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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일 (파스카 삼일) 본문
성삼일 (파스카 삼일)
“주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가톨릭에서 1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인 성삼일(파스카 삼일)을 지낸다. 사순시기의 마지막 관문인 성삼일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동시에 사순 저금통·사랑의 쌀 한줌 모으기 등 사순시기에 실천해 온 이웃사랑의 결실을 모아 봉헌하는 기간이다.
성삼일(聖三日, Easter Triduum, Holy Triduum, Paschal Triduum, Sacred triduum)의 유래
인류의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구약성경에 누차 예언된 하느님의 계획이었다. 그 예언대로 예수는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파스카Pascha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갔다.
유대교 대사제들의 음모와 제자 유다의 배반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전날 저녁, 예수와 열두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나눈다.
이때 예수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내어줄 몸과 피”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떼어주었으며, 그들의 발을 씻김으로써 겸손의 모범을 보였다.
가톨릭 신자들이 하는 영성체나 성목요일의 발씻김 예식(세족례)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예정된 죽음을 거두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비는 기도였다.
마침내 안식일(오늘날의 토요일) 전날 새벽 예수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고, 정치범들의 사형도구였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한다.
예수가 부활한 날은 그로부터 사흘째, 곧 안식일 다음날(일요일)이다. 주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함으로써,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고 죄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인류는 빛과 구원의 세계로 건너가게(파스카, Pascha)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 예수가 부활한 이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로 지낸다.
성삼일 전례: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72시간의 여정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고 부활의 전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성삼일 전례는 전 세계 모든 성당에서 똑같이 거행되며, 신심 깊은 신자들은 성삼일 전례와 묵상기도를 특화시킨 3박 4일 성삼일 전례피정에 참가하기도 한다.
교황청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이 사흘간의 전례를 매년 전 세계에 위성중계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마태오 복음서 26장 26-29절)을 기념하는 이날 사제는 신자들의 발을 씻기는 ‘발씻김 예식’(세족례)을 한다.
이 예식은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요한 복음서 13장의 기록에 근거한다. 당시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어”(요한 복음서 13장 1절) 인간을 섬겼듯이, 하느님의 종인 사제들도 몸과 마음을 낮추고 신자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의 몸인 성체가 밖에 따로 마련된 ‘수난 감실(受難龕室)’에 도착하면 밤샘기도(성체조배)가 시작된다.
이 기도는 죽음을 앞둔 예수의 번민과 고통에 동참하려는 것으로, 성금요일 예식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된다.
성당마다 신자들이 교대로 드나들며 밤새도록 불을 켜고 기도하는 모습은 이날에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예수가 숨을 거둔 오후 3시 무렵 사제와 신자들은 조용히 성당에 모여 예수의 수난기를 읽고 기도한다.
이어 십자가 경배 때 사제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라는 노래로 그리스도교의 대표 상징인 십자가에 경의를 표한다.
영광의 구세주가 참혹한 수난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예수의 으뜸 제자였던 베드로 역시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듣자마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반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날 때부터 마구간의 여물통에 몸을 누인 겸손의 인간이었고,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써 가장 비천한 사람까지 끌어안는 만인의 구원자가 되었다.
죽음의 도구인 십자가가 생명의 표지가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는 동안 미사를 비롯한 모든 예식이 중단된다. 이 침묵은 성토요일의 해가 지고 어둠이 빛을 기다릴 때까지 계속된다. 세례 받던 날의 첫마음으로 돌아가는 때다.
부활 대축일이 토요일 밤에 시작되는 이유는 일몰(日沒)을 새로운 하루의 시작으로 보던 이스라엘의 전통에 있다.
이날은 전통적으로 예비신자들이 세례를 받는 날이지만, 세례식을 하지 않더라도 신자들은 자신이 세례 받던 그날처럼 초를 들고 어두컴컴한 성당에 모인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빛을 상징하는 부활초에 불을 붙이고, 신자들은 부활초의 불씨를 각자의 초에 나누어 붙이며 어둠을 밝힌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이다. 하느님의 인도로 이루어진 이 구약의 파스카는 예수의 부활, 곧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한 신약의 파스카를 예시(豫示)한다.
