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궁궐지킴이

한밤의 사진편지 제2393호(윤종영의 역사이야기(4)/'16/6/23/목) 본문

박물관 이야기

한밤의 사진편지 제2393호(윤종영의 역사이야기(4)/'16/6/23/목)

불꽃緝熙 2016. 6. 22. 10:51

 

 

 

 

한밤의 사진편지 제2393호 ('16/6/23/목)

 

[한사모' 공식 카페] - '한밤의 사진편지 romantic walking'

 

< cafe.daum.net/hansamo9988 >

 

-[클릭]-

cafe.daum.net/hansamo9988


<맨 아래 ' 표시하기' 클릭하시기 바랍니 다.>

 


 


   * <동의보감(東醫寶鑑) : 1610년(광해군 2) 허준(許浚)이 지은 의서(醫書). >

   * <광해군은 1613년  내의원의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 목활자를 사용, 동의보감 출판.>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 광해군 시기의 국제정세와 관형향배(觀形向背) ④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



            * 때 :    2015년 9월 9일(음 7월 27일) 밤10시



            * 장소 : 창덕궁 영화당

 


첨부이미지

 

글 :  윤종영 (한사모 수석고문, yooncy1936@hanmail.net )


 

 



         *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의 발발>

    

 

 

        [서강]: 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 일파는 대외적으로 친명반후금정책    

      (親明反後金政策)을 공식화하여 후금의 침략을 자초,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며.     


      그 뒤 도원수님이 작고하신 뒤이지만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병자호란까지    

      당하고 말았습니다.    

 

        도원수님은 정묘호란에 어쩔 수 없이 깊이 관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묘호란과 전후 수습과정 등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첨부이미지

 

        [내촌]: 서강이 본대로 반정 후, 후금은 중국 대륙으로 내려가기 위해 후방의    

      조선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지. 그런데다 후금에서도 태조 누루하치가 명을 공격    


      하다 전사하고 뒤를 이어 인조 4년(1626)에는 후금 태종(홍태지:태조의 아들)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태조의 조선에 대한 화친정책 대신 주전론을 택하였지.     


        이는 명 나라의 요동도사로 있던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의 가도(평북 철산군     

      철산읍)에 웅거하여 후금의 후방에 위협을 가하였고. 더욱이 반정 후에 반정     


      공신들 간의 내분으로 평북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조선왕조사에서 처음으로 반군이 한양까지 점령하고, 흥인군(선조의 아들)을     


      왕위에 추대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신하여 이들이 성공하는 듯 했지만 도원수     

      장만이 다행히 이를 진압하였지.     

 

        그때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명련(韓明璉:귀성부사)의 아들 한윤(韓潤)과    

      한택(韓澤)이 후금으로 탈출, 후금에 귀순하여 나에게 보내졌어.     


        이들은 이곳에 와 자기 아버지가 억울하게 반역자로 몰려 결국은 죽음을 당한    

      원한에 사로잡혀 조선 공격을 선동하며 공격 시에는 자신들이 선도를 하겠다고     

      하자 조선 공격의 기회를 엿보던 후금은 조선 공격을 결정하게 된 것이지.    

 

 


   * <조선시대 양반의 일생을 그린 그림 중 돌잔치와 결혼잔치 (傳 金弘道筆 平生圖)>

 

 

        [내촌]: 후금 태종은 나에게 조선 공격에 참여하여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미     

      조선 공격을 결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내가 참여하여     


      조선과의 화의문제, 전쟁 피해의 축소 등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요구를 받아들였지.     


        그러자 후금 태종은 나에게 이번 조선과의 전쟁이 잘 종결되면 내가 원한다    

      면 조선에 머물면서 후금과의 우의를 위해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나의 귀국을 허락하였어.     


        또 이들은 전쟁의 명분으로 광해군 전하의 복위를 내세운다고 하여     

      나는 실현성이 없고 오히려 전하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반대했지만 이들은 이를 내세웠어.     


        후금 태종은 자기 종형 아민(阿敏)을 사령관으로 3만의 병력을 동원,     

      인조5년(1627) 1월14일 압록강을 도하하여 기습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지.     


