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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周時經] 선생
1876. 12. 22 황해 봉산~ 1914. 7. 27 서울.
국어학자 · 국어운동가 · 교육자.
* 안녕하셨습니까? 아래 글은 지난11월 10일, 윤형섭 장관님이 저에게 보내주신 글입니다.
모처럼 '한사모'의 제365회 주말걷기(2014.12.14 실시)가 새로 개관한 '국립한글박물관'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참고가 되실까 해서 보내드립니다.
- 함수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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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큰 스승 주시경의 조용한 혁명
윤 형 섭(전 교육부장관, 연세대 명예교수)
선생의 호는 한힌샘이다. 크고 바르고 하나뿐인 맑고 깨끗한 샘, 한힌샘, 생각만 해도 정신이 맑아지고 온 몸이 상쾌해진다. 그래서 제자 중에서 흰돌 윤복영 같은 이는 자신의 호를 스승인 한힌샘의 밑바닥에 있는 하나의 작은 흰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짓기도 했다.
주시경은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불과 서른여덟 해 밖에 못살았으나 그의 한힌샘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줄기는 충실한 제자들을 통해 온 겨레에 퍼져 오늘날에도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그 은덕을 입으며 살고 있다.
나라사랑과 근대화를 열망하던 그는 나이 스물에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한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주변열강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는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라가 이미 망했는데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반포에서 밝힌 대로 말글을 통한 애민 애족사상의 구현을 몸소 실천하기 위하여 국어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가 최초로 내놓은 저서가 1905년 필사본 국문문법이었으니 29세 때의 일이요. 지금으로부터 109년전의 일이다.
1905년이면 어떤 때인가.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전하고 태프트ㆍ가쓰라 밀약을 통해 미국이 조선국의 대외주권을 일본에게 넘기면서 을사늑약의 체결이 강행되었고 종내에는 1910년의 경술국치에까지 이르도록 나라가 패망하기 시작했던 무렵이었다. 그러한 절망적이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20대 청년이 우리겨레의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이 나라와 겨레를 살려낼 것이란 확신 하에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치기로 결단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러나 1914년에 평생의 마지막 저서 ‘말의 소리’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겨우 서른여덟 이었다. 다만 위안이라면 예수보다 다섯 해를 더 살았음이다. 예수도 사후에 제자를 통해서 그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졌지만 한힌샘도 그의 제자들을 통해 사후에 온 나라에 그의 가르침이 퍼졌다. 그는 사력을 다해 뛰어다니면서 가르쳤다. 상동청년학원을 비롯하여 배재, 중앙, 보성, 휘문, 이화, 숙명 등 무려 열다섯 학교에서 가르쳤다. 주보따리란 별명을 얻은 것은 그래서였다.
그는 국어를 가르치면서 국어 보급 확산 운동만 한 것이 아니라 애국계몽 운동을 병행했다. 그의 보따리는 언제나 강의안으로 두둑했고 가슴은 애국애족으로 가득했으나 그의 호주머니는 언제나 텅 비어있었다. 그처럼 밤새워 연구하고 바쁘게 동분서주했어도 가족에겐 먹거리도 제대로 못 대주고 자신이 병들었을 때는 병원치료를 받을만한 형편도 못되었다. 극도의 무리와 가난이 결국 1914년 38세로 일기를 마감하게 한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는 음운론, 품사론, 구문론에서 음성학에 이르기까지 국문법을 체계화 하고 정리하는 큰 발자욱을 남겼다. 가급적 한자어를 폐지하고 우리말을 순화하며 한글을 풀어서 가로로 쓰는 혁명적 시도도 감행하였으나 끝을 못 맺고 유명을 달리 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그는 기라성 같은 제자를 남겨놓았다. 우리가 오늘날 이 정도의 편리한 문자생활과 IT생활을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세종대왕은 물론 주시경의 은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17년경에 발견된 ‛한글모죽보기’란 책에 의하면 앞서 말한 정규학교들을 빼고 그의 강습원에서 배운 제자만도 550여명에 이른다. 그 중 내가 잘 알거나 익히 들었던 대표적인 제자들만 언급한다면, 연세대 부총장과 한글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던 외솔 최현배, 조선독립동맹 주석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을 지낸 백연 김두봉, 고려대학교 초대총장 현상윤, 중앙대학교 국문학 교수 가람 이병기, 한독당선전부장과 임정의정원 외무위원장 엄항섭, 3ㆍ1운동의 주모자이며 조선어연구회 창설자였던 권덕규, 해방직후 경복중학교감 정충시, 협성학교 교장 윤복영, 우리나라 제1공화국 초기에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신성모, 그 밖에도 작가이면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던 횡보 염상섭 등이 있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국어사랑은 나라사랑이요, 국어운동은 독립운동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제자는 남한의 외솔 최현배요, 북한의 백연 김두봉이다. 외솔은 미군정 치하(1945.9.~1948.9.)에서 3년간, 그리고 6.25 전쟁 중(1951.1.~1954.1.) 3년간 도합 6년간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아 해방직후의 남한의 한글정책을 주도해 나갔다. 오늘의 한글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은 한힌샘의 제자 외솔의 공적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더욱이 20년간 한글학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스승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었다.
