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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일 배우기

불꽃緝熙 2015. 4. 2. 08:16

엘리야와 함께 걷는 40일

제 39일 배우기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였

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을 떠나 걷다가, 엘리야가 엘리사에

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아있어라. 주님께서 베텔까지 나를 보

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스승

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베텔로 내려갔다. 베텔에 있

던 예언자 무리가 엘리사에게 나와서 물었다. "주님께서 오늘 당

신의 주인님을 당신에게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알고 계십니

까?" 그가 대답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엘리

야가 또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아있어라. 주님께서

나를 예리코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

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예리코로 내

려갔다. 예리코에 있던 예언자 무리가 엘리사에게 다가와서 물었

다. "주님께서 오늘 당신의 주인님을 당신에게서 데려가려고 하

시는데 알고 계십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

용히 하시오."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

아있어라. 주님께서 나를 요르단 강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

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함께 떠났다. 예언자들의 무리 가운데 쉰 명이 그

들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요르단 강가에 멈추어 서자, 그들도

멀찍이 떨어져 멈추어 섰다.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

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

게 해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

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주십시오."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

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

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는그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자기 옷을 움켜쥐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

고 되돌아와 요르단 강가에 섰다. 그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

옷을 잡고 강물을 치면서,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

신가?" 하고 말하였다. 엘리사가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엘리사가 강을 건너는데 예리코에서 온 예언

자 무리가 멀리서 그를 보고,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내렸구

나" 하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엘리사를 맞으러 나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여기 당신 종들에게 장

정 쉰 명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님을 찾게 하

십시오. 어쩌면 주님의 영이 그를 들어다가, 어떤 산 위나 어떤 골

짜기에 내던졌을지도 모릅니다." 엘리사는 "아니, 보내지 마시오."

하였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들이 졸라대는 바람에, "그럼, 보

내시오." 하고 허락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쉰 명을 보내어 사흘

동안 찾았으나 그를 찾아내지 못하고, 예리코에 머물러 있는 엘

리사에게 돌아왔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2열왕 2,1 - 18>

엘리야가 세상을 떠나는 이 장면은 얼마나 극적인지요! 그러면서도 암시와 비밀로 가득합니다.

엘리야는 이런 결정적인 조치가 기다리고 있을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엘리야는 이 길을 혼자 가길 원했습니다.

인생에서 늘 그랬듯 홀로,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가 광야로 달아났을 때의

그 시종처럼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처럼 독자적인 투사였기에 주변에 예언자 제자들 무리가 모여듭니다.

엘리사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엘리야는 떼어놓으려 애씁니다.

하느님의 비밀스런 임무를 이유로 대지만, 이에 대해서는 기록도 없고

엘리야가 이행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를 떼어놓기 위한 변명에 불과할까요?

엘리야는 세 번 시도하고, 엘리사는 똑같은 맹세의 말로 세 번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엘리사는 이 말로써 엘리야를 하느님 편에 세우고 엘리야가 아직 살아있음을

자신과 엘리야에게 확인시키려는 듯 보입니다.

그러다가 요르단에 이르자 예언자의 겉옷이 다시 등장합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갈라집니다.

이 모습은 이집트를 벗어나 자유를 향해 탈출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탈출 14,19-31) 또 요르단을 지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동할 때, 물이 갈라지면서 마른 땅을 밟고 건너는 장면도 떠오릅니다. (여호3장)

엘리야도 자유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인가요?

엘리사는 여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꽉 붙잡고 있습니다.

엘리사에게 뭔가 주어야만 떨어져 나가리란 걸 엘리야도 아는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떠나기 전에 엘리사의 청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그러나 떠나지 말아달라는 청은 배제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 영의 두 몫을 받게 해달라고 청하는데, 이는 다른 아들들보다

두 배 더 받는 맏아들의 몫입니다.(신명 21,17) 엘리야는 단호하고 경고합니다.