인류 구원에 관한 9개 텍스트(독서)를 차례대로 읽는 동안 성당 안은 점점 밝아진다. 성가대는 사순시기 동안 삼갔던 기쁨의 노래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웅장하게 노래하고, 신자들은 빛 속에서 세례서약을 갱신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긴다.
예수 부활 대축일은 다음날인 주일 저녁까지 계속되며, 부활 축제(부활시기)는 이날로부터 성령강림 대축일까지 50일간 이어진다.
* 용어 풀이
‘건너가다’(pass)라는 뜻의 라틴어.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과월절을 가리키는 말로,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출애굽)에서 유래했다.
구약성경의 탈출기 12장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이집트 겨레의 모든 맏아들을 죽이실 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겨레의 집은 천사가 피해서 지나갔다고 한다.
이집트 전역을 덮친 맏아들의 죽음은 파라오가 이스라엘 겨레를 놓아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파스카 삼일’은 한국 천주교에서 성목요일에서 예수 부활 대축일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이나, 이 자료에서는 내용 이해의 편의상 ‘성삼일’로 적는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옴을 기념하며 경축하는 날. 사도행전 2장에 따르면 “오순절에 하늘로부터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으니, 제자들은 모두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성령강림 사건에서 비롯됐다.
오순절(Pentecost)의 ‘50’은 50일을 뜻한다. 오순절은 과월절(파스카)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교회는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강림 대축일까지 50일을 부활시기(부활 축제 기간)로 지낸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
성 목요일 저녁에 드리는 주님 만찬 미사는 예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음을 기념하는 미사로, 남을 위해 부서지고 나누어지는 성찬례의 신비를 드러낸다.
특히 이날 미사에서는 사목의 이유로 필요하다면 강론 뒤 발씻김(세족례)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본받아 선발된 신자들의 발을 씻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면서 남기신 사랑의 계명을 되새겨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뜻을 가르치는 예식이다.
영성체 후에는 성체를 본 감실에 모시지 않고 비워둔 채 수난감실로 옮겨 모시며 본 제대를 벗기고 성당 안에 있는 모든 십자가는 가리워진다.
그리고 신자들은 성 금요일 수난 예절까지 밤새워 성체조배를 하며 죽음을 앞둔 예수의 고통에 동참한다.
⊙ 발씻김 예식
미사 중에 기념하는 신비, 곧 성체성사와 성품성사 제정과 형제적 사랑의 새 계명을 설명하는 강론이 끝난 다음에, 발씻김 예식을 거행 한다. 선발된 이들이 준비된 자리로 나오면, 사제가 각 사람의 발에 물을 붓고 수건으로 닦는다.
요한 13,1-15의 성서구절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가장 내밀한 자세, 즉 다스리지 않으시고 봉사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당시 사회풍습으로 보아 집의 손님들에게 하인들이 하는 발을 씻기는 일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것은 인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도록 끝이 없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지인 것이다.
발을 씻는 예식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그 상징적 행위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을 중요시하고, 이 사랑을 여러 가지 다양하고 시대에 맞는 봉사를 통하여 이웃에게 실천한다면 교회는 성서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주님의 표지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4세기에 벌써 로마를 제외한 서방에서는 이 세족례가 세례 예식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로마 전례의 확산으로 인해서 세족례가 서서히 사라진 후에 수도원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수도원 식구들에게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이 예식이 다시 살아났다.
톨레도(Toledo) 공의회(694)는 스페인과 갈리아 모든 교회에서 성목요일에 이 장엄한 예식이 거행되어야 한다고 단호히 요구한다.
