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알려 다오. 먼동이 트기 전에 떠올라, 낙원에 아침 여명으로 서 계신 저 여인이 누구신가?/ 그분은 먼 곳에서 나타나, 달과 별로 치장하시고 태양 광채 속에 높이 올리시는 분./ 그분은 고귀한 장미, 더없이 아름다우시며 간택되신 분이며, 주님과 혼인하신 흠 없으신 주님의 종./ (중략) // 성모 마리아님, 당신은 태양 속에 빛나시며, 환하고 정결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드님에게서 당신의 모든 빛이 옵니다./ 이 은총의 광채로써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참된 빛을 향해 가나이다.”
‘말하여라, 이 여인이 누구이신지.’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시는 독일의 요하네스 쿠엔의 작품입니다. ‘30년 전쟁’, 곧 1618년에서 1648년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 사이에 일어난 종교 전쟁의 참극 속에서 나온 시입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것 같은 아름다운 성모 성가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일어권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가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가사를 음미하며 절망 중에도 성모님에게서 드러난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러르며 희망을 찾고, 성모님의 전구와 보호를 간구하는 신앙인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지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우리를 성모님께서 세상에 보여 주시는 희망의 원천으로 인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둠과 고통이 짙은 지상의 삶 속에 먼동이 트듯 다가오시는 성모님과 일치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기쁨과 희망을 주는 이 확신의 길을 꿋꿋이 걸을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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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신앙 교리입니다.
예전에는 ‘무염시태’라 했습니다.
죄에 물들지 않고 수태되셨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분이시기에, ‘원죄’와는 무관하게 태어나셨다는 것이지요.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지은 죄입니다. ‘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긴’ 잘못입니다. 이후 인류는 말씀을 거역하고 싶은 성향을 안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본질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초대 교회 때부터 시작된 ‘민간 신앙’입니다.
근세에는 성모님께서 직접 발현하시어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프랑스 산골 마을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신 일입니다. 이 발현은 교회의 공인을 거쳐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2월 11일)이 되었습니다.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회칙을 반포합니다.
이렇게 해서 12월 8일은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님의 잉태를 성모님께 알립니다.
혼인하지 않으셨던 마리아께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고백하십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에 즉시 응답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신 성모님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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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말입니다.
그는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쁨의 원인은 은총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은총과 함께’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즐겁지 않으면 ‘은총과 함께’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떠나면 누구라도 우울해집니다.
무엇을 해도 허무감이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운을 안고 살아야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든 기쁨이 함께합니다.
가만있어도 마음이 환해집니다.
그러니 천사의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 천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운이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성모송을 바쳐 왔습니다.
영세 후 얼마나 많이 이 기도를 외웠는지 모릅니다.
‘묵주 기도’를 한 번 바치면 성모송을 쉰세 번 외우게 됩니다.
한 번 외울 때 한 사람씩만 기억해도 수많은 사람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를 위해 성모송을 바친다면 그때마다 천사가 됩니다.
악한 생각이 괴롭히고 힘든 사건이 우울하게 할 때 성모송을 외워 보십시오.
정성으로 성모송을 바쳐 보십시오. 어느새 천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되어 성모님 곁에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 강헌철 신부-
사제들은 정기적인 인사이동이 있다. 임기가 되어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나 또한 첫 주임신부로 있었던 본당에서 성당 신축을 다 하지 못하고 떠난 적이 있는데, 갑작스런 인사이동 소식에 본당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 ?”라며 놀라는 분이 많았다.
함께 고생했던 신부가 갑작스레 떠나는 서운함도 있겠지만 성당 신축이라는 큰일이 있는데 그 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인사이동 소식에 놀라기도 했고 ‘참 우리 본당 사정을 모르시는구나.’ 하고 교구장 주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그 본당은 성당 신축이 잘 진행되고 있고,
나 또한 새로운 사목지에서 기쁘게 생활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하며 절망하고 포기하고 비난한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부정적이고 불행한 시간이 될 뿐이다.
