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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 제8과 묵상과 생활 본문
라파엘의 2022 온라인 성경공부 "요한복음서 제8과 묵상과 생활"
[요한복음서] 제8과 묵상과 생활 1.현재 당신의 시력이 얼마인지 써 보십시오. 또 신앙의 시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저는 이 묵상에 대한 복음 말씀으로 요한복음서 9장 35절에서 41절에 있는 내용을 다시 읽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38절을 보면 치유된 눈먼 이가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는 내용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경배하는 치유된 눈먼 이는 예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고, 그 눈에 비친 각 사람의 살아있는 표징이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4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 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 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이르신 말씀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죄란 안다고, 본다고 주장하면서도 찾고 이해하지 않거나 또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눈(眼)을 ‘육안(肉眼)’, ‘심안(心眼)’, ‘영안(靈眼)’으로 구별하여 이야기합니다. 저는 안경을 쓴 좌․우 교정시력이 1.0, 0.9 정도가 됩니다. 안경을 벗으면 그보다 훨씬 낮게 나옵니다. 이렇게 나의 시력이 얼마라고 이야기하는 것 은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육안(肉眼)의 시력 상태가 그 정도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학문을 익히거나, 인간관계에서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을 지녀라는 가르침을 많이 접하기도 합니다. 이 심안은 그 사람 마음 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 마음의 눈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부모라고 하면 부모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또는 자녀라고 한다면 자녀로서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사실 그래야 맑은 심안, 즉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니고 있는 신앙의 시력은 어느 정도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나의 ‘신앙의 눈’(영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 이기 때문에 현재 내가 예수님을 보는 나의 믿음을, 예수님의 눈으로, 또 예수님 의 마음으로 보는 눈이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표징을 보면 그분의 위대한 능력을 믿고 볼 수 있어야 하 는데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거나 하느님 영광을 제대로 믿고 보지 못한다면, 이런 나의 신앙의 시력이 과연 얼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내가 바로 ‘눈먼 이’이고 ‘귀머거리’라 하겠습니다. 시편에는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라는 노래가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 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내 신앙의 눈은 나의 능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빛을 받아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시력은 나의 신앙의 깊이 만큼, 그리고 내가 복음에 눈을 뜬 만큼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김종환이 부른 ”사랑을 위하여“라는 가요는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라고 노래합니다. 신앙의 눈을 뜨면서 말씀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은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복이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육안의 눈을 넘어 제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이를 신앙의 눈으로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제8과 묵상과 생활 2. 당신의 청력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까? 들은 후 어떻게 생활합니까? 저는 이 묵상에 대한 복음 말씀으로 요한복음서 10장 27-28절에 있는 내용을 다시 읽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이 복음말씀을 읽어 보면,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고 그분의 양무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신적인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들은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가며 그 분의 신성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당신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 라고 이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저의 청력은 정상이고 같은 또래에 비해 좋은 편입니다. 이는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물리적인 능력인 청력(聽力)이 아직은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경청의 능력이 괜찮은 편이냐고 물으면, 글쎄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귀 담아 들어주기보다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청각장애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듭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정치권에서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말만 골라서 듣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대체로 흘려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통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저는 아직 예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보다 명료하게 듣게 되길 희망해 보았으나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향한 나의 귀가 활짝 열리길 기대하지만, 그러나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나의 의지인지 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처지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어떻게 생활하느냐는 질문에는 저는 무엇이라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어느 신부님의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영성생활에서 중요한 일은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흔히 체험하 는 일이지요. 지긋지긋하던 어학연수 기간에서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거나 이제야 조금 살 맛 난다’고 느끼는 순간이 과연 어느 때일까요? 그때는 어렴풋이 나마 말이 들리기 시작할 때일 것입니다.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 지옥 같던 순간들이 지나가고 슬슬 외국어에 재미가 붙습니다. 귀가 들리기 시작하면 이제 이해도 되고, 또 조금씩 말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화다운 대화도 시작되고, 이렇게 의사소통이 시작되면 제대로 된 외국인 친구도 사귀게 됩니다. 점차 그 나라 문화도 이해하게 되고, 이제 여행도 재미있어집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영성 생활에 있어서도 어학연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로 향한 나 자신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하느님께로 향한 제 자신의 귀가 열려야 함을 깨닫게 되어 기쁨니디. 제 자신의 귀가 열리기 위해 나는 영성 생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를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를 수 있도록 하느님께로 향한 저의 귀를 활짝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제8과 묵상과 생활 3. 