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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성지주일: 가해 : 예수님의 수난

불꽃緝熙 2017. 4. 10. 17:20

 

 

성지주일: 가해 : 예수님의 수난

 

이제 성주간이 시작된다.

전통적으로 이 주간을 성대주간”(Hebdomada major)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주간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기 때문이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죽음이 소멸되며 저주가 사라지고 악마의 노예살이가 종식되어 그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찾게 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인간들과 천사들이 하나로 일치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평화롭게 하신다.”(In Genesis Homil. 30 in PG 29,273-274)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말한다.

이러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이 주간이 승리의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공경하여 기념하는 팔마 가지의 축성과 행렬로 시작되지만, 이것이 또한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압박하는 음모로 바뀔 것이다.

오늘의 전례는 무죄한 이를 거슬려 자행되는 이유 없는 폭력으로 꾸며지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승리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리신다.

즉 십자가 위에 승리의 팔마 가지를 높이 매다신다.

이러한 이유로 독서들은 주님의 수난을 감격적인 뜨거운 사랑으로 되새기고 있다.

 

1독서 : 이사 50,4-7 : 고통 받는 야훼의 종

 

1독서는 야훼의 종의 셋째 노래의 일부만을 전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야훼의 종은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뢰심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6-7).

 

2독서 : 필립 2,6-11 : 십자가 위에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강하게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참담한 모욕의 여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능욕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신성을 비우시고’, ‘벗어버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를 낮추시는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난다(6-8).

그러나 바오로는 이 그리스도의 참담한 능욕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놀라운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영광의 주님으로 들여 높여지시는 것까지 내다본다.(9-11)

 

복음 : 마태 26,14-27,66 : 마태오의 수난기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개념은 자유이다.

예수께서는 이 자유로써 죽음을 맞으신다는 것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이끌어 가신다.

당신이 원하셨다면, 피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칼로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쳤을 때 예수께서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이다.

때문에 자진하여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손에 당신 자신을 맡기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39).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42)

그리고는 세 번째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잠이든 제자들에게 깨어있지 못하느냐고 하시며,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26,45-46)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에 맞춰져 있음을 본다.

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될 이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이 외에도 예수께서 현실에 이끌려 가시지 않고 자유롭게 다스리심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26,24),

또는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26,55-56).

이것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순명’(필립 2,8 참조)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죽지 않을 수 있지만 친구를 위해서 죽는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다.

이러한 사랑의 표지로 나타나는 마태오 복음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에는 그렇기 때문에도 예수님을 죽을죄인’(26,66)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그분의 무죄하심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고(27,19),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하고, 군중은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한다(27,24-25).

이렇게 무죄한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으로써 그 잘못에 대한 선언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길을 달리함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백인대장의 고백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

여기서는 또한 인간들의 잘못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빌라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사형장에 내몰고 있지 않은가?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깨닫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단죄하고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30은전에 팔았고, 베드로는 큰 소리를 치고도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유다처럼 돈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마저도 팔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목을 맨 절망적 행위는(27,5)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에만 눈이 어두웠던 행위의 반작용이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아직도 용기가 부족하다.

빌라도의 모습은 진리나 정의보다 자신의 안이함을 추구하는 양다리를 걸친 자들이며, 많은 형제들의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맥을 놓고 있는 사람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분과 더불어 단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는”(26,40) 사람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수난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그 비극적 사건의 장본인들이 우리이기 때문에 수난사의 주역들이 무대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 자신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어떠한 자세로 있으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수난의 비극을 재현하고 있을 수도 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성대주간을 지내면서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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