엘리야의 영을 받고 후계자가 되는 건 쉽지 않은 데다 위험하며,

엘리야는 이 소원을 조건과 연결짓는 듯합니다.

하느님이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걸 엘리사가 보면 영을 받을 수 있지만,

엘리사가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후계자가 될 능력이 없다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시험인 셈입니다.

계속 걸어가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일이 벌어집니다.

불 병거가 불 말과 함께 나타난서 두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구약성서학자인 프랑크 크뤼제만은 성경의 원본 1절에서는 엘리야가 '간다'고 단수형으로

표현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엘리사는 그냥 추가로 거론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두 번의 경우는 동사 '간다'가 복수형으로 나오고, 마침내 '두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언급됩니다. 이제 이들은 '함께' 간다고 나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 쪽으로 점점 더 '밀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종'에서 '예언자'가 되고, 새 역할에 걸맞은 동료로 성장하는 듯합니다.

그래야만 엘리사는 엘리야의 참된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완전한 영'을 받지 못하고 그저 한 몫만을 받게 된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받으려면 엘리사는 그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맏아들도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유산을 받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한, 그 힘으로만 삽니다.

내가 놓지 않고서 능력의 몫을 청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청을 통해 엘리야에게 가도 좋다고 승낙하고, 더는 붙잡지 않고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네가 나를 붙잡고 있는 한,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 너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고.

[덧붙이자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작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이것이 엘리야 이야기에서 이 단락이 주는 본래의 메시지인지도 모릅니다.

엘리야의 '승천'에 주안점을 둔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 대신

"들어 올리셨을 때"가 되었겠지요. '승천' 자체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된 목적이 아니라

그저 '시간'을 나타내는 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붙잡음과 내려놓음에 관해,

또 삶과 죽음에 관해 들려주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에 의해 삶의 다양한 처소로 보내집니다.

크릿 시내로, 사렙타의 과부에게로, 아합 왕에게로.

거기에서 엘리야는 고독의 시간, 관계의 시간, 공개적 활동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다시 내려놓고, 새로운 것에 자신을 맞추고 적응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마저도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옛것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새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엘리사가 참된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교훈입니다.

엘리사는 이 교훈을 배웠습니다.

엘리사는 이를 수락하고 엘리야를 데려가시는 걸 지켜봅니다.

바로 그 순간 엘리야의 힘이 엘리사에게 옮겨갑니다.

이에 대한 징표로 엘리사는 예언자의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서 생명으로, 사람들에게로 돌아갑니다.

엘리사가 자기 옷을 움켜쥐고 찢는 슬픔의 순간이 있었지만 슬픔에 빠져있지 않고 되돌아 옵니다.

그러고는 예언자의 겉옷을 잡고 강물을 치면서 하느님을 부릅니다.

엘리사는 대답을 기다리며 묻습니다.

물이 갈라지고, 엘리사는 건너갑니다. 엘리야의 힘이 엘리사에게 옮겨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대답입니다.

예언자들의 무리도 이를 지켜봅니다.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내렸구나."

지금까지 구경꾼이던 이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일을 입밖에 내어 말함으로써

엘리사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또 엘리사를 조르면서 자기들이 엘리야를 찾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합니다. (아니면 자신들도 현장에 있었음을 굳이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엘리야는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곤 했습니다.

열심히 찾다 보면 엘리야는 발견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엘리야를 찾지 못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예언하는 건 대단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엘리사가 이를 알고 있다는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엘리사의 예언이 적중하면서 엘리사의 지위도 더 확고해집니다.

새롭게 되도록 내려놓는 것, 이 주제로 책을 새로 써도 될 정도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생의 계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여, 이별을 고하고 건강히 지내게!"

인생에서 우리는 늘 뭔가 내려놓고 벗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새롭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이별은 마지막에 오는 커다란 내려놓음, 곧 죽음을 향한 연습니다.

이 모든 이별과 함께 새로운 것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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