그러나 주어진 어려움이나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 는 믿음과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의탁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결과가 있음을 우리는 신앙 안에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으로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호 강철왕 카네기에게 신문기자가 물었다고 합니다.
“회장님, 만약 이 회사가 망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네기는 씩씩한 목소리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너무 쉬운 질문입니다. 다시 시작할 겁니다.”
실패라는 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말, 또한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말이 아닙니다. 나에게 제발 없었으면 하는 것이 실패지만, 그 실패 없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곁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를 겁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실패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무엇인가를 새롭게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내게 실패가 찾아온다면 우리 역시 카네기의 말처럼 씩씩한 목소리로 “다시 시작할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실패에 대해 자신 있게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어떤 고통과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쁜 것만을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결국은 우리를 위한 축복과 은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신 성모님께서는 우리 보통 인간과는 달리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이렇게 원죄 없이 잉태되실 수 있었음은 그분 삶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절대로 평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을 때부터 성모님의 삶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만약 보통 인간이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과연 어떨까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왜 하느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원망할 것입니다. 자기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몫이라면서 거부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인간이 겪기에는 너무나도 큰 고통이고 시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그 고통과 시련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의 실패로 생각하지 않고, 다시 주님의 뜻에 맞게 새롭게 시작하는 때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을 때는 실패의 순간이 아닙니다. 또한 좌절하여 일어서지 못하는 순간도 아닙니다. 그 순간은 다시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에 맞게 새롭게 시작하는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모님과 함께 주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용기와 예절은 아무리 많이 사용해도 바닥이 나지 않는 법이다.(발타자르 그라시안)
성모님의 순종과 자기포기
-정찬호-
하느님께 대한 ‘순종’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으뜸 덕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순종하는 이에게 당신의 성령을 내려주십니다(사도 5,32 참조).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모님과 같은 순종을 성경에서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소명사화에서 소명 수령자들의 공통된 첫 번째 반응은 바로 ‘거부’였습니다.
모세는 말주변이 없어서, 이사야는 입술이 더러워서, 예레미야는 아이라서,
기드온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약 성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의
소명사화를 보면,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응답합니다. 물론, 거룩한 부르심 앞에 홀로 서 있는
한 인간의 부족함과 두려움에 대한 고백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찌되었건
지극히 온전한 순종을 우리는 오늘 성모님의 소명이야기에서 보게 됩니다.
성모님의 “예”는 바로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믿음의 발로發露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자궁’에서
수태하시기 이전에, 충만한 믿음을 통해 이미 ‘가슴’속에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 성모님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완벽한 자기포기로
응답하셨습니다. 이 자기포기야말로 성모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제자됨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마리아처럼 나도!
-김찬선신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은 믿을 교리이지만
굳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할 필요가 있는 지에서부터
왜 마리아만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해야 하는 지까지
참으로 논란이 많은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믿을 교리의 제정 이유를 우리가 안다면
그것은 성모 마리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뜻 깊은 신비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축일의 깊은 뜻은 그리스도의 先在性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先在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시는 계획도 先在하시고
따라서 어머니 되실 분도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 중에 괜찮은 인간 예수를 그리스도 삼으신 것이 아닌 것처럼
여인 중에 참한 여인을 뽑아 예수님의 어머니 삼은 것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시고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어머니께서 원죄 없으셔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이 축일의 의미입니다.
사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마리아 자신의 뜻이 아닙니다.
마리아 자신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님 뜻에 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종이기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모두가 그러합니다.
내가 태어난 것 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태어난 것 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태어난 것 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 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나로 태어난 것 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뜻이었고
나 태어나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흠 없습니다.
오늘의 두 번째 독서 에페소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깨끗함과 순종
-전삼용신부-
무더운 어느 날, 중앙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날씨는 무덥고 바람 한 점 없어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인 선교사 부부는 그때 커다란 나무그늘에서 필립이라는 어린 소년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필립아. 아빠가 시키는 대로 배를 땅바닥에 대고 엎드려라.”
필립은 그 말에 즉시 순종하며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이리 빨리 기어와라.”