모든 주교와 사제는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자기 수하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성체를 옮겨 모심
영성체 후 기도가 끝난 다음, 성금요일 전례를 위하여 미리 축성된 성체는 화려한 행렬 가운데 수난감실로 모셔지고 이때 제대 장식은 벗긴다. 이어지는 성체공경(성체조배)은 가능한 한 보존되어야 한다. 물론 자정부터는 어떠한 화려함도 피해야 한다. 이 풍습은 2세기까지 소급하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미 리옹의 이레네오(200년경 순교)는 많은 사람들이 부활 전 40시간, 그러니까 예수께서 무덤 안에 계신 시간 동안 단식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점은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 증명된다.
1. 영성체 후 기도를 바치고, 사제는 제대 앞에 서서 향로에 향을 넣은 다음 성체께 세 번 분향하고 어깨보(humerale)로 성합을 감싸 든다. 2. 십자가를 앞세우고 촛불과 향을 들고 행렬하여 품위 있게 꾸민 수난 감실로 성체를 옮겨 모신다. 행렬하는 동안 “Pange lingua”(마지막 두 절은 남기고)나 다른 성체 노래를 부른다. 3. 수난 감실에 이르러 사제는 성체를 모셔 놓고 무릎 꿇어 분향한다. 그동안 마지막 두 절 “Tantum ergo”를 노래한다. 그다음에 감실 문을 닫는다. 4. 침묵 가운데 잠시 기도하고, 사제는 복사들과 함께 무릎 꿇어 절한 다음, 제의방으로 돌아간다. 5. 다음에 제대포를 벗기고 십자가를 성당에서 밖으로 내간다. 성당 안에 십자가를 그대로 두려면 천으로 가려야 한다. 6. 저녁 미사에 참여한 성직자는 저녁 기도(Vesperae)를 바치지 않는다. 7. 교우들이 밤중에 성체 조배를 하도록 권고한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면 소박한 분위기에서 조배를 한다.
⊙ 성체 조배
성체를 모셔 두는 장소는 기도와 묵상의 분위기가 이루어지도록 마련하되,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은 삼가고 파스카 삼일 전례에 맞게 꾸민다. 성체는 감실이나 성합에 모시고 문을 잠가야 하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성체를 성광에 모시어 내보이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후에 숨을 거두셨기 때문에 이 감실은 ‘무덤’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무덤’이라는 표현도 해서는 안 된다. 수난 감실은 ‘주님의 묻히심’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성금요일의 성체 분배와 병자들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 두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 마르 14,37)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파스카의 신비를 묵상하며 주님 앞에 머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교우들은 성체 앞에서 밤 동안 적당한 시간에 조배하며, 자정이 지나면 외적인 장식 없이 조배한다. 주님 수난의 날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통적으로 이날은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는다. 대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그리고 영성체 예식만 거행한다. 본디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말씀 전례만 있었다. 그러다 차츰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도입되어 오늘의 전례로 고정되었다. 전례 개혁 이전에는 집전 사제만 성체를 모셨지만, 1955년 전례 개혁 이후로는 모든 교우에게 영성체가 허용되었다.
오늘은 금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날 온갖 모욕과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라 죽음의 산 골고타에 오르고 하느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물로 죽고 마침내 죽음을 이기기 위해 땅 속에 묻히신다. 그래서 이날 모든 신자들은 금육과 금식을 한다.
이날은 교회가 미사를 드리지 않는 유일한 날이다. 미사 뿐만 아니라 다른 성사도 집행하지 않는데 이는 성사가 그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에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다.
⊙ 주님 수난 예식
이날 오후 3시나 저녁에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1부 말씀의 전례와 2부 십자가 경배, 3부 영성체 등 세 부분으로 진행된다. 수난예식에서는 말씀의 전례를 통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결국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임을 깨닫게 하며, 십자가 경배는 사제가 보로 가린 십자가를 들고 나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제나 부제, 성가대가 제대 앞에 서서 십자가 머리부분을 벗겨 높이 들고 ‘보라 십자나무(Ecce lignum)’를 노래하면, 모든 이는 ‘모두 와서(Venite adoremus)’로 화답한다. 이 노래가 끝나면 모두 무릎을 꿇거나 머리 숙여 잠시 경배한다. 십자가 경배는 성직자, 수도자, 복사, 평신도 순으로 하며, 십자가에 입을 맞출 수도 있다. 십자가는 구원과 생명의 나무이며 끝없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이다.
