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촌]: 서강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나는 전하와는 단순한 군신관계
(君臣關係)가 아닌 정말 피를 나눈 형제라면 불경스럽고 친족같은 사이였다고
할 수 있었지.전하는 나를 믿고 나라의 운명을 건 원정군 도원수 자리를 맡겼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나를 전폭적으로 믿고 밀어주셨지.
그래서 나는 후금 땅에 머무르면서도 마음 편히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정(反正) 소식이 전하 재위 15년(1623)에
전해젔어.
그해 3월 12일 일어난 일인데 근 한 달이 지나 나에게 전해젔어. 나에게는
기절할만한 소식이었지만 후금 조정에서도 정변 소식이 큰 충격이었지. 이는
후금은 전하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어 온 국력을 명 나라 문제에 전념
할 수 있었는데 조선의 정변으로 남쪽에 새로운 위협 세력이 등장하는 큰 변화
가 일어난 것이지.
이 반정은 서강이 잘 알고 있을 것이나 간단히 이야기해 보면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계파인 이귀, 김류 등이 중심이 되어 봉기,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내세워 광해군 전하를 폐하고 능양군(綾陽君:李倧:광해군의 조카)
을 새 왕으로 즉위시켜 정권을 장악한 것이지.
전하를 쫓아낸 반정군은 자신들의 거사이유로 내세운 것 중 중요한 것을 보면
폐모살제(廢母殺弟), 토목공사(土木工事),명국배신(明國背信) 등을 들었는데,
폐모살제의 경우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전제군주체제하에서 왕의 후계자 경쟁에
등장한 왕족들이 생명을 부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 전하의 뒤를 이은 인조
자신도 자기 아들인 소현세자와 며느리, 숙부인 흥인군을 죽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토목공사는 재원조달을 위해 무리수를 둔 면이 있지만 임란으로 완전히
소진된 궁궐을 비롯한 국가시설 복원은 국가경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
었고, 명국배신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물들 지배계층이나 백성들의 정서에
는 배치되었으나, 당시 시대 상황에서 국가와 배성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자
조선의 역대 군주 중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라 높이 평가할 수 있지.
반정 이후 후금 조정은 조선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를 찾아 많은 것을
의논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응한다면 내가 선도하여 후금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진격하여 인조를 내쫓고 폐위된 광해군 전하를 다시 복위시키자고
하는 것이었어. 그러나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서, 백성이 당할 전화(戰禍)와
전하가 당할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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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 북관도첩 중 여진족을 물리친 김종서 장군의 일화를 그린 그림>
"내촌(耐村) 강홍립과 서강(西江) 윤종영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따라
[윤종영의 역사 이야기] 세 번째 편을 회원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립니다.
윤고문님의 귀한 글을 통하여 조선의 개혁 군주 광해군과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혹시 시간이 나시면 아래에 첨부한 동영상 자료 (1), (2), (3)
"여진족의 성장과 조선의 위기"(명지대 한명기 교수) 강의 내용을
들어보시기를 권유해 봅니다. 더위에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6년 6월 16일, 편집 및 사진자료를 제공하여...
이경환 드림
![](https://t1.daumcdn.net/cfile/blog/2738033D575A9BC120)
* <대동법 시행 기념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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