그러자 소년은 자기 손과 발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빨리 기었습니다. 그가 아버지가 서 있는 곳의 절반쯤 왔을 때에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좋아. 이제 일어서서 뛰어와라.”
필립은 재빨리 일어나서 아버지께 달려갔습니다.
“필립아. 뒤로 돌아 나무를 한 번 쳐다보아라.”
그는 돌아서서 자기가 놀던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가 돌아보니 그가 놀고 있던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뱀이 가느다란 긴 혀를 내밀고는 달려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어쩌면 평범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요구에 “왜?”라는 토를 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시키든 아들은 그저 따를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신에게 나쁜 것을 시킬 리가 없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순종은 상대를 향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선 아담과 하와가 죄에 떨어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하지말라’는 것은 금지된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왜 그건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리고는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아담은 하와가 건네는 열매에 이젠 그것을 ‘왜’ 먹지 말아야 하는지도 망각한 채 그냥 먹어버리고 맙니다. 하와가 먼저 죄를 지었지만 더 쉽게 죄에 빠졌던 것은 아담입니다.
첫 두 조상의 죄는 육체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영혼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죄에 오염되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기에 그 육체를 통하여 전달되는 죄가 ‘원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여러 번 ‘육체를 따라 살면 죽음이 오고 영을 따라 살면 생명이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믿음을 지니기 전에 ‘왜 믿어야 돼?’라고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라는 의문이 더 많이 깨닫게 해 주지만 사실 ‘완전한 순종’을 방해하는 원죄의 교만이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인간이 죄에 떨어질 것을 아셨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줄 것을 계획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 계획은 이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기 전에 세워졌던 것입니다.
사제가 미사 때 성혈이 든 잔을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나의 피니라.” 라고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성자께서 육체를 취하시어 인간의 죗값을 치르려는 계획이 하느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에게 육체를 줄 어머니가 있어야하는데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면 이미 육체가 죄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세상 창조 이전에 우리를 뽑으신 것처럼 세상 창조 이전에 당신 아들에게 육체를 주시기 위해 죄에 물들지 않게 보존되어진 한 여자가 있었어야 하는데 그 분이 바로 마리아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제 육체를 준비해 놓았으니 세상에 내려가 죗값을 치르는 고통을 당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한 몸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예, 성서에 저에 대해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 제가 갑니다.'” (히브 10,5-7)
이는 아담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버지께 불순종 했던 것을 보속하기 위한 두 번째 아담의 ‘왜’라는 ‘이유가 없는’ 완전한 순종입니다. 그 분은 하느님인 당신이 왜 인간을 대신해 사람이 되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하라니 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으로 아담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씻겼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죄는 씻깁니다. 그러나 만약 마리아가 성자께 당신의 몸을 주기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 창조 때부터 계획되어 온 모든 구원 계획이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라도 인간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 것이고 자유는 하느님도 건들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원죄가 없으셔서 지성이 완전히 열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 당해야 하는 고통을 이미 온전히 아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사람이 되어서 당해야 하는 고통을 다 알면서도 ‘예!’ 했던 것처럼, 성모님께도 모든 고통을 보여주시고 그래도 육체를 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 고통을 보여주시지도 않고 육체를 청하셨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기가 되기 때문에 그 초대는 옳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의 종이 받아야 하는 고통과 그를 완전히 사랑해 한 몸이 된 두 번째 하와가 되는 어머니의 고통을 직시하면서도 성모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로써 두 번째 하와도 당신이 ‘왜’ 구원의 쓴 잔을 함께해야 하는지 묻지도 않고 순종함으로써 첫 번째 하와의 불순종을 기워 갚습니다.