주님 수난 예식에서 사제와 부제들은 붉은색 제의를 입는다. 사제의 붉은색 제의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이는 순교자와 성령의 색으로 진리를 위해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에 스스로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순교와 승리를 의미한다.
성금요일의 단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함을 드러내는 성사적 표지로써 이날 하는 단식을 의미심장하게 "파스카 단식"이라고 불렀으며, 가능하다면 부활전야의 성찬례까지 연장하기를 권하고 있다(전례헌장 110 참조). 성금요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날(그 당시 금요일이었던 니산달 14일)로써, 예로부터 슬픔과 고통의 단식일이며 슬픔의 단식이라고 불렀다. 초세기에 벌써 사람들이 제자들에게서 신랑을 빼앗겼기에(마태9,15 : 마르2,20 : 루카5,43), 제자들이 단식하는 때에 대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무덤에서의 안식의 날과 관련시켰다. 이 슬픔의 단식은 초대 교회의 의식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에 서방에서는 때때로 모든 금요일과 토요일까지도 슬픔의 단식일로 명했다.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의 단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는 2세기까지로 소급한다.(히브리 묵시복음과 리옹의 이레네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완전한 단식으로써의 일체의 음식이나 음료를 먹거나 마시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파스카 40시간 또는 이틀 동안 음식이나 음료를 아예 먹지 않아야 했다. 히뽈리뚜스의 교회 규정에 따르면 병자와 임산부를 위해서는 예외적으로 빵과 물은 허용된다고 표명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성금요일, 성토요일의 완전한 단식에 대한 이해와 전승을 증명하고 있다. 교황 인노첸스 1세는 5세기 초엽, 이미 사도들은 이 이틀 동안(Biduum) 슬픔의 단식을 지켰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이 전통의 근거를 세웠다. 이 전통을 고려하면 오늘날 교회가 성금요일을 단식과 금육의 날로 지키는 것이다.
성금요일 전례를 위하여 4세기에는 성찬례가 아닌 여러 가지의 다른 형태의 전례가 생겨났다. 순례자 에테리아가 저술한 것으로 보이는 순례기에는 400년경,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황후 헬레나에 의해 320년경에 발견된 골고타의 그리스도 십자가를 공경하기 위하여 오전에 골고타에 모였고, 이른 오후에는 수난에 관한 시편과 사도들의 서간이나 행적 그리고 복음이 봉독되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했다고 보고하고 있다.(참조: 에테리아 여행기 37장 「신학전망」 25호 pp.83-85)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던 예루살렘 바로 그 곳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그 장소와 시각에 맞춰 전례 안에서 그대로 재현하여 믿는 이들의 의식 안에 깊이 새기게 하려는 예루살렘 성주간의 전례는 서방교회에 본보기를 보여주는 전례가 되었다. 처음에 서방에서는 말씀의 전례, 그 중에서도 수난기사와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계되는 시편이 큰 역할을 했던 말씀의 전례로 만족했다. 예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의 유물을 소유했던 지역교회들, 예를 들면 황후 헬레나가 그 일부를 선물함으로써 이미 4세기에 그 유물을 소유했다고 증명되는 로마교회에서는 이미 십자가 경배 전례가 생겨났다. 7세기 로마의 성금요일 전례서를 보면 교황은 맨발로 십자가의 유물을 가지고 라테란 대성당에서 헬레나 황후에 의해서 세워진 성당인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으로 행렬하였다. 그곳에서 십자가 유물은 두 개의 구약의 독서와 요한의 수난기가 봉독되는 동안에 성직자들뿐 아니라 전 공동체에 의해서 경배되었다. 7세기에 신자들의 영성체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장엄신자들의 기도가 원래 이 말씀의 전례를 마무리했다. 이 로마전례는 8세기에 프랑크족에 전해져 계속해서 보다 강하게 극적인 요소를 지닌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수난 예식이 끝나면 교회는 침묵에 잠긴다.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는 동안 미사를 비롯한 모든 예식이 중단된다. 이 침묵은 성토요일의 해가 지고 어둠이 빛을 기다릴 때까지 계속된다.
