 기념관이 있는데
표지석이 눈에 띄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눈에 띄는 예술적 디자인 안내표지판
설치에 인색한 이유가 뭘까요?
세계적인 현대예술가 백남준이 1937년에서 1950년까지 살았던 집터를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리모델링한 한 집입니다.
조그맣지만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갖가지 전시품과
신기한 작동을 하고 있는 희한합니다.
어릴때부터 끝없는 관찰과 호기심으로 음악 미술 문학 등
모든 분야를 예술로 끌어들여 세계를 놀라게 한 저력을 확인합니다.
진고개식당에 들어섰습니다.
대박 막걸리와 먹음직한 갈비탕을
앞에 놓고 건배를 했습니다.
<9월의 거리를> 하고 제가 먼저 소리하면
<걸으니 좋∼다>로 크게 답을 해 주셨습니다.
정말 좋으셨나요?
다음 주 제 531회 주말 걷기 인수인계가 있었습니다.
김영신(윤정자) 회원님이 한사모 깃발을 인수하셨습니다.
다음 주에는 4호선/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만나
국립중앙박물관과 용산가족공원을 둘러볼 예정이라고 합니다.
앞 뒤로 불쑥불쑥 신출귀몰하게 나타나셔서
사진을 찍어주신 이영균 사진위원님 수고하셨습니다.
큰 깃발을 들고 걸으시느라 애쓰신 장주익 회원님 고맙습니다.
한사모의 주말걷기는 일요일마다 계속될 것입니다.
치열함보다도 장엄한 걷기 역사를 오래오래 기록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