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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6월 23일 오늘의 성인

불꽃緝熙 2017. 6. 23. 17:10

    ♡6월 23일 오늘의 성인♡ ============== 성 란프랑코(Lanfranc) 축일 6월 23일 베카리아 가문 출신인 란프랑코는 롬바르디아(Lombardia) 파비아의 교외 마을인 그루펠로 태생이다. 천성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15년 동안의 주교 재임기간에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는 교회와 국가간의 알력 때문에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파비아 당국자는 교회 재산에 관한 시비로 인하여 주교관에 어떠한 음식물도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기에 그는 잠시 로마(Rome)로 갔다가, 다시 힘을 얻어서 교회와 국가간의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 후 그는 주교직을 사임하고 발롬브로사회에 들어가서 지냈다. ================================ 성 리베르토(Libert) 축일 6월 23일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 귀족 가문의 후손인 성 리베르투스(Libertus, 또는 리베르토)는 캉브레의 주교인 게라르두스(Gerardus)의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부제로 일하다가 삼촌이 서거한 1051년에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의 선임을 황제가 인가함으로써 그는 샬롱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랭스(Reims)에서 착좌하였다. 1054년 그는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으나 라오디체아에서 사라센인들이 성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많은 순례자들이 귀향하였으나 그는 계속하여 팔레스티나(Palestina)를 여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탄 배가 성지를 눈앞에 두고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귀향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거룩한 무덤’에 봉헌하는 성당과 수도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 성녀 마리아(Mary) 축일 6월 23일 니벨레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리아(Maria)는 자신의 소망을 수도생활에 두었으나, 부모들은 이미 좋은 신분에 있는 사람과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은 하되 훌륭한 일을 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때문에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은 금욕생활은 물론 집을 나환자 구호소로 만들었다. 이 젊은 부부는 최선을 다하여 환자들을 돌보았고 마리아는 철저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지켰고, 허름한 의상을 입었으며, 음식과 잠도 절약하였다. 또 대부분의 시간을 성당에서 지냈으며, 추운 겨울에도 맨땅에서 잠을 잤다. 이리하여 그녀의 높은 성덕은 차츰 알려지게 되었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날로 많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 얼마 전부터 독수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끼기 시작하여 남편의 동의하에 집을 떠났다. 그녀는 오와니에에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곁에 거처를 마련하고 엄격한 독수생활을 하니, 그녀에게는 수많은 기적과 환시까지 보게 되었다. 그녀는 현세에서 천상의 거주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금욕생활로 인하여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38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녀는 네덜란드 최고 신비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공경을 받는다. 야고보 데 비트리 추기경이 기록한 그녀의 전기에 의하면,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 신심이 형성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 성 베드로(Peter) 축일 6월 23일 잉글랜드(England) 사람이지만 샹파뉴의 쥴리에서 지냈던 성 베드로(Petrus)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양친을 잃은 뒤에 프랑스로 건너왔다. 파리(Paris)에서 계속 공부하던 그는 같은 영국인인 성 스테파누스 하딩 (Stephanus Harding)과 친구의 정을 맺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들을 봉헌하기로 작정하고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로마(Rome)를 순례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부르고뉴(Bourgogne)를 지나다가 그곳의 시토 수도원이 지극히 엄격하고 또 단순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몰레스메의 시토 수도원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스테파누스는 만족하였으나 베드로는 갈등을 느꼈는지 잠시 다른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수도복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성녀 훔벨리나(Humbelina)의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 성녀 아그리피나(Agrippina) 축일 6월 23일 시칠리아(Sicilia)에서 동정 순교자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성녀 아그리피나는 상류층의 딸로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사, 바울라 그리고 아가토니카 등 3명의 여인이 그녀의 유해를 시칠리아의 미네오로 옮겼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녀의 유해를 시칠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했다고 주장한다. 성녀 아그리피나는 악령을 쫓는 수호성인이며, 나환자와 폭풍우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 성녀 에텔드레다(Etheldreda) 축일 6월 23일 성녀 에텔드레다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국왕 안나(Anna)의 딸로서 잉글랜드(England) 남동부 서퍽(Suffolk)의 엑스닝(Exning)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그리비이의 왕자 톤버트(Tonbert)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이 결혼은 남편이 불과 3년 만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동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엘리 섬에서 5년을 살다가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오스위(Oswi) 왕의 아들인 에그프리두스(Egfridus)와 결혼하였다. 결혼생활 12년 후에 남편이 그녀에게 남편의 권리를 요구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은 이미 하느님께 봉헌한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의 동의를 얻어서 그녀는 엘리 섬으로 돌아갔으며, 672년경에 수도원을 세운 뒤 원장으로 지내면서 일생을 봉헌된 생활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에딜트루데(Ediltrudis) 또는 오드리(Audrey)로도 불린다. ================================ 성 요셉 카파소(Joseph Cafasso) 축일 6월 23일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가 살레시오회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 (Joannes Bosco)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교구사제였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카스텔누오보 다스티 (Castelnuovo d'Asti)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Torino) 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그는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그리고 성 요한 보스코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세니즘(Jansenism)을 퇴치토록 하였다. 또 그는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이기도 하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다. 그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 (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요한(John) 축일 6월 23일 로마의 사제 성 요한(Joannes)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머리 유해는 로마에 있는 영국 교회인 산실베스트로(San Silvestro)에 세례자 요한의 머리로 모셔져 있는데, 로마의 사제 성 요한의 유해인 것이 더 확실하다. 그의 순교에 대해 기적과 예언을 포함한 몇 가지 전설들이 기록되어 있다. ================================ 성 제노(Zeno) 성 제나(Zenas) 축일 6월 23일 성 제노(Zeno)와 성 제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참수되었다. 성 제노는 사해 부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의 부유한 시민이었다. 그리고 성 제나는 그가 자유를 준 노예 중 한 명으로 그를 떠나지 않고 함께 머물렀었다. ================================ 성 토마스 가넷(Thomas Garnet) 축일 6월 23일 성 토마스 가넷은 유명한 예수회원인 헨리 가넷(Henry Garnet) 신부의 조카로서 16세 때에 프랑스의 생토메르(Saint Omer) 대학에 들어갔다. 1595년 그는 몇몇 학생들과 더불어 에스파냐로 건너가서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영국계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여기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된 후 마르코 바크워스(Mark Barkworth)와 더불어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의 영국 선교는 다음의 몇 마디로 요약 될 수 있다. “나는 오류를 벗어나 가톨릭 교회 지식을 배우려는 영혼들을 찾아서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하였다.” 그는 워릭(Warwick)에서 체포되어 9개월 후에 플랑드르(Flandre)로 추방되었으나 재차 입국하였다. 이때 그는 예수회원이 되고자 벨기에 루뱅(Louvain)으로 가서 서원한 뒤 또 재입국하였으나, 어느 배교자의 제보에 따라 체포되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 성 토마스 코르시니(Thomas Corsini) 축일 6월 23일 토마스 코르시니는 이탈리아 오르비에토(Orvieto) 사람이며,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 환시를 봄으로써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 환시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의 보호 아래 싸우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성모의 종 수도회의 평수사가 되었는데 사제직을 권했지만 자신은 자격이 부족하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그는 주로 걸식을 하며 지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초자연적 은혜와 선물이 풍부하여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 성 펠릭스(Felix) 축일 6월 23일 성 펠릭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사제로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