첫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불신이고 무관심이고 죄이고 ‘더러움’이었다면, 이 두 분의 순종이 바로 믿음이고 사랑이고 죄를 없앰이고 ‘깨끗함’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깨끗함은 이 순종으로 증명이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겸손한 순종’을 가장 중요한 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으로 죄가 왔고 겸손으로 죄가 씻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신교 신자들이 어떻게 한 인간이 원죄가 없느냐고 묻는다면 성경에 쓰인 말씀을 통해서 말해주면 됩니다. 성모송 앞부분의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만 외워주면 끝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들은 죄 때문에 성령님의 은총을 잃게 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주님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되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천사의 인사를 보십시오. 성모님은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시고 하느님과 함께 계십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은총을 나타냅니다. 원죄가 있고서야 어떻게 천사가 이런 인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성모님의 하늘처럼 깨끗한 마음이 아니면 어떻게 성모님과 함께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실 수 있었던 유일하게 원죄가 없이 순종할 줄 아셨던 우리의 성모님 덕으로 세상에 구원이 오게 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이 대림절에 있는 것은 더 뜻 깊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림절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는 것인데 성모님만큼 하느님을 모시는 모범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도 성모님처럼 깨끗하고 순종적이 되어 천상 아기를 모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청합시다.
<전율 같은 Feel>
-양승국신부-
저녁 먹고 운동장에 나서려니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으로 인해 차가워진 공기에 세찬 바람마저 불어오니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습니다. 아직 감기기운이 좀 남아있기도 하고, 공연히 객기를 부리다가 고생할 것 같아 오늘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이곳 저곳을 기웃기웃 서성대기로 했지요.
아이들과 직접 뛰는 것도 좋지만 때로 옆에 서서 응원해주고 칭찬해주는 것도 얼마나 아이들에게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다들 춥다고 호들갑인데도 불구하고 저희 아이들은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축구장과 농구장에서, 족구장과 탁구장에서 가는 곳마다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추위는 웬 추위" 하면서 열심히 놀고 있었습니다.
아예 어떤 아이는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놀고 있더군요. "감기 걸리니, 옷 잘입고 나오거라"고 타이르니 옆에 있는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걱정 마세요. 신부님, 애는 보시다시피 지방층이 두꺼워서 평생 감기 한번 안 걸려요."
잠시나마 세상걱정 잊고 정신 없이 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저희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이신 돈보스코(1815-1888) 성인께 말입니다. 또한 저를 희망과 에너지로 가득 찬 아이들 사이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오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축일입니다. 돈보스코께서 청소년들을 위한 구원사업의 첫 발을 내딛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 제의방에서 제의를 입던 돈보스코는 제의방을 기웃기웃하다가 제의방지기에게 붙잡혀 호되게 야단을 맞고 쫓겨나는 한 소년과의 첫 만남을 가집니다.
돈보스코는 즉시 제의방지기에게 방금 쫓아낸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당부하십니다. 쭈볏쭈볏 끌려온 아이는 당시 토리노시에 넘쳐나던 아이들 중 전형적인 한 아이였습니다.
당시 이태리 북부의 사회 전반적 상황은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연이은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농가의 몰락, 탈농촌 인구의 대도시에로의 유입이 진행되었고, 도시 빈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피해자들은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생계마저 곤란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가정교육이나 종교교육, 직업교육, 인격적 대접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청소년들은 악덕기업주들의 제1차적 착취대상이 되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겨우 잠자리와 하루 한 두끼의 보잘것없는 식사만을 제공받으면서 하루 온종일 작업장에서 청춘을 썩혀야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견디다 못한 청소년들은 너무나 쉽게 범죄조직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소년원이나 교도소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 하루를 지내게 되었지요.
그런 피해 청소년의 대표자가 바로 돈보스코가 제의방에서 만난 바르톨로메오 가렐리였습니다.
그 가련한 소년과의 만남의 순간, 돈보스코는 전율과도 같은 Feel을 받습니다.
"그래, 바로 이 아이들이야! 내 인생의 목적은 바로 이 아이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투신하는 일이야. 그래, 맞아! 내 만만치 않았던 인생, 내 고난의 성소 여정, 내가 오랜 기간 준비해온 사제직은 바로 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쓰여지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었어."