ANGELICO, Fra -Lamentation over Christ -1436-41 -Tempera and gold on panel, 109 x 166 cm -Museo di San Marco, Florence -Other works by the artist...
성토요일
성토요일(聖土曜日 라틴어-Sanctum Sabbatum 영어-Holy Saturday)에 교회는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물러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한다. 제대는 벗겨 두며, 미사는 드리지 않는다. 오늘은 노자 성체만 허락된다. 성토요일은 성금요일과 부활대축일을 연결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묻힘과 고성소에 내림을 상징하는 이 날은 단순한 슬픔 그 이상을 넘어서서 찬란한 부활을 희망하며 기다리는 준비의 날이다. 성토요일로 성주간은 끝난다.
성토요일은 유일하게 미사가 없는 날이다. 완전한 단식의 날이다. 주님께서 무덤에 계심을 공경하는 날이다. 침묵과 적막이 흐르는 날이다. 이날 예수께서 무덤 안에서 쉬심과 저승에 내려가심과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1베드 3,19-20; 4,6) 천국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던 모든 이들과의 신비로운 만남(특히 아담과의 만남)을 기린다.
특히 시간전례 거행에서 이러한 주제가 잘 드러난다. 우리는 성경 독서에서 “성토요일에 관한 옛 강론”을 듣는다. “주님은 마치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듯 우리 원조를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던 이들을 만나기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하와의 아들이 되신 그분은 아담과 하와를 고통과 감옥에서 해방시키시고자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아담에게) ‘나는 네 하느님이면서도 너를 위해서 네 아들이 되어 네 종의 모습을 취했다. 하늘 위에 있는 나는 너를 위해서 세상에 내려왔고 땅속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너를 위해 사람이 되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버림받은 인간이 되었다. 나는 동산에서 쫓겨난 너를 위해 동산에서 유대인들 손에 넘겨졌고 또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처럼 저자를 알 수 없는 성토요일 옛 강론은 창조사업과 구속사업을 서로 연결시킨다.
이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신 곳에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에 아직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요한 19,41). 그 무덤에 예수를 모셨다. 이 날은 파스카를 준비하는 큰 날인 안식일 (토요일)이다. 이제 땅은 자신의 주님이며 아드님이신 분을 모신다. 깊은 침묵 가운데 마지막 “준비” (요한 19,42)다. 세상 창조의 7일째인 안식일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쉬시면서 당신 창조 사업을 즐기셨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안식일에 최우선의 일인 당신 사랑의 사업의 끝맺음을 하시려고 일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요한 5,17). 아버지께서는, 모든 이의 죄를 지고 그들의 죽음을 취하신 당신 아드님의 몸을 당신 숨으로 꿰뚫으며 그 몸을 살아있고 썩지 않게 하시리라. 안식일은 다음날인 새 창조의 날 (곧 주일)을 위해 존재한다.
성토요일은 그 성격상 부활성야 예식 전과 후로 구분된다. 부활성야 예식전까지는 본의미의 성토요일(Sabbatum Sanctum)로서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날이다. 해가 진 후 부활성야 전례가 거행되는데 이 때부터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승리자가 되신 참된 해방의 밤을 기념한다.
십자가! 수난의 신비 - 민병덕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를 구원의 신비라고 말한다.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우선 '구원'과 '신비'의 의미에 대해 알아야 한다. 신비(mystery)는 희랍어 뮈스테리온(musterion)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이는 작전이라는 뜻이다. 전쟁 중에는 작전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모든 상황이 끝나면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현재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알 수 있는 것이 신비다. 즉 신비는 모든 것이 다 이뤄졌을 때 명명백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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