      더욱이 후금 군 선도에 선 한윤은 의주성에 잠입하여 무기고에 불을 질러     

      의주의 방어체제를 무너트려 의주 부윤 이완(李莞:충무공의 조카)이 전사하고     

      의주성은 하루만에 점령 당하였고. 그리고 이들은 별군을 보내 가도를 공격,     


      모문룡은 이곳에서 쫓겨나 신미도로 도망하였고 1월15일에는 정주가 함락되고,    

       1월 24일에는 평양이 점령 당하였어.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며 광해군 전하가 그렇게 심혈(心血)을 기우려 만든     

      북방 방어체계가 이 꼴이 되었는지 정말 가슴이 막히더군.    

 

 


   * <조선시대 양반의 일생을 그린 그림 중 '삼일유가'와 '한림겸수찬시' (傳 金弘道筆 平生圖)>

 

 

        [내촌]:더욱이 뒤에 들은 것이지만 후금군의 침입 사실이 3일이나     

      지난 뒤 17일에야 조정에 알려질 정도였으니 말이 안 나왔지.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여 황해도 평산, 황주를 점령하였어.    

      이런 현상은 반정 후 이곳에서 정군을 양성하고 이를 이끌고 있었던 장군    


      들이 대부분 숙청되고 또 군사 훈련이 반역을 준비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기피한 결과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인조는 25일, 중신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며 그래도 전쟁이 발발한     

      죄책감을 느꼈는지 백성들에게 죄기교서(罪己敎書:자기잘못을 인정한 교서)를     

      발표하면서 머리를 숙였어.     


        나는 후금진영에서 9년 만에 대하는 고국산천을 보며 눈물이 돌아 앞을     

      볼 수가 없었어, 그러면서 내가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는 것이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는 길이라 생각하고 아민 장군에게 이     

      전쟁의 목적이 명 나라 모문룡의 가도에서의 추방과 조선과 후금과의 화의체결     

      임을 강조하였지.     


        그러면서 만약 화의 성립이 늦으면 명의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음을     

      설득하였고 아민도 나의 의견에 동조하고 조선에 화의사절을 파견하였지.     


      그러자 조선에서도 강화 사절로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을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 왔는데, 이를 보니 명과의 사대(事大)의 도(道)를 강조     

      하였더군.     


        나는 이를 보며 화의 성립을 위해 내가 직접 나아가 협상에 참여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아민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후금에서 사절로 부장     

      유해(劉海)를 파견할 때 내가 동반하였지.     

 

 


   * <조선시대 양반의 일생을 그린 그림 중 '관찰사 부임'과 '판서행차' (傳 金弘道筆 平生圖)>

 

 

        [서강]: 도원수님이 조선에 후금의 사절 비슷한 입장에서 고국의 국왕인     

      인조나 조정의 신하를 대할 때 어떠하셨는지요?     

 

첨부이미지

 

        [내촌]:나는 광해군 전하가 왕위에서 축출된 후, 고국의 조정에 대해     

      애증(愛憎)이 상당이 깊었다고 할 수 있었어.     


        광해군 전하를 내몰아 이런 전란을 자초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국왕이나     

      조정의 중신들에 대해 한없는 증오감이 들끓었지만, 그래도 우리 백성들을     


      생각하면 이들을 도와 어떻게 하던 전쟁을 종식시키고 이들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도록 해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지.     


        또 들리는 소리가 내가 오랑캐의 사신으로 온다고 우리 가족을 잡아     

      죽이던지 나도 잡아 목을 치라고 조야에서 야단들을 하였다는 풍문을 들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었어, 나는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전쟁의 종결     


      그리고 앞으로 전쟁만 막을 수 있다면 내 한 목숨 나라를 위해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를 안내하는 조선 관원들의 차디찬 눈총을 받으며     

      강화도에 상륙해서 국왕이 머무는 행재소(行在所)를 찾았지.    


        능양군 전하는 내가 옛날에 몇 번 얼굴을 본적은 있지만     

      거의 교류가 없었기에 처음 뵙는 거였지.     


        나는 능양군 전하를 뵙자 어떻든 국왕으로 예우하면서 부복해    

      절을 올렸지. 그런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더군, 그래 목멘 소리로     


      “ 패전 후 모진 목숨을 부지하고 오랑캐 진영에 머무른지 9년이 되었습니다.     

      고국에 돌아와 전하를 뵈오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능양군 전하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고국에 돌아왔으니 천만다행이오. 어떻든 전쟁이 빨리     

      종결되도록 많은 힘을 써주었으면 좋겠소.”    


        그러면서 후금과 명나라의 정세와 후금이 강화조건으로 가장 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 가지를 하문하면서 나의 가족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면서 나를 위로하시더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든 나도 기분이 많이     

      개운해졌어.    

