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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6월 22일 오늘의 성인

불꽃緝熙 2017. 6. 22. 13:25

    ♡6월 22일 오늘의 성인♡ ============== 성 니체타(Nicetas) 축일 6월 22일 놀라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와 가까운 친구인 성 니케타(또는 니체타)는 다치아의 레메시아나 (지금의 루마니아)의 주교였다. 그러나 그는 베시인들에게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 주교로 유명하고, 또 그의 시 역시 루마니아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저서를 비롯하여 전례용 성가를 남겼으며, 많은 학자들은 ‘테 데움’(Te Deum)의 저자라고 믿고 있다. 이전에는 1월 7일에 축일을 지냈다. ================================ 성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바울리누스 (Meropius Pontius Paulinus, 또는 바울리노) 축일 6월 22일 성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바울리누스 (Meropius Pontius Paulinus, 또는 바울리노)는 로마(Rome)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하였고, 시와 수사학은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이었던 데치무스 막누스 아우소니우스 (Decimus Magnus Ausonius)로부터 배웠다. 그의 부친은 갈리아(Gallia)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법률가로 성장하여 여러 관직을 맡았고 골, 이탈리아 그리고 에스파냐 등지를 여행하였으며, 에스파냐 여자인 테라시아(Therasia)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르도의 주교 델피누스를 만난 후 영세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공직에서 물러나 아키텐 (Aquitaine)으로 은거하였다. 390년 그는 에스파냐에 있는 아내의 영지로 이사했는데, 그 당시에 외아들이 죽음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하고 자신은 아주 엄격한 삶을 시작하였다. 393년경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바르셀로나 (Barcelona)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자 바울리누스 신부는 나폴리(Napoli) 근교인 놀라의 성 펠릭스 무덤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폰디에는 성당을, 놀라에는 수로(水路)를 그리고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던 자신의 집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하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그는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ius),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등 수없는 명사들이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51편의 편지, 32편의 시 등이 있다. 그는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 놀라의 성 빠울리노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3ad Alypium, 1. 5.6: CSEL 29, 13-14. 17-18)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 당신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복되며 지극히 사랑하는 주교님, 귀하는 보잘것 없는 나에게 진실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카르타고에서 돌아온 우리 조카 줄리앙을 통하여 귀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귀하의 탁월한 덕행을 잘 드러내 주어, 내가 귀하의 사랑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틀림없이 세상 시초부터 우리를 예정하신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그분 안에 있었습니다. 미래에 성취해야 할 모든 것도 그분이 지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견과 권능으로 우리는 동일한 의지와 신앙의 일치 또는 일치의 신앙을 갖도록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연결되고 영의 계시를 통하여 마주 보기 전에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서나 유일한 분이신 주님께서 모든 이에게 부어주신 성령으로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서 당신 사랑을 역사하시는 데 대해 우리는 주님께 감사 드리고 찬미 드립니다. 이렇게 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강물로부터 당신 도성을 기쁘게 하셨고 이 도성의 시민들 위에 "당신 백성의 으뜸으로" 귀하를 선택하시어 주교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구부러진 나를 바로 세우시고 미천한 나를 땅에서 끌어올리시어 귀하과 같은 지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하는 것은 그분이 귀하의 마음에다 내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시고 귀하와 밀접히 일치시켜 귀하가 나에 대해 지닌 그 사랑의 확신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귀하가 베풀어 준 배려와 호의를 볼 때 나로서는 귀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데 주저하거나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귀하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내 사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에 불쌍한 죄인이었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생명의 공기를 호흡하기 시작하고 쟁기를 잡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귀하는 기도로써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어 내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면 귀하의 공로에 상급을 더할 것입니다. 고통중에 있는 이를- 나는 감히 귀하의 형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와주는 거룩한 사람은 "큰 도성처럼 드높여질 것입니다." 나뉨이 없으신 삼위 일체의 일치와 우리 간의 일치의 표시로 귀하에게 빵 한 개를 보내 드립니다. 