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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이야기

언문자 금속활자

불꽃緝熙 2014. 10. 9. 19:36

 

언문자 금속활자

조선시대 / 금속 /국립중앙박물관

* 국립한글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서울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이다.

세계적인 독창성과 우수성을 자랑하는 문자 -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박물관이나 기념관 하나 없다는 반성에서부터 출발해서 만들어져 지난 10월 9일 한글날 문을 연 박물관이다.

'한글이 걸어온 길'을 주제로 해서 총 3가지의 소주제로 이루어져있는 상설전시실이 있고,

기획전시실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글놀이터 등 3곳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소개되었듯이

정조의 친필 한글 편지첩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타자기 등 한글과 관련한 진귀한 몇가지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

한글의 창제부터 오늘날까지 한글의 모든 역사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꽤 의미있는 답사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박물관인 듯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광화문 지하 광장에 있는 전시관인 <세종이야기>의 확장판인 듯한 느낌이다.

전시실 패널에 나와있는 내용도 그다지 "아하!?"할만한 새로운 내용은 없는 듯하다.

한글과 관련한 유물들이나 설명들이 많이 나열되어 있어서

차라리 상설 전시실 공간을 몇개의 작은 공간을 따로따로 분리해놓았으면 보다 집중된 분위기 속에서의 관람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흔한 말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만들었다.

​상설전시실에 소개되어 있는 전시물들을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주제대로 정리해보겠다.

​전시실의 주제는 크게 3가지로 이루어져 있고, 각 주제에 해당되는 전시물들을 볼 수 있다.

1부 :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드니.

​(한글 창제의 원리와 한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다.)

1443년(세종 25년), 한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창제된 한글은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딱하게 여겨 만든 애민 정신(愛民精神)의 산물이었다. 28개의 자모음으로 이루어진 한글은 5백여 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현대 언어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제자 원리를 갖추고 있으며, 당시의 성리학적 세계관과도 부합하여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한글은 언어의 한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분한 최초의 문자이다. 비슷한 소리를 나타내는 자음이나 모음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과학적 원리를 갖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30개를 넘지 않는 자모음만으로 수천 개의 음절을 만들 수도 있고,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의 아침을 마치기 전에" 배울 수도 있는 쉬운 문자이다. 한글은 한국어를 적는 완벽한 문자인 동시에 언어사적으로 길이 빛날 독창성과 과학적 원리를 갖고 있어, 세계의 언어학자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 문자이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여 옮김)

▼ 이두, 향찰, 구결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수단인 이두, 향찰, 구결의 차이점을 서로 비교해볼 수 있다.





​▼ 한글 창제의 과정을 보여주는 연표와 디오라마이다.





​▼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은 1446년 편찬한 훈민정음 해설서이다. 전체가 33장으로 이루어진 목판본으로 한글의 창제 원리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세종은 1443년에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해설서의 편찬을 명했고,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의 해설서가 편찬되었다. 그런 이유로 책 이름을 따라 『훈민정음』, 판각 원본이라는 점에서 훈민정음 원본, 한문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훈민정음 한문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문자의 사용법을 풀이해 놓은 책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른다. 책의 내용은 임금인 세종이 직접 쓴 서문과 예의, 집현전 학사들이 쓴 해례, 정인지의 서문으로 구성되었다. 서문은 오늘날의 머리말과 같으며, 예의는 새 글자 28자 각각의 소리값과 쓰는 방법을 설명한 부분으로 본문에 해당한다. 해례는 예의의 설명을 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해설한 부분으로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합자해, 용자례>로 구성되었다. 이 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진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62년에 국보 70호로 지정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지금은 세계 인류 문화 유산으로 귀중히 평가되고 있다.

2부 : 쉽게 익혀서 편히 쓰니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한글로 만들어진 서적이 편찬되고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한글이 자리잡게 된다.

전시실에서는 한글로 쓰여진 여러가지 서적들과 한글의 보급,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여러가지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다.)

한글은 조선 시대의 사회, 문화 전반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배워서 쓰기 쉬운 한글로 더 많은 정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것이다. 이로써 한글은 교육, 종교, 예술, 일상 생활에서 더욱 폭넓게 쓰이게 되었다. 한글을 널리 펴는 과정에서 크게 이바지한 것은 <언해(諺解)>이다. 조선 전기에 불교,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언해는 외국어 학습 교재나 의학 서적, 병법 서적을 비롯한 각종 실용 분야로 차츰 확대되었다. 한글은 조선 후기가 되면 일상적인 문자로 자리 잡게 된다. 한글이 직접적인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 쓰인 각종 문서나 편지 등을 비롯하여 문학 작품, 놀이 용구, 생활 용품과 같은 삶의 다양한 장면에서 한글이 사용된 것이다. 한편 19세기부터 들여온 근대식 인쇄 기술 덕분에 신문, 잡지, 신소설 등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한글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시작된 한글 기계화는 한글을 단순한 문자로 머물게 하지 않고 나라의 힘을 키우고 문화를 꽃피우는 원동력으로 탈바꿈시켰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설명을 그대로 인용하여 옮김)

