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니아스 지역도 이슬람의 수중에 떨어졌고, 살라딘의 조카인 ‘알
아지즈 오트만’(al-'Aziz 'Othman)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이집트의 ‘술탄 엘 카멜’(Sultan el-Kamal)과 그의 형제인
다마스커스의 통치자 ‘알 모아티스’(al-Moatis)에 의해서 요새가 지어지게 되는데 이유인즉 1227년에 독일황제 프레드릭 2세의 군대가
성지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이 다마스커스를 공격하고 정복할 것을 두려워한 알-모아티스는 마스커스에 이르는 도로를 방어하기 위해 그의
동생인 ‘알-아지즈 오트만’(al-'Aziz 'Othman)의 도움을 얻어 1227년 요새를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위기의 시기가 지나자,
‘아비우비드 왕국’(Ayyubid dynasty. 이집트, 시리아, 예멘과 북 이라크를 12-13세기에 걸쳐 통치한 크르두의 이슬람 왕국)은
요새를 보강하고 요새의 서쪽부분을 확장하였다. 요새의 건축은 약 1년 동안 계속되었고, 1230년에 마무리되었다.
그 후 십자군은 1253년에 요새를 정복하기 위해 다시 되돌아왔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몽골족이 팔레스티나를 침략 한 후 7년 후에 요새는 파괴되었다. 마멜루크 군대(Mameluke. 이집트의 마멜루크는 1250년에서 1517년까지 지속되며, 이때 팔레스티나를
지배했다.)는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중의 하나로 꼽히는 ‘Ein Jalud' 전투에서 몽골 군대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가장 두드러진 마멜룩크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바이바르스’(Baybars. 1223-1277. 1260-1277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한 4번째 마멜룩크 술탄)는 요새를 그의 제2인자 사령관이었던 ‘빌릭’(Bilik)에게 넘겨주었다. 새로운 통치자는 대대적인
재건축을 단행하였는데, 요새는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아름다운 탑’이라고 부르는 반원형의 탑을 포함하여 가장 웅장하였다. 빌릭은 그의 업적과
그의 술탄의 이름을 칭송하기 위하여 1275년에 인상 깊은 비문을 만들어 기념하였고, 이 비문은 최근에 고고학 발굴 작업을 하면서 바이바르스
술탄의 상징인 돌에 새겨진 사자상과 함께 발굴 되었다.
13세기 말엽, 십자군의 항복과 성지에서 최종적인 퇴각 후 요새의
명성은 차츰 잊혀지게 되었다. 15세기에 요새는 반란군들의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 버려졌고, 그 후에는 목동들과 그의 가축들이
가끔씩 들르는 대피처가 되었다.
아래 사진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은 헤르몬 산 방향, 오른쪽 아래쪽으로 나 있는 길은 바니아스로 향하는 길.
아래 도면에서 1. 북서쪽
탑과 성문 2. 바이바르스 비문 3. 서쪽 탑 4. 진입도록 5. 남서쪽 탑
6. 물 저장소 7. 공용
음용 분수 8. 아름다운 탑(반원형 탑) 9. 해자 10. 내성(성곽의 본관) 11. 전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