한편 연안파의 우두머리였던 북한의 백연은 국내외에서 독립투쟁에 헌신하다가 해방을 맞자 자신이 조직한 조선독립동맹을 이끌고 평양으로 들어가(1945.12.) 조선신민당 위원장으로 취임, 이듬해(1946.8.)에는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이 되었다. 후일(1958.3.) 김일성에게 숙청ㆍ축출되기는 했으나 그사이에 김일성대학 총장과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남한의 외솔과 짝을 이루어 스승 한힌샘의 한글화정신에 충성을 바쳤다.
내가 직접 확인하고 놀랐던 것은 1969년 미국 국회도서관에서 봤던 북한의 대학 교과서였다. 그때 이미 북한에서는 자연과학과 공과대학의 교과서들마저 모두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의 남한과는 지나치게 대조적이었다.
주시경의 조용한 혁명은 이처럼 제자들을 통해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김두봉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북한에서 한글 풀어쓰기의 문자혁명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정치적 몰락과 함께 김일성의 현실주의적 문자정책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남북한에서 실력 있는 두 한글학자가 한때 주장했던 풀어쓰기는 스승 주시경이 개발한 것으로서 세종대왕 이후 또 하나의 문자혁명이라 할 만하다. 해방직후 최현배가 펴낸 중등국어교과서에 한글 풀어쓰기의 인쇄체와 필기체의 글씨본이 있었다.
경복중학교 국어과 장모교사는 학생들의 숙제를 검사한 후 풀어쓰기 필기체로 싸인을 했고 많은 학생들이 그 흉내를 내며 풀어쓰기 필기체로 소통하면서 즐거워했다. 인쇄체의 실물 표본은 지금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장실에 걸려 있다.
그것은 1913년 조선어강습원 고등과 제1회 졸업생에게 수여된 증서이다. 제목이 ‛졸업장’대신 ‘ㅁㅏㅈㅎㅣㄴ ㅂㅗㄹㅏㅁ’으로 되어있으며 수여자는 ‘원장 남형우’가 아니라 ‘ㅓㄹㅓㄴ ㅅㅗㄹ ㅂㅓㅅ ㅁㅔ’ 그리고 ‘담당교사 주시경’대신 ‘ㅅㅡㅅㅡㅇ ㅎㅏㄴㅎㅣㄴㅅㅐㅁ’으로 되어있다.
얼마나 놀라운 혁명적 발상인가. 그 혁명 사업이 남북한에서 공히 수면 아래로 갈아 앉기는 했으나 그 정신만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도처에서 조용히 숨 쉬며 IT를 통하여 혁명을 진행시키고 있다.
조용한 혁명이란 포성도 굉음도 없고, 함성도 곡성도 없는, 그러면서도 겨레의 생각과 문화와 삶을 뿌리부터 선진화시키며 나라와 겨레를 지켜내는 역사적 작업이다.
조용한 혁명이야말로 영원성과 진정성을 담은 혁명이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주체세력도 권력의 찬탈도 없다. 한힌샘 주시경은 오늘도 제자들을 통해서 세종대왕을 앞에 모시고 전진하고 있는 겨레의 큰 스승이라 할 것이다.
(전 교육부장관, 연세대 명예교수.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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