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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2391호(윤종영의 역사이야기(3)/'16/6/16/목) 본문

박물관 이야기

한밤의 사진편지 제2391호(윤종영의 역사이야기(3)/'16/6/16/목)

불꽃緝熙 2016. 6. 16. 19:42

 

 

 

 

한밤의 사진편지 제2391호 ('16/6/16/목)

 

[한사모' 공식 카페] - '한밤의 사진편지 romantic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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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덕궁 주합루도 - 규장각으로 사용한 주합루 그림 _ 부용지와 영화당이 보인다.>

   * <金弘道筆 昌德宮 宙合樓圖: 조선 정조 즉위년(1776), 143.2 x 115.5>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 광해군 시기의 국제정세와 관형향배(觀形向背) ③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



            * 때 :    2015년 9월 9일(음 7월 27일) 밤10시



            * 장소 : 창덕궁 영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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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종영 (한사모 수석고문, yooncy1936@hanmail.net )


 


 




   * <광해군 묘 : 왼쪽이 광해군 묘, 오른쪽이 문성군부인 유씨 묘>

    

 

 

        [서강]: 도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만주 땅을 밟으면서 겪었던 어려웠던    

      일이 생생하게 회상이 됩니다.    


        그러면서 궁금한 것은 근 한 달 동안 후금 영토를 진군하며 여진 부대와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는지요.     

 

        후금에서도 조선군이 명 나라를 도와 압록강을 건넜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조선 부대에 접근하여 우리를 회유하거나 우리의 뜻을 시험하려    

      는 시도는 없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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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나는 출발할 때 전하로부터 우리가 명군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요동에 출병했다는 사실을 후금에 내왕하는 회령에 사는 장사꾼을 통해 후금국    


      누루하치에게 통보했다는 말을 들었지. 그래서 나는 압록강을 건넌 후 서강이     

      말한 그런 기대라 할까, 이들로부터 무슨 연락이 있을까, 그런 연락이 오면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했지만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어. 뒤에 내가 후금에    

      투항한 후에 그들로부터 들은 것은 그들도 우리에게 연락할 생각을 하고 여러     

      방법을 생각했지만 우리주변에 명군이 많이 내왕하고 우리 의중을 정확이 몰라    


      섣불리 접근했다 오히려 명군에게 역으로 이용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     

      서 먼저 명을 공격한 후, 조선군을 회유 투항시키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였었     

      다고 하더군.     

 


 



   * <조선의 강홍립군과 후금군이 대립한 모습 :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 1619년.>

   * 1619년 압록강을 건넜던 강홍립 휘하의 조선원정군이 후금군과 맞서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앞줄에는 총을 든 조총수, 뒷줄에는 활을 든 궁수가 도열해 있다.: 정조때 간행된 충렬록.

 

 

        [서강]: 어떻든 이런 상황에서 조명요동원정군은 흥경노성으로 진격하다    

      후금군의 매복 기습을 받아 섬멸적인 타격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조선군은 후금에게 투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때 상황을 떠     

      올리시기 괴로우시겠지만 그 과정을 상세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부탁의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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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서강 말마따나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당시 상황을 생각하기    

      싫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이번기회에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이 있어 이를     

      바로잡는다는 생각에서 한번 떠올리며 이야기 해보겠네.    


        좀 전에 이야기 중에 나왔지만 조선군이 만주에 들어와 근 한 달 동안은    

      후금군을 만나지 못하다 처음으로 우리 군이 후금군과 조우한 것이 3월 2일,     

      심하(深河)에서였지.     


        당시 후금군은 600여기의 기마병으로 정찰차 우리부대 앞으로 진격하여 우리    

      부대를 공격하였어. 우리는 조총부대를 전방에 배치, 후금 기마병에 즉각 반격    


      을 하자 이들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패주하였서. 나는 이 보고를 받고     

      현장에 급하게 달려가 생존한 후금군 부상자들을 직접 만나 살펴보고 이들로     


      부터 이들이 조만간 본격적인 공세가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지. 그래서     

      나는 본영으로 돌아와 제장들에게 적의 공세가 있을 것이니 철저히 대비하도록    

      지시를 하였어.    