​▼ 『용비어천가』

한글이 창제된 이후의 한글의 실용성 여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이다. 내용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번영을 기원하고자 만들어진 10권 5책 125장의 가사 문학집이다. 세종(1397년 - 1450년)의 명령을 받아 정인지, 권제, 안지 등은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 이성계, 태종 등 6대(代)의 사적을 찬양한 장편 서사시를 1445년에 완성하였다. 이를 보고 기뻐한 세종이 제목을 『용비어천가』라고 지어 1447년 간행하였다. 『용비어천가』는 한글로 쓴 최초의 가사 문학이며 한글 가사를 먼저 짓고 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특징이다. 한글로 쓴 현존하는 최초의 창작물로서 그 가치가 높다.

▼ 『행실도』

행실도는 유교의 기본 덕목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중국과 우리나라의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백성들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할 목적으로 만든 일종의 교화서로 1432년(세종 14년)에 간행된 『삼강행실도』가 최초이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삽화를 곁들인 것이 특징이며, 한글이 창제된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언해되었다.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이륜행실도』, 『속삼강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 행실도를 다양하게 편찬하고 보급하였는데, 이 내용은 병풍으로 만들어져 보급되기도 하였다. 아래 행실도의 그림은 <민손단의(閔損單衣)> 이야기이다. 민손은 공자의 제자이다. 어머니가 일찍 죽고 난 뒤 아버지가 후처를 취하였다. 계모는 자신이 데리고 온 두 아들만 귀하게 여기고 민손을 구박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민손이 아버지와 함께 수레를 몰고 가는데, 계모가 준 갈대옷을 입은 탓에 너무 추워서 말고삐를 놓쳤다. 앞뒤 사정을 알게 된 아버지가 계모를 내치려고 하자, 민손이 "어머니가 있으면 한 아들이 춥지만, 어머니가 없으면 세 아들이 추울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아버지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계모를 좇지 않았다고 한다.

​▼ 『청어노걸대』 목판

​만주어 학습서인 『청어노걸대』를 찍어내던 목판이다.

만주어 옆줄로 만주어를 해석해놓은 우리말 - 한글이 찍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목판 역시 여러 분야에서 한글이 점차 자리잡는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 정조 어필 한글 편지첩

정조가 큰외숙모인 여흥 민씨(정조의 어머니인 헤경궁 홍씨의 큰오빠인 홍낙인의 처)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첩(牒)이다. 정조가 원손이었던 당시부터 재위 22년(1798년)까지 쓴 예필(睿筆 : 세자나 세손 시절에 쓴 글) 2점과 예찰(睿札 : 세자나 세손 시절에 쓴 편지) 6점, 어찰(왕 즉위 후 쓴 편지) 8점, 총 16점이 모아져 있다. 이 자료는 정조가 한글로 쓴 편지라는 점뿐만 아니라 연령대에 따른 정조의 한글 필치 변화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조선 후기 왕실 편지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18세기 국어사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를 지닌다. 편지의 내용은 주로 큰외숙모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재위 시절에 쓴 편지 가운데 12월에 쓴 편지 4점에는 물목 단자가 딸려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보도자료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옮김)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궁중과 같은 최상류층에서도 한글이 자리잡고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국립한글박물관이 이번 상설전시실에서 보여주고 있는 전시물 가운데 가장 역사성이 높은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번에 공개된 여러 편지들 중 아래 사진에 나와있는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섣달 추위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내년은 어머님 육순이시니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심정을 어찌 다 형용하여 아뢰겠습니까.

새해 초 경사 때에 들어오시면 뵐 수 있을까 하여 든든하고 기다려집니다.

세찬(歲饌) 몇가지는 변변치 않으나 해마다 보내던 것이기에 보내오니 수대로 받으옵소서.

새해가 멀지 아니하였사오니 내내 평안하시기를 바라옵니다. 계축 납월 염일 (1793년 12월 20일)"

물목단자(편지 윗부분에 작은 글씨로 쓰여있는 부분으로 안부 편지를 쓰면서 큰외숙모에게 같이 보낸 선물의 목록이다.)

"인삼 한 냥, 돈 일백 냥, 쌀 한 섬, 솜 다섯 근, 큰 전복 한 접, 광어 두 마리, 추복 열 접, 생대구 한 마리, 청어 일 급, 살진 꿩 한 마리,

생치(生雉) 세 마리, 곶감 두 접, 새우알 석 되, 꿀 다섯 되, 전약(煎藥) 한 그릇, 민강(閩薑) 세 근, 서울산 담뱃대 한 개, 담배설대 다섯 개."

▼ 명성황후가 가족에게 쓴 편지

▼ 『천로역정(天路歷程)』

영국의 종교 작가 존 버니언이 1678년 출간한 『The Pilgrim's Progress』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순례자가 여러가지 고난을 겪으며 천국에 이르는 여정을 다루었으며, 인간의 죄를 하나님의 은총과 대비하여 표현한 종교 문학이다.