"내가 거둔 아이들, 성모님께서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실거야. 애가 한 아이를 데리고 오면 성모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망토로 이 불쌍한 아이들을 고이 감싸 주실거야. 나중의 일은 성모님께 맡기고 나는 일단 일을 시작하자"며 힘차게 사업을 시작한 날이 오늘 이 대축일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이 이 시대 가장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 맛이 간 청소년들, 갈 곳 없는 청소년들, 소외된 청소년들, 가슴 아픈 청소년들, 밤잠 못 이루고 눈물 흘리는 청소년들, 소년원과 구치소, 교도소에서 희망을 잃는 청소년들을 기쁜 마음으로 선택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기를 다짐하는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깨끗한 임종>
-양승국신부-
어제 아침 제가 머물던 수녀원 바로 옆집 양로원에서 돌아가신 할머님은 참으로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물론 할머님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어 숱한 고초를 겪으셨지만,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는 수녀님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님은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얼마나 "감동적이고 화끈하게" 마무리지었는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견디느라,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른 것에 신경 전혀 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할머님은 다른 임종자들과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님은 돌아가시기 직전 돌봐주시던 수녀님들에게 두 가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첫 번째 유언은 자신이 미리 사 둔 묘 자리를 다른 할머니에게 양보할테니 당신은 화장을 시켜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유언은 그간 아껴 모아둔 꼬깃꼬깃한 용돈을 내놓으시면서 당신이 돌아가시거든 당신 대신 한번 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어를 돈 되는 대로 사서 수녀님들과 할머님들, 고마운 분들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어제가 양로원 김장하는 날이었는데, 할머님 유언대로 홍어를 잔뜩 사서 김장하러 오신 봉사자들, 수녀님들, 할머님들에게 돌렸습니다. 모두들 유언을 남기신 할머님을 생각하며 맛있게 홍어를 먹었습니다.
여행길을 떠나기 직전 깨끗이 정리하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웃을 생각하셨던 할머님의 따듯한 마음이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숭고하게 여겨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창조 때 주어진 그 최초의 순결함과 순수함을 끝까지 잘 간직하셨다가 다시 하느님 앞에 봉헌한 성모님의 생애 앞에 너무도 닳아빠진 제 영혼이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하루입니다.
본성 상 나약한 우리는 수시로 죄에 떨어지고 동일한 악습을 반복하면서 영혼의 순수성을 상실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양로원에서 돌아가신 할머님의 임종을 바라보며 다시금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하느님 앞에 너무도 부당하고 때묻은 우리이지만 그 할머님처럼 매일 떠나는 노력, 매일 준비하는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삶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그 빈자리에 하느님이란 새로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떠날 때 그래서 그 떠난 자리에 하느님 그분께서 머무르실 때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비우고, 모든 집착에서 떠나며,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을 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묘미는 쌓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허물어트리고 바닥으로 끊임없이 내려가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정화와 쇄신의 여정을 출발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는 미사 직전에 양치질을 하거나, 아니면 가글을 합니다. 그래야 개운하게 미사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며칠 전, 미사 직전에 가글(보통 가글액을 1분 정도 입에 머금은 뒤에 뱉습니다)을 하면서 책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립니다. 입안에 있는 가글액을 얼른 뱉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욕실로 급하게 뛰다가 글쎄 문턱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 가글액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아마 가글액을 삼킨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견디기 힘든 맛이지요. 삼키지 않으면 상쾌한 기분이 오래 가는데, 가글액을 삼키니 상쾌한 기분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랫동안 속이 좋지 않지요. 아주 조금만 삼켰을 뿐인데 말입니다(혹시 그 느낌을 잘 모르시겠다면 지금 가글액을 조금만 드셔보세요). 그런데 가글을 할 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 상쾌한 냄새에 맛 역시도 훌륭할 것 같다는 생각 말이지요.
아마 죄란 것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죄의 유혹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 조금만 넘어가도 힘들어집니다. 아주 조금만 발을 담갔을 뿐인데도, 마음의 가책으로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라고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신 성모님께서는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원죄를 안고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원죄 없이 태어나셨다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기념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증거를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듣는 그 순간,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서 확신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모님께서는 죄를 항상 피하시고 대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시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듣는 순간에서도 의심하지 않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철저히 하느님께 순종하십니다.