만약 당신이 다른 이를 돌보고 키우거나 이끄는 소임을 하고 있다면 (부모, 단체장, 지도자 등),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그들을 대합니까? 저는 이 묵상에 대한 복음 말씀으로 요한복음서 10장 9, 11, 15절에 있는 내용을 다시 읽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위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이끄는 착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양들을 잔잔한 물과 신선한 풀밭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양들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도 바친다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양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기자신을 희생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아내와 함께 참여하고 있는 동호인 모임에 ”할미꽃하모니카앙상블“이라는 하모니카 합주단이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모임이 어려워졌으나, 한때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서 1번 합동 공연하고, 그리고 체임버홀 무대에서 세 번이나 연주한 경험이 있는 실력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이 모임의 24명 회원 중에는 8명의 할배도 있는데, 모임 이름에 왜 ”할미꽃“이 들어있느냐고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로 봐서는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꾸부정해지는 할매만을 연상하게 된다 는 이야기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미꽃의 꽃말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되새겨 보면 우리 모임이 추구하는 목표인 나눔과 배려 즉,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는 기본정신 이 할미꽃의 꽃말에 깃들어있다는 의미있는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할미꽃(Korean pasque flower)의 꽃말에는 공경과 사랑, 희생과 봉사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공경(恭敬)이라는 말 속에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해야 함을 의미하며 그렇게 하려면 감사하며 사랑하고, 희생하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심신이 노쇠하였지만 은퇴한 우리 실버 세대들에게 이 할미꽃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어준다고 생각하면, 하모니카앙상블의 이름에 ‘할미꽃’이란 말을 넣은 것은 참으로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덕담처럼 나누어 본 일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녀를 돌보는 부모들은 양들을 이끄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처럼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사랑과 자기 희생으로 자녀를 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퇴임을 앞둔 분들에게 나이가 들어가며 후회스러운 일이 뭐냐고 여쭈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자녀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이웃 사람들에게도 ‘좀 더 베풀 껄’, ‘좀 더 사랑할 껄’, ‘좀 더 참을 껄’ 그랬구나 하면서 스스로 후회하는 말을 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 이제 나이가 들어가며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나의 자녀나 소속된 모임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며 베푸는 사랑과 봉사의 마음을 실천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제8과 묵상과 생활 4.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예를 들어 그들이 가난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공동선의 토대라고 우리 가톨릭 사회 교리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신명10,18)에서는 고아와 과부 등과 같이 당시엔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헐벗은 사람, 굶주린 사람, 집 없이 떠도는 사람, 병든 환자, 감옥에 갇힌 사람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마태 25,35-44)이 우리 신앙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우선적인 사명이라고 강조하시는 말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몇년 전 우리 고촌 본당 주임신부로 봉직하셨던 정연섭 베드로 신부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우리 신앙공동체가 실천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우선 약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우선적으로 귀기울여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이나 개인적 인 문제가 아니라, 나와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저의 경우, 6.25 전쟁으로 인하여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돈이 없는 가난이 어떠한가를 실제로 체험한 바 있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진로 를 바꾸어야 했고, 전쟁이 몰고 온 세계 최빈국의 가난은 계속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이끄심에 따라 정말 보람있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고, 또 훌륭한 선배, 동료, 후배들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내가 하는 일들을 한 평생 사랑 하게 되었으니 이는 나에게 주어진 큰 행운이고 기쁨이었다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장가를 잘 가서 그렇다고 이야기하여 함께 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왜 계속해서 가난할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반적으 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가난한 이유를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사실 돈보다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마음’이 더욱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 창업자인 세계적인 부자 빌 게이츠(Bill Gates)는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까지 가난한 것은 당신 잘못 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가난한 것을 남 탓 으로 미루고 노력을 덜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과 지난 나의 삶을 되돌아보더라도, 빈곤이 되물림 되는 이유는 돈보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가난 하다면, 나는 왜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고민하고,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행동하면 더욱 좋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당신 덕분에, 존경하는 부모님 덕분에, 아름다운 친구 덕분에,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 덕분에,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멋진 하루 되시길 빕니다." ”주님, 불행한 처지에 있는 주위의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노력하도록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고촌 李璟煥 라파엘)
[기도 지향] ; 장애인들을 위하여 * 당신을 항구히 따르도록 제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일용할 양식] "나는 세상의 빛이다"(9,5). "주님, 저는 믿습니다"(9,38).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0,11).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10,27).
* 글, 편집 : 西湖 李璟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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