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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자격

불꽃緝熙 2020. 5. 12. 13:58

선진국의 자격


  지난 4월 4일 자 미국 신문 뉴요커<The New Yorker>에 실린 한 기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 유일의 슈퍼 파워다. 트럼프의 미국은? 별로다."란 제목을 달았다. 인류 역사상 군사, 경제, 과학, 기술, 학문,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만큼 강하고 많은 것을 성취한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미국이 코로나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를 내는 수치를 당하고 있다. 다만 인구 100만 명당 감염자 수는 스페인보다 적고, 사망자 수도 244명으로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보다 적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사망자의 수는 베트남 0명, 방글라데시 1명, 중국 3명, 한국 5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아서 자존심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강대국이라 하기에는 "별로다" 정도가 아니라 "전혀 아니다"라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물론 대통령이 잘못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세계 최대, 최고(最古)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로 뽑힌 대통령이 아닌가?


  물론 자존심이 상한 나라는 미국뿐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등 선진국으로 알려진 나라들도 후진국으로 알려진 인도, 방글라데시, 대만의 수백 배에 이르는 사망자를 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한 나라를 강대국 혹은 선진국으로 만드는가? 군사력, 경제력, 지식 수준, 교양 수준만 강하면 선진국인가? 미국 뉴저지주의 한 작은 교회에서는 교인 6명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고, 뉴욕의 경우에는 한 무인도에 집단 매장지를 급조해야 했으며, 냉장차에 시체를 쌓아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주로 흑인, 스페인계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런 차별은 영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서, 인도, 파키스탄, 아프리카 등에서 온 이민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망자가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죽은 사람과 그 가족들에게 그들 나라의 그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 영향력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많은 국민이 전염병에 걸리고 죽는데도 선진국인가? 코로나19 전염병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물론 치료 약이나 백신을 선진국들이 먼저 개발할 수 있고, 그러면 다른 나라들은 그들에게 손을 벌리게 될 것이므로 또다시 선진국들은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볼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손실을 충분히 만회해서 여러 가지 특혜와 특권을 누리고 자존심을 유지할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 것이니까 좀 일찍 죽었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선진국이란 소수의 운이 나쁜 사람들은 좀 일찍 죽더라도 나머지가 잘 사는 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좀 더 비꼬아 말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좀 일찍 죽더라도 돈 있고 "우수한" 인종에 속한 사람들이 멋지게 그리고 오래 살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하여 정부가 내린 활동제한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인권, 자유, 사생활, 풍요, 편리, 자존심, 쾌락, 교양 등은 모두 다 좋은 것들이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우선 생명이 붙어 있어야 누릴 수 있다. 가끔 인권, 자유, 자존심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인권, 자유, 자존심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런 특수한 행위는 다수를 위한 희생일 때만 인정될 수 있고, 특별한 소수의 예외적인 행위만 존중될 수 있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역시 사람의 생명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이번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를 계기로 선진국에 대한 정의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모든 사회가 예외 없이 존중하고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사람의 생명이란 것에는 전 인류가 동의한다면,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진국의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수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뉴질랜드, 대만 같은 나라들은 사망자를 줄였는데,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수많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전염병으로 죽게 만들었다. 이런 나라들은 다른 것들이 아무리 우수해도 선진국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한국이 그런 나라들의 대열에 끼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글쓴이 / 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부산 고신대 석좌교수

·전 동덕여대 총장

·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전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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