귀하가 그것을 드신다면 그 빵은 "에울로기아"(축성된 빵)가 될 것입니다. ================================ 성 알바노(Alban) 축일 6월 22일 성 알바누스(Albanus, 또는 알바노)는 영국 본토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그는 로마노-브리튼 사람으로 베를라미움에 살았는데, 이 도시는 지금 그의 이름을 따서 세인트 알반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그는 도망해 온 신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다가, 그 자신이 체포되어 초자연적인 빛을 발하면서 순교하였다. 성 베다(Beda) 존자의 기록에 의하면 알바누스가 참수를 당할 때 하늘에서 기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고 전한다. 순교의 전설적인 곳은 홀머르스트 힐인데, 이곳에는 성 베다의 성당과 경당이 세워진 곳이다. ================================ 성 에베르하르도(Eberhard) 축일 6월 22일 성 에베르하르두스(Eberhardus, 또는 에베르하르도)는 어느 신심 깊은 귀부인의 아들로 독일 바이에른 (Bayern)의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태어났다. 베네딕토 수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 그는 밤베르크(Bamberg) 대성당의 성직록을 받았으나, 즉시 이를 사임하고 성 미카엘 산의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교회 당국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파리(Paris)로 보내어 더 높은 학업을 연마토록 하였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그는 교회 당국의 허가를 받아 프뤼페닝 (Pruffening)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원장이 되었다. 그의 신심과 지혜는 이 수도원에 영적인 열기를 불어 넣었다. 또한 그의 덕과 능력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잘츠부르크의 주교좌를 맡게 하였다. 그는 교구민들의 윤리적 자질 향상을 위하여 정열을 바쳤으며, 교구 내에 만연되어 있던 성직자들의 월권행위들을 강력히 규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베르하르두스 성인은 두 번의 시노드를 개최하고, 특히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널리 보급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만년에 그는 교구를 여행하면서 평화를 심는 사람으로 활약하다가 라인(Rhein)의 시토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 성 요한(John) 축일 6월 22일 성 요한(Joannes)은 이탈리아 나폴리의 주교로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9월 19일)의 유해를 포추올리(Pozzuoli)에서 나폴리로 이장하였다. ================================ 성 요한(John) 축일 6월 22일 이탈리아 나폴리의 주교인 성 요한(Joannes)은 '평화의 조정자'로 알려졌다. 그는 나폴리의 수호성인 중의 한 분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 성 요한 피셔(John Fisher) 축일 6월 22일 1459년 영국 잉글랜드(England)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y)에서 어느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는 14세 때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특별 관면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497년 그는 국왕의 모친인 마가렛의 고해신부로 활약하는 한편, 마가렛으로 하여금 케임브리지 대학에 큰 공헌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1504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장이 되고 이어서 로체스터의 주교, 추기경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혼란한 정치 풍토로 인하여 순교하게 되었다. 헨리 8세 왕이 수장령을 반포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 친구와 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을 지켰다.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의 양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늘 휴대하던 작은 성경책을 들고 힘 있는 발걸음으로 런던탑으로 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 성 인노첸시오 5세(Innocent V) 축일 6월 22일 프랑스의 타랑테즈-앙-포레스 출신으로 타랑테즈(Tarentaise)의 베드로(Petrus)라고도 알려진 복자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또는 인노첸시오)는 16세 때에 작센(Sachsen)의 성 요르단(Jordan)의 지도하에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1259년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는 곧 유명한 신학자이자 설교자로 명성을 얻었고, 그의 친구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를 포함하는 연구위원회 원장을 맡았다. 37세 때 그는 설교자회의 프랑스 관구장이 되면서부터 휘하에 있는 모든 수도원을 도보로 방문했고, 토마스 데 아퀴노를 파리 대학에 부임시켰다. 1272년에는 리옹(Lyon)의 대주교, 또 다음 해에는 오스티아(Ostia)의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뛰어나고 적극적인 교황 대리자로 활약하였고, 그리스 이교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활동을 하였다. 1276년 1월 21일 그는 도미니코 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재임기간은 불과 5개월에 지나지 않았으나 궬프와 기벨리네파를 화해시키고, 피사(Pisa)와 루카(Lucca) 간의 평화를 회복시켰으며, 루돌프와 앙주(Anjou)의 찰스의 중재자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리옹 공의회(Council of Lyon)를 통하여 비잔틴과의 재일치를 모색하다가 갑자기 선종하였다. ================================ 성녀 콘소르시아(Consortia) 축일 6월 22일 성녀 콘소르티아(또는 콘소르시아)는 프랑스 왕 클로테르 1세(Clotaire)의 죽어가는 딸을 기적적으로 치유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왕이 기증한 수녀원의 원장이었다. 