 



                   * <후금(청)의 태조 누루하치(愛新覺羅努爾哈赤)>

 

 

        우리는 그날 조심스럽게 심하(深河)를 떠나 명군의 뒤를 따라 전진하여 이틀    

      뒤에 부차(富車)에 도착하여 진영을 편성하는데 후금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어.    


      우리는 이곳에 도착한 부대 좌편 언덕 위에 좌영을, 우편 언덕 위에 중영을,     

      후방 언덕 위에 우영을 설치하고 막 휴식을 취하려는 데 전방의 명군 진영에서    

      화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전 진영에 전투 준비를 명하였지.    


        그런데 이 전투는 역사적으로 중국 대륙의 주인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게 되는    

      대세를 결정지은 전투이지만 이미 패전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어. 명군    


      은 병력수도 자칭 47만이라 호언했지만, 실질적으로 10만 미만에다 병사들의     

      자질도 열악하였고, 장비에서도 조선군의 화력에 의존할 정도로 화포하나 제대    

      로 갖추지 못한데다 지휘부도 제대로 통제된 단결력을 갖추지 못하였어.     


        이에 비해 후금국의 팔기병은 오랜 공동생활을 통해 단련된 철기정예병    

      (鐵騎精銳兵:강철 같은 기마대)으로 병력 수는 명군보다 적었지만 이미 명군을    

      여러 면에서 압도하고있었지. 더욱이 원래 명군은 4영으로 편제되어 각 진영은    


      3월 1일 동시에 발진하여 흥경노성을 동서남북으로 4군영군이 포위공격하기로     

      약조되어 있었는 데 명장 두송(杜松)이 선공하여 공을 세우겠다는 공명심을     

      가지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하루 전에 출발하여 무리하게 진군하다 이들의     


      진군을 예견하고 살리호(薩爾滸) 부근에 매복해있던 귀영가(貴盈哥:누루하치의    

      차남)가 이끈 후금 철기군의 기습을 받고 명군은 전멸하였지.명장 두송도 전사    

      하고, 귀영가는 그 여세를 몰아 유정이 이끈 명 나라 군을 기습하였어. 그런데    


      명나라 군은 부차 부근의 여진부락을 약탈하느라 부대가 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몰려다니는 판이니 철기군의 기습공격에 대항다운 대항도 못하고 거의 전멸 당    

      하고 말았어.    

 


 



      * <임진왜란 이후 더욱 강성해진 여진족은 후금을 세워 중국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다음 이들은 공격의 방향을 조선군으로 돌린 것이지. 그래도 우리 군은    

      조총부대를 선두에 세우고 장창부대와 뒤에 화포부대로 진영을 갖추고 돌격해     


      오는 후금의 철기군을 공격하자 후금철기병도 많은 사상자가 생겨 돌격이 주춤    

      하였지. 그런데 그때 거센 서북풍이 몰아쳐 부근의 불,연기와 먼지가 조선군을    


      덮쳐, 조총수들의 시야를 가렸고 화포를 장약할 수 없었으니,결국 하늘이 그들    

      을 도왔다고나 할까, 결국 조선군의 좌. 우 진영은 철기군에 철저히 유린 당     

      하고 말았어.    


        나는 중군에 있으면서 중군을 이끌고 최후 결전을 할까, 하면서도 전하의    

      밀지를 생각하며 이미 명군이 궤멸되는 모습을 보았기에 가능하면 이 상태에서    

      사상자를 줄이고 후금과 우의를 맺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그때 마침 후금진영에서 연락이 와 여진과 내왕이 있는 역관 하세국(河世國)을    

