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이육사「꽃」. 칠월 칠석 본문

세상사는 이야기

이육사「꽃」. 칠월 칠석

불꽃緝熙 2014. 8. 1. 19:05

 

한밤의 사진편지 제2134호 (14/8/1/금)

[한사모' 공식 카페] - '한밤의 사진편지romantic walking'

< cafe.daum.net/hansamo9988 >

-[클릭]-

cafe.daum.net/hansamo9988

<맨 아래 '표시하기'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이육사 . 칠월 칠석

  

오늘은 8월의 첫 날입니다.

20년 만의 `마른장마`와 함께 7월이 갔습니다.

8월 `찜통더위`를 예고하면서...,

 

8월이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습니다.

조국광복을 기리면서 7월의 `청포도`를 가슴깊이

새긴 이원록(李源祿)입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였으며,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원록(李源祿)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14대 손으로

후에 이름을 이활(李活)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1944년 1월 16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

 

독립운동을 하면서 17회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의 아호(雅號)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입니다.

 

바로 이육사(李陸史)입니다.

 

1933년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陸史)'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습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으나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죽고 난 이듬해 광복이 되었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0월 20일, 그의 유고를 정리한

<육사 시집>이, 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李源朝)에 의해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하루하루의 삶을

바치며 살았던 이육사(李陸史)의 시를 낭송하시면서,

 

그의 조국독립과 광복의지를 기리고 새기는

8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시, <꽃>. <광야>. <절정>. <청포도>를 소개합니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광야(廣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광야(廣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絶頂(절정)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내일(8월 2일)은 음력 7월 7일,

칠월 칠석입니다.

내일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떨어져 있던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일년에 한 번 만난다는 칠석입니다.

견우(牽牛)는 글자 그대로 소치는 목동을 말하며

직녀(織女)는 베짜는 여인을 말합니다.

 

두 남녀는 본시 하늘 나라에서 살다가 서로

사랑하게되어 결혼을 하였답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도 늘 함께 지내기에 바빠 일을

게을리하므로 옥황상제가 노하여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

직녀는 서쪽에 살도록 갈라 놓았습니다.

 

일년에 칠월칠석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도록 크나 큰

은하수가 가로 막아 그저 강 건너에서 서로

마주 건너다 볼 뿐이었습니다.

 

견우와 직녀의 슬프고도 애틋한 사랑에 감복한

까치와 까마귀들이 은하수로 날아가

두 사람이 상봉하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그 다리를 까마귀 오(烏), 까치 작(鵲)자를 써서

오작교(烏鵲橋)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작교를 건너 만나게 되지만,

새벽동이 트면 또 다시 이별을 해야 하며, 또 애타는

마음으로 슬픈 일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 날이 되면 까마귀와 까치는 모두 은하수로 날아가며

다리 구실을 하는 까마귀는 머리가 밟혀 모두 머리가

벗겨진 까마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이 슬픈 사랑의 전설은 고구려 벽화 중에

직녀와 소를 끌고 있는 견우의 그림과,

 

붉은 글씨로 견우, 직녀라고 쓴 글씨가

발견됨으로 해서 고구려 이전부터 있었던 역사가 깊은

전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날 저녁에 비가 오면

이것은 견우와 직녀가 만난 기쁨의 눈물이고,

이튿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전합니다.

 

 

모두가 잘 아시는 슬픈 전설을 보내드리는 것은

견우와 직녀의 진솔한 사랑을 새기면서,

 

광복의 달 8월이 뜻있고 의미있는

나날이 되시기를 비는 마음에서입니다.

 

김태종 드림. 

 

 

-<뉴욕 필 아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