 

 


   * <조선시대 양반의 일생을 그린 그림 중 '정승행차'와 '회혼례' (傳 金弘道筆 平生圖)>

 

 

        [서강]: 도원수님께서 고국에 들어오시면서 느끼셨던 감상(感想)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광해군 전하를 내몰고 왕위에 오른 인조를 뵈옵고 제대로     

      국왕으로 예우하면서 법도를 지키신 것을 보며 정말 어려운 일을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어떻든 후금 군에게 평산 이북의 황해도, 평안도가 점령 당한 속에서 이끌어낸     

      화의성립에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신 도원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첨부이미지

 

        [내촌]:서강도 이야기했지만 후금이 이 전쟁에서 가장 원한 것은     

      조선과 명과의 국교 단절이었어.     


        그래서 나는 조선 조정에 명과의 단교가 어려우면 차선책으로     

      명과의 국교는 유지하되 명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명과 거리를 두고    


      후금과 화의를 맺으며, 두 나라가 형제지국(兄弟之國)이 되어 앞으로 두    

      나라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는 것을 양국에 제시하고 설득    

      했지.    


        결국 조선도 무력으로 후금 군을 내몰 수 없는 상황이고 명과의     

      국교를 인정한다면 이 선에서 화의를 맺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하고     


      후금도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여 명나라의 공격 위험에 노출될 필요가    

      없다고 판단, 양국의 화의에 합의를 이루어 화맹(和盟)을 맺게 되었지.    


        그래서 3월3일 강화성 밖에 제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祭天)     

      서약하여 정묘호란 화의가 이루어졌지.     


        그러면서 화맹이 이루어진 후, 곧 후금군은 철수하고 조선은    

      왕제(王弟)를 인질로 후금으로 보내기로 약속하여 나는 나름대로     


      한시름을 놓았지만 후금군이 철수하며 벌이는 약탈과 철수약속을     

      지연시키는 행위는 나에게 엄청난 괴로움을 주었어.     


        그래서 나는 조선군 지휘관들에 후금 군이 벌이는 만행이 목격되면     

      나에게 즉각 연락하도록 하여 이러한 연락이 오면 가능하면 내가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그곳 지휘관에게 강하게 질책을 하고 아민 장군에게     

      수시로 알려 이를 막는데 최선을 다했어.     

 

 


      * <조선시대 양반의 일생을 그린 그림 중 과거 합격을 축하하는 三日遊街 행차 모습.>

 

 

        [내촌]:그러나 후금군의 철수길 부근은 그 피해가 극심했고 특히 후금군     

      장병 가운데, 몽골 출신 장병들의 약탈이 극심해 몽골 장병이 많은 부대     

      지휘부에 강하게 단속해 줄 것을 부탁하곤 하였어.     


        그리고 가능하면 빠른 시일 안에 철수가 완료되도록 아민 장군에게     

      수시로 채근하곤 하였지.     


        어떻든 아민을 비롯한 후금 지휘부에서는 나에 대한 자기 국왕(태종)의 신뢰     

      때문에 나의 이런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많이 따라 주었어.     


        그래서 나름대로 철수가 잘 진행 되었지만 병력일부가 의주의 모문룡 문제를     

      거론하며 잔류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진 근 6개월 후에 철수가 완료 되었어.    

 

        이러한 속에서 능양군 전하는 강화가 성립한 후 4월 12일, 한양에     

      환도하였고. 그리고 인질로 왕족 원창군(原昌君)을 왕의 동생으로 위장하여     


      철수하는 후금군을 따라 보냈지만, 그가 왕제(王弟)가 아님을 알고 있는     

      나는 심기가 좋지 않았어.     


        그러나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지. 또 당시 숭명배금(崇明背金)의     

      관념에 젖어있는 일부 집권층이나 사대부들 입장에서 오랑캐와 '형제관계'라는     


      굴욕적인 화의를 맺은 것은 매우 참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일부 강경파들은     

      화의를 깨려는 기도를 많이 했었지.     


        심지어는 강화 성립 “맹서문(盟誓文)”을 가지고 후금으로 가는 사신을     

      암살하려는 일까지 있어 이를 알고 분노하여 강화를 깨려는 후금군 지휘부를     


      달래고, 나는 능양군 전하를 만나 조정 중신들을 회유토록 하여 화의를 유지     

      하도록 하였어.     


        어떻든 이러한 나의 노력이 결실인지 결국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     

      속에서 정묘호란은 외형적인 종결을 보았지.    