      찾는다 하여 마침 내 곁에 있었던 하세국을 후금 진영으로 보냈지. 얼마 후     

      하세국이 와 후금의 귀영가 장군이 “두 나라 사이에는 일찍이 원한이 없으니     


      지금 화의를 맺으면 병력을 거둘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너의 대장을 만나    

      고 싶다”라고 화의 뜻을 알려와 나는 화의를 결심하고 제장 회의를 소집해 이    

      사실을 알리고 지금 이들과 싸워 후퇴로를 뚫고 후퇴를 한다하여도 압록강까지    


      무사히 갈 수 없는 상황이니 이들의 제의를 받아 화의를 맺는 것이 장병들을     

      살리고 앞으로 후금과의 관계를 위해서 올바른 길이라고 선언하였지. 다행히     

      제장들도 모두 나의 뜻을 따라 주었어.그래서 나는 부원수 김경서 장군을 후금    


      진영으로 파견하였지. 김경서 부원수는 후금의 귀영가 장군을 만나 이 전쟁을     

      종식 시키기로 합의하고 양국의 화의를 맺어 우리는 후금에 투항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     

 


 



   *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요동 : 일본국회도서관 대청광여도 >

 

        돌아온 김경서 장군은 후금의 귀영가 장군을 비롯한 지휘부나 장병들이 우리    

      를 대하는 것이 참으로 우호적이어서 우리가 화의를 결정한 것이 잘한 것이라     

      생각 한다고 보고 하며 더욱이 전날 저녁 귀영가 장군이 자기를 초청해 단둘이    


      한 방에서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해 주어, 이들이 우리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    

      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해 나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어.    

 

        나는 다음날 (3월 5일) 후금군의 안내를 받아 흥경로성으로 들어가 후금의    

      누루하치를 만났지.나는 우리가 출병하게된 경위와 전하의 뜻을 전하고 앞으로    

      양국 간에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게 하여 달라는 진언을 하였지. 누루하치는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고 앞으로 양국의 우호관계 유지를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믿음 있는 답을 주었어. 또 우리 장병들의 본국 귀환을     


      간곡하게 청원하였고, 누루하치는 앞으로 명 나라와의 전쟁이 종식되면 전원     

      귀환시켜 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었어.     

 


 



   * <요동지도 大明輿地圖 중: 명나라 학자 李默이 1536년 제작, 미 의회도서관 소장>

 

 

        [서강]: 외국을 도와주기 위해 파병된 원정군이 적군에 투항한 것이 흔치않은    

      일인데 이러한 일을 부대를 이끌고 직접 겪으신 도원수님의 고뇌와 가슴 아픈     

      일이 엄청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투항 후 후금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셨는지요? 장병들의 귀국문제 등 참 어려운    

      일이 많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 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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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서강도 알고 있겠지만 여진족은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오랫동안     

      교류를 하고 있었기에 서로를 비교적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부 부족은     


      우리를 상국으로 섬기기도 하여 이들은 우리 문화에 대해 상당한 동경(憧憬)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인지 그들은 우리를 비교적 잘 대접하였어.     


        나에게는 거주할 집뿐만 아니라 시종도 몇 명 배속하여 생활에     

      어려움을 갖지 않게 하면서 부하 제장도 가까운 곳에 거주하게 하여 나와     

      수시로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었어.     


        또 이들은 나와 약속했던 대로 우리 장병들을 분류하여 각 지역의 촌락으로    

      분산시켜 거주하게 하였고 총포기술자만은 자기들의 팔기병에 배속시켜 신무기    

      개발에 활용하였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포로생활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     

 

        어떻든 이들의 이와 같은 처우는 그들이 명나라와 대치하여 국운을 건 싸움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정보와 지원이 필요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고도     

      생각되지만.     

 

        좀 뒤의 이야기이지만 나를 제외한 부하 제장들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귀국하였고 일부는 이곳에 남아 뿌리를 내리기도 하였어.     

 


 


            * <김윤겸(1711~1775)의 호병도(청나라 병사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강]: 도원수님께서 후금에 머무는 동안 국내 소식은 좀 듣고 계셨는지요?    


      전하와는 어떠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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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나는 전하의 하해(河海)같은 은혜와 보살핌을 받아 후금에 머물면서도    

      정말 고국의 소식을 제대로 들으며 잘 지낼 수 있었어.    