그녀는 클뤼니(Cluny) 수도회에서 오랫동안 공경을 받아 왔는데, 그녀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없다. ================================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축일 6월 22일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 (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 (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 (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 (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 (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 성 토마스 모어가 옥중에서 자기 딸 마르가리따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English Works of Sir Thomas More, London, 1557, p.1454) 하느님께 내 모든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맡기겠다 내 사랑하는 마르가리따야, 내 지난 날의 죄를 볼 때 나는 하느님께로 부터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몸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다 내 신뢰를 걸고 또 마음을 다하여 희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은 나를 굳세게 해주시어 나로 하여금 양심을 거슬러 서약하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재물과 토지와 생명마저 잃을 수 있게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또 국왕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어 아직은 나에게서 자유만을 빼앗도록 하셨다. 이 자유를 나에게서 거두실 때 하느님께서는 이제까지 내 신앙을 북돋아 주시고자 그토록 허다하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커다한 영적 은혜들 가운데서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토록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불신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국왕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대하게 하시어 그가 나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의 죄 때문에 응당히 받아야 할 것 이상으로 고통받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의 은총이 나로 하여금 인내의 마음으로 그리고 어쩌면 기쁜 마음으로까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실 것이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고통을 잘 참아 낸다면 이것을 내 인내심의 공로를 훨씬 초월하는 주님의 쓰라린 수난의 공로와 결합시키시어, 내가 연옥에서 당할 고통을 줄여 주시고 천상에서 받을 상급을 늘려 주실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내 비록 허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지만, 절대로 하느님을 불신하지 않겠다. 나를 쓰러뜨릴 정도의 두려움을 내가 느끼어 되어도 성 베드로에게 생긴 일을 기억하겠다. 돌풍이 일자 약한 믿음 때문에 물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한 그가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도움을 간구한 것처럼 나도 그를 본받아 그리스도께 간구하겠다.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손을 뻗치시어 폭풍에 휩싸인 이 바다에서 나를 붙들어 올리시어 물에 빠져 들지 않게 하시리라. 그런데 내가 베드로를 답습하여 나도 그처럼 유혹에 넘어져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게 된다면, (하느님의 자비는 내가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혹시라도 빠진다면 유익보다는 해가 되게 해주기를) 그때에도 베드로를 인자하게 굽어보신 것처럼 나도 연민에 찬 시선으로 굽어보시고 다시 일으키시어 내 양심의 진실을 다시금 고백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내 잘못에 대한 수치와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여하튼 나는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께서는 내 잘못이 아니라면 결코 버림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실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맡기겠다. 그러나 내 잘못 때문에 버림받은 자 된다 해도 이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찬미와 영광이 될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이 너그러우신 자비는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하시고 내가 그 자비를 찬미할 수 있게 해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이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내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에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생길 수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겉보기에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 성 플라비오 클레멘스(Flavius Clement) 축일 6월 22일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또는 플라비오 클레멘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형제로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삼촌이었다. 그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질녀인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5월 12일)와 결혼하였다. 95년 로마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이듬해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었던 셩녀 플라비아 도미틸라 역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 신자라는 죄목으로 가예타(Gaeta) 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판다타리아(Pandataria) 섬으로 추방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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