이 작품은 당시 선교사 게일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었지만,

조선인이 교정에 참여하고 19세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 김준근이 삽화를 그렸기에,

당시 조선인의 삶과 사상, 문화를 그대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가치가 인정된다.

▼ 독립신문

1897년 발행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발행 신문이자 순한글 신문으로서 띄어쓰기를 최초로 하였다.

▼ 『금수회의록』

1908년에 출판된 안국선의 신소설이다. 주인공이 꿈 속에서 금수회의소라는 곳에 가서 동물들이 토론하는 장면을 목격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물들의 토론을 빗대 인간의 악행과 위선을 풍자하고 비판한 작품이다. 1909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판매 금지되었던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살펴보면

인간의 불효함을 비판하는 까마귀의 이야기 <반포지효>,

인간의 간사함을 비판하는 여우의 이야기 <호가호위>, 인간의 견문이 좁음을 비판한 개구리의 이야기 <정와어해>,

인간이 말은 달콤하게 하나 속을 칼과 같이 남을 해칠 생각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비판한 벌의 이야기 <구밀복검>,

인간의 장난스러움과 가벼움을 비판한 게의 이야기 <무장공자>, 인간의 권력욕을 비판하는 파리의 이야기 <영영지극>,

인간의 가혹함과 탐욕을 비판하는 호랑이의 이야기 <가정맹어호>, 인간의 음탕함을 비판하는 원앙의 이야기 <쌍거쌍래> 등

8동물의 이야기들과 토론이 실려있다.

3부 세상에 널리 퍼져 나아가니

(한글의 표준화 작업인 사전 편찬,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 알앚는 한글의 특성 등을 살펴볼 수 있다.)

1894년, 한글은 드디어 조선의 공식 문자로 선언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국립 한글 연구 기관인 국문 연구소가 설립되어 우리말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3년 만인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우리말과 한글의 사용을 금지당하게 되었다. 국어학자들과 국어 연구 단체들은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말과 한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국어 문법서를 비롯하여 한글 교육을 위한 교재를 끊임없이 만들었으며, 최초의 국어 대사전인 『(조선말)큰사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끈질긴 노력으로 맺은 열매들이 우리말과 한글을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뿌리가 되었다. 현대에 들어서 한글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한글은 단순한 의사 소통의 수단을 뛰어넘어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도 매우 적합한 문자로 그 가치를 다시 한 번 인정받고 있다.

​▼ 『말모이』와 『조선말큰사전』의 원고



▼​ 한글의 기계화의 상징, 타자기

아래 사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타자기로 알려진 송기주 4벌식 한글타자기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송기주 박사의 유가족들이 기증한 것이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여 옮김) 그동안 송기주 박사의 아들인 송병훈 씨가 소중히 보존해온 이 타자기는, 송병훈 씨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족들이 국립한글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새로운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송기주 박사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주립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한국 지도를 최초로 서구식 입체본으로 떠내기도 했다. 송기주 한글타자기는 미국 유학 시절 발명한 것으로 1933년,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에서 제작, 판매되었다. 송기주 한글타자기는 모음의 위치[가로 모음(ㅏ), 세로 모음(ㅗ), 중간 모음(ㅢ)]에 따라 각각 다른 3벌의 자음 글쇠와 1벌의 모음 글쇠로 이루어져 글씨 모양이 고르고 아름답다. 또한, 글쇠의 동작이 자음은 부동, 모음은 전진식이어서, 스페이스바와 시프트키의 사용 빈도가 높다는 특징도 있었다. 송기주 한글타자기는 김준성 타자기(1945년), 공병우 타자기(1950년) 등, 이후의 한글타자기가 발전하는 데 영감을 제시한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타자기를 국립한글박물관에 기증한 송기주 박사의 손자인 송세영 씨는 “한국전쟁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선 불행하게도 후퇴하던 북한군에 의해 함께 북으로 끌려가셨다. 그 와중에 아버지께선 다행스럽게 탈출하셨으나 할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이때 할아버지와 헤어지신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이 타자기를 내어보며 그리워하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이 타자기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그 의미를 모두 함께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이번에 새롭게 개관한다는 국립한글박물관의 소식을 들었다. 국립한글박물관에 타자기를 기증하여 타자기의 가치를 더욱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지를 가장 올바르게 이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여 기증을 결정했다.”라며 기증 동기를 밝혔다.

​▼ 디지털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많이 사용되는 각종 한글 자판들을 비교해보는 체험

▼ 또다른 우리말, 우리글 : 디지털 북한에서 쓰이는 말과 각 지역의 개성을 보여주는 지역어들을 만날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전시물들은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 박물관 소개 > 박물관 자료 메뉴에서

<도록(한글이 걸어온 길)> 파일 내려받으면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자세히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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