 

 


      * <조선시대 양반의 일생을 그린 그림 중 결혼 60주년 기념잔치 回婚禮 모습.>

 

        [서강]: 도원수님이 전쟁 종결을 위해 노력하신 결과     

      그래도 빠른 시일 안에 전쟁이 끝나 백성들이나 국가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도원수님은 후금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국내에 머무르시고 완전히 귀국을 하시게 된 것인지요?     

 

        [내촌]: 내가 정묘호란에 참전하여 후금군을 따라 국내에 들어올 때,     

      나는 후금 국왕(태종)으로부터 귀국을 허락받았고 그는 나에게 조선에     

      머무르면서 앞으로 양국관계의 중개자로 양국 우의유지에 기여해줄 것을     


      부탁했고 화의가 성립된 후, 그 곳에 있던 나의 후처와 종자(從者)까지     

      다 보내 주었어.    

 

        내가 한양에 돌아와 오랜만에 가족을 상봉하고 조상의 묘소에 참배하고    

      많은 눈물을 흘렸지. 다행히 그래도 전하는 내가 나름대로 후금에 머무르며     


      한 행적이나 전쟁 중에 화의 성립을 위해 애쓴 공로를 인정해서 나에게 관작    

      (官爵)을 회복시켜주려고 했어.     


        나는 광해군 전하를 생각해 이를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조정의     

      신료들이 들고일어나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의 목을 베라고 야단들을 하였어.     


        심지어 나의 후처가 명나라 명문가의 딸이고 한인(漢人:명나라 사람)을     

      나의 종자(從者)로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난다고 들고일어나    

      이들을 상국(上國) 사람으로 받들어 본국으로 돌려보내라고 야단이었어.     


        나의 후처는 이 곳에 살지 못하게 하면 자결하겠다고 하고,     

      명 나라에서도 모문룡을 시켜 오랑캐에게 항복한 자를 왜 살려두느냐고     

      야단들이었지.     


        나는 이러한 조선 조야의 모습을 보며 정말 참기 어려운 모멸감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더구먼.     


        내가 죽는 것이 가족이나 나라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세상을 하직하게 되더구먼.     

 

 


   * <광해군의 대동법 시행 기념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서강]: 저는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도원수님이 더 오래 사셨더라면 후금(청)에 당한 병자호란의 치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벌써 새벽 닭 울음소리가 나네요.     

      도원수님과 작별할 시각이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교훈적인 말씀 한마디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첨부이미지

 

        [내촌]: 서강, 이런 귀중한 시간을 만들어 준 것 정말 고마워.     


      나도 요사이 이 나라를 보며 걱정스러움이 많이 있어, 그래서 이말 저말     

      여러가지 말을 하고 싶지만 시간도 없으니 두어 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광해군 전하가 나의 출병 때 주신 말씀 “관형향배(觀形向背)”를 생각하며,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아     

      지켜나가라는 말을 드리고 싶네.     

 

        [서강]: 도원수님, 오랜 시간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관형향배(觀形向背)”: 형세를 보아 유리하게 행동하라.     


        - 당시의 심하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선천부사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게 됩니다.    

 

 


            *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박진영의  호패>

            * 광해군 2년(1610), 호적과 호패제도 정비, 국가에 필요한 인력 확보 및 사회질서 회복>

 


            * <광해군은 즉위 직후(1608.5.7)  선혜청을 설치, 세제 개편으로 대동법 단행.>

 

 


   * <김홍도가  그린 '벼타작' 그림>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따라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마지막 네 번째 편을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렸습니다.


긴 글을 끝까지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윤 고문님의 귀한 글을 통하여 조선의 개혁 군주 광해군과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혹시 시간이 나시면 아래에 첨부한 동영상 자료 (1), (2), (3)

"후금의 건국과 광해군의 외교정책"(명지대 한명기 교수) 강의 내용을

들어보시기를 권유해 봅니다. 더위에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6년 6월 23일,   편집 및 사진자료를 제공하여...


이경환 드림

 

   * <서강 윤종영(전 교육부 역사담당 편수관) 고문님과 홍종남 여사님>

 

-<후금의 건국과 광해군의 외교정책 (1/3) >-

 

 

-<후금의 건국과 광해군의 외교정책 (2/3) >-

 

 

-<후금의 건국과 광해군의 외교정책 (3/3) >-

 

 

첨부이미지

 


-<Musical Secret Garden Violin y Piano full H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