        좀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후금과 화의를 맺고 투항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조정의 모든 중신이나 사대부들은 나에 대한 비난의 소리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을 처벌하라는 소리가 조야(朝野)를 뒤흔들었고 더욱이 명 나라는     

      심하 전투의 패전이 나의 투항에 있었다고 하며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고     


      나의 가족 처벌까지 요구하며 우리를 괴롭혔지만 전하는 이러한 조야와 명의     

      압력 속에서도 나의 가족을 끝까지 보호하여주셨지.     


        그리고 얼마 뒤에는 나의 가족들에게 나와의 내왕을 허용해 서신은 물론     

      물품까지 주고받을 수 있게 하였어.    

 

        나는 전하를 위해 후금 내부의 모든 정보를 수시로 종이로 꼰 노끈을 이용해    

      전하에게 보고 드렸지. 전하는 내가 올린 정보를 북방 정책을 수립하는데 귀중    

      한 자료로 이용하였다고 답신을 보내주시곤 하였어.     

 


 


   * <광해군과 동의보감, 세제개혁정책 대동법>

 

 

        [서강]: 도원수님이 전하에게 보내주신 정보는 당시의 긴박한 조선, 명, 후금    

      삼국 사이를 놓고 고민하던 전하의 대 북방 정책 수립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보내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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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내가 보낸 정보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후금     

      국내의 정세를 보며 후금의 군세가 앞으로 명나라를 압도할것으로 예측하였어.    


      그래서 앞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중원 대륙의 주인이 명 나라에서 후금으로     

      바뀔 것임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확신할 수 있도록 말씀드리고, 전하는     


      이미 기울어가는 명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워 나라의 운명을 걸고 있는     

      조정 신하를 설득하시어 명 나라와는 거리를 두고 후금과의 우의를 유지하도록    

      말씀드렸지.     


 


            * <강세황의 사로삼기첩(梭路三奇帖): 사행의 현장을 담은 역작 >

 

 

        [서강]: 정말 도원수님이 당시의 명과 후금 관계를 정확하게 분석 예측하셨네요.    

      물론 역사에 가정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도원수님이 일찍 귀국하시어 전하의     


      측근에 계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계속된 이야기가 도원수님이 힘드신     

      상황 속에서 긴박하게 하셨던 일이어서 좀 힘드시지요?    

 

      분위기를 좀 바꾸는 의미에서 약주 한잔 드시지요. 저두 한잔 하겠습니다.     


      이야기 방향을 좀 바꾸어 보겠습니다. 도원수님 그곳에 머무시면서 새로운     

      부인을 얻으셨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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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서강 그런 기록을 어디서 보았어? 과정은 어떠하던 그것은 사실이야.    

      나는 그곳에서 지내면서 가능하면 주변 인물들과 담을 쌓고 조용히 지내며     

      국내 정세와 이와 관련된 국제 정세에만 신경을 쓰며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후금 조정의 실력자들이 수시로 나를 찾아 와 명 나라와 관련된     

      국제 문제에 자문을 구하곤 하였어. 그러면서 자기 나라에 귀화해서 앞으로     


      자기들과 손을 잡고 중원에 진출, 지배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은근히     

      권유하곤 했지. 그런데 이들은 문화적으로 열등감이 있어서인지 한족(漢族)이     

      나 조선인에게 은근히 자기들의 복식이나 머리모양을 따르도록 유도하곤 했어.    


        나에게도 복식뿐 아니라 머리모양을 상투를 짜르고 자기들의 머리 모양인    

      체두변발(剃頭辯髮)을 은근히 권하곤 했지만 나는 단호히 우리 것을 지킨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나는 언젠가 귀국해서 나라와 전하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했지.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후금의 누루하치는 나를 회유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혼자 지내는 나를 위해 여진족이 아닌 당시 요동지휘사(遼東指揮使)로 있다가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살고 있는 한족(漢族) 명문 출신인 동기공     

      (董奇功)의 딸을 나의 부인으로 내정하고 혼례를 치르도록 하였어.나는 국내에    


      부인이 있었지만 누루하치의 권고를 뿌리치기 어려워 혼례를 치렀지. 이들은     

      나에게 종복까지 전부 한족 출신으로 배속시켜 주었어. 물론 이런 것이 나를     


      귀화시키려는 숨은 의도를 가지고 한일이라도 나는 부담스러우면서도 어떻든     

      고마울 수 밖에 없었지.     


