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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이야기

권돈인 필 세한도(權敦仁 筆 歲寒圖)

불꽃緝熙 2024. 1. 22. 20:52

◉ 금석지교(金石之交)의 우정이 담긴 ‘권돈인 필 세한도(權敦仁 筆 歲寒圖)’

 

권돈인 필 세한도(權敦仁 筆 歲寒圖), 22.1*10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권돈인 필 세한도(權敦仁 筆 歲寒圖)는 종이에 권돈인(權敦仁, 1793-1859)이 세로 22.1cm, 가로 101.5cm 크기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인화이다. 금석지교(金石之交)는 변함없는 우정을 말한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이 그런 사이다. 이재는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이며 황산은 순․헌정대의 정계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정치적 이해를 떠나 그들은 학문과 예술의 동반자였다.

이「세한도(歲寒圖)」는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세한도' 제목은 추사가 썼고, 두 제발은 이재 추사가 썼다. 오늘 쪽은 이재, 왼쪽은 추사의 제발이다.

 

「因以歲寒三双圖 一幅以實詩言 - 우랑(又閬)/ 세한삼우도 한 폭에 시의를 담았다 - 우랑」

「畵意如此而後 爲形似之外 此意雖 古名家得之者絶少 公之詩不拘於閬工畵亦然 - 阮堂/ 그림의 의미가 이 정도는 되어야 형사(形似) 너머에 있는 자기마음을 표현했다 할 것이다. 이 뜻은 옛날의 명가라 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공의 시만이, 송나라 시인 반랑(潘閬) 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림 또한 그렇다. 완당 김정희 쓰다.」

 

이재는 '세한삼우도(歲寒三双圖) 한 폭에 시의를 담았다'고 적었으며 추사는 이재의 그림과 제발을 보고 '그림의 의미가 이 정도는 되어야 형사 너머에 있는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고 말하고 있다.  ’옛날 명가라 해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라고 격찬을 했다.

 

권돈인(權敦仁, 1783~1859, 조선 문신·서화가)은 “몸은 각각이지만 마음은 하나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친한 죽마고우이자 평생지기였다. 권돈인은 학문에 조예가 깊은 김정희와 막힘없이 학예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중에 가족에게는 하지 않는 힘든 심경을 털어놓으며 권돈인에게 많이 의지했다. 권돈인은 김정희가 먼저 사망한 후 크게 상심한 와중에도 그의 복권을 위해 무던히 노력하였다. 김정희가 관직을 되찾게 되자, 관복을 입고 있는 김정희의 초상화를 주문하여 제작할 정도로 벗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그는 김정희의 <세한도>와 같은 이름의 그림을 그렸다. 김정희가 건조하고 메마른 세한을 표현하기 위해 마른 먹으로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거칠게 그린 것과는 달리 물기 있는 먹으로 소나무, 대나무, 바위로 이루어진 아늑한 공간을 표현하여 재미있는 대비를 이룬다. 그림 오른쪽의 커다란 ‘세한도’글씨는 김정희가 썼다.

 

권돈인은 추사보다 세 살 위였으나 추사와는 우정과 예술을 짙게 나눈 절친한 사이였다. 세한도 제목 좌측의 둥근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 서로 오래 잊지 말자)을 보면 그들의 우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