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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세례자 요한

불꽃緝熙 2015. 1. 2. 12:35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7)

 

여기서 '뒤에'로 번역된 '오피소'(opiso; after)는 장소에 관한 부사가 아니고

시간 부사로 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자 요한보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셨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출생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6개월이 늦으셨고, 활동을 시작하신 것도 그렇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파견된 일꾼이므로,

언제나 그분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오시는 분'으로 번역된 '호 에르코메노스'

(ho erchomenos; one who comes; He who comes)이다.

 

그리스도교는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오시는 분'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요한의 문헌들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언급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요한 복음 7장 28절'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 8장 42절'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한 복음 5장 43절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요한 복음 10장 10절'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복음 12장 47절'나는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이 있다.

 

또한 그분의 오심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각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재림하실 때까지는 끊임없이 각 사람을 찾아오셔서

구원의 초청에 응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여기서 '오시는 분이신데'로 번역된 '에르코메노스'(erchomenos)현재 분사인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우리에게도 '오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오시는 분'의 개념은 주님의 재림과도 관련된다.

 

요한 복음 14장 3절'내가 ~다시 와서'라는 표현에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그분께서는 약속대로 다시 오신다.

 

어느 누구도 그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지만(마태24,36),

오로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그때에 다시 오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도둑같이 오실 주님의 재림에 준비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그분의 생명과 복락의 나라에 결코 참여할 수가 없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라는 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 죄와 불의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흠없으며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는데, 자신은 유대인 가정에

있는 종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한 종이 하는 일인, 외출에서 돌아온 주인의 신을

벗기고 발을 씻어 주는 자격조차 없음을 '나는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표현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종보다 더 못한 존재로 극진히 낮추는 것은

바로 이어 등장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기 위함이다

(마태3,11; 마르1,7; 루카3,16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