        뒤에 혼례소식을 국내의 집에 알렸고 집사람도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고마운 일이라고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어.     

 


 


   * <도원수 강홍립의 묘>

 

 

        [서강]: 도원수님, 국내의 반정(反正) 소식은 언제 들으셨고 들으신 후 어떻게    

      처신하셨는지요? 또한 광해군 전하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는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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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 서강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나는 전하와는 단순한 군신관계    

      (君臣關係)가 아닌 정말 피를 나눈 형제라면 불경스럽고 친족같은 사이였다고     


      할 수 있었지.전하는 나를 믿고 나라의 운명을 건 원정군 도원수 자리를 맡겼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나를 전폭적으로 믿고 밀어주셨지.    

 

        그래서 나는 후금 땅에 머무르면서도 마음 편히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정(反正) 소식이 전하 재위 15년(1623)에     

      전해젔어.     


        그해 3월 12일 일어난 일인데 근 한 달이 지나 나에게 전해젔어. 나에게는    

      기절할만한 소식이었지만 후금 조정에서도 정변 소식이 큰 충격이었지. 이는     


      후금은 전하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어 온 국력을 명 나라 문제에 전념    

      할 수 있었는데 조선의 정변으로 남쪽에 새로운 위협 세력이 등장하는 큰 변화    

      가 일어난 것이지.    

 

        이 반정은 서강이 잘 알고 있을 것이나 간단히 이야기해 보면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계파인 이귀, 김류 등이 중심이 되어 봉기,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내세워 광해군 전하를 폐하고 능양군(綾陽君:李倧:광해군의 조카)     

      을 새 왕으로 즉위시켜 정권을 장악한 것이지.    


        전하를 쫓아낸 반정군은 자신들의 거사이유로 내세운 것 중 중요한 것을 보면    

      폐모살제(廢母殺弟), 토목공사(土木工事),명국배신(明國背信) 등을 들었는데,     


      폐모살제의 경우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전제군주체제하에서 왕의 후계자 경쟁에    

      등장한 왕족들이 생명을 부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 전하의 뒤를 이은 인조    

      자신도 자기 아들인 소현세자와 며느리, 숙부인 흥인군을 죽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토목공사는 재원조달을 위해 무리수를 둔 면이 있지만 임란으로 완전히    

      소진된 궁궐을 비롯한 국가시설 복원은 국가경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    


      었고, 명국배신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물들 지배계층이나 백성들의 정서에     

      는 배치되었으나, 당시 시대 상황에서 국가와 배성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자     

      조선의 역대 군주 중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라 높이 평가할 수 있지.     

 

        반정 이후 후금 조정은 조선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를 찾아 많은 것을     

      의논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응한다면 내가 선도하여 후금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진격하여 인조를 내쫓고 폐위된 광해군 전하를 다시 복위시키자고     


      하는 것이었어. 그러나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서, 백성이 당할 전화(戰禍)와     

      전하가 당할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었지.     

 


 


   *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 북관도첩 중 여진족을 물리친 김종서 장군의 일화를 그린 그림>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따라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세 번째 편을 회원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립니다.


윤고문님의 귀한 글을 통하여 조선의 개혁 군주 광해군과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혹시 시간이 나시면 아래에 첨부한 동영상 자료 (1), (2), (3)

"여진족의 성장과 조선의 위기"(명지대 한명기 교수) 강의 내용을

들어보시기를 권유해 봅니다. 더위에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6년 6월 16일,   편집 및 사진자료를 제공하여...


이경환 드림

 


   * <대동법 시행 기념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여진족의 성장, 조선의 위기 (1/3) >-

 

 


-<여진족의 성장, 조선의 위기 (2/3) >-

 

 


-<여진족의 성장, 조선의 위기 (3/3) >-

 

 

첨부이미지

 


-< Secret Garden Fu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