죄의 유혹에서 우리 인간들은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지키는 수밖에 없음을 성모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조금도 타협해서는 안 됨을, 죄의 유혹에 조금이라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지금 내가 받는 죄의 유혹을 얼마나 잘 극복하고 있었을까요? 죄의 유혹은 달지만, 이를 극복했을 때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도는 죄를 예방하고 이미 지은 죄를 용서해 주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세익스피어)
암호 해독
-김현태 신부-
철학적으로 신은 ‘순수 현실태’라고 합니다. 즉 하느님 안에는 ‘가능태’가
없습니다. 그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존재와 본질이 같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늘 무엇이 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아이 때문에 속상한 부모는
“너 제발 사람 좀 돼라”고 합니다. 그 애가 사람이 아니어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본질은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바를 지니라는 부탁입니다.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자 되어라”라는 당부 말씀은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잘 깨닫고 그 특성을 생활화할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완전성은 불가능과
가능을 넘어서는 최상의 지혜입니다. 성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지능이 미약한
인간일지라도 최상의 지혜를 발휘할 때는 불가성(不可性)과는 무관한
신적 지혜를 맛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위로 들어 높일 때입니다.
그러면 완전하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분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 이전에 뽑힌 사람들
-김찬선신부-
인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누군가의 몸을 빌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마리아인가?
마리아도 물었습니다.
왜 접니까?
마리아는 특별한 분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뽑히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려면 특별한 분이셔야 합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어떤 면에서 특별하십니까?
하와로부터 오늘까지
마리아처럼 예뿐 여인이 없기 때문입니까?
하와로부터 오늘까지
마리아처럼 성품이 훌륭한 여인이 없기 때문입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마리아가 진정 특별한 이유는 미모나 성품 때문이 아닙니다.
마치 전국에서 미모도 뛰어나고 성품도 훌륭한 규수들을 불러
그중 가장 뛰어난 규수를
왕비로 간택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실 분이 인간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구원자로 보내시는 것이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보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분도
마땅한 여자가 있으면 그분을 어머니 삼고,
마땅한 여인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수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천지 창조 이전부터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실 분도 창조 이전부터 계획된 것입니다.
창조 이전부터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되실 분으로 뽑히신 분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특별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실은 마리아만 천지 창조 이전부터 뽑힌 사람이 아닙니다.
역할이 다를 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다 창조 이전부터 뽑힌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우리는 태어났고
부르심을 받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재를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그리스도 찬가에서
이것을 심오하게 갈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이들 중에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실 분으로 선택된 분입니다.
오늘의 축일은 이것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최용진 신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마리아한테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수많은 처녀들한테도 보내시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지만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다 거절했습니다. 율법의 규정대로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은 주님의 명령으로 구석구석 이스라엘을 다니며 모든 처녀들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고, 그러다 결국 나자렛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마리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순명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신앙을 가지고 나서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주님을 따르기보다 세상과 돈과 명예를 따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과 시련 앞에서 주님께 맡기기보다 세상의 논리를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겨낸 이에게는 주님께서 은총을 가득히 주십니다. 아무리 은총을 얻으려 해도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고, 내 생각과 뜻대로 주님의 은총을 받기를 바란다면 주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오지 못하며,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지 못합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천사들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니라 주님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세상 것들에 아까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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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 말씀을 전합니다. 기쁨의 이유는 은총이었습니다. 은총이 먼저 마리아에게 내렸던 것이지요. 은총을 받으면 누구나 기쁨이 가득해집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천사의 인사말이 오늘의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은총이 성모님의 잉태를 해석하는 단어라는 말이지요. 실제로 모든 것은 은총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이며 이끄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 없이는 성모님에 관한 어떤 일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의 기도에서 성모님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거룩한 기도를 남기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기도를 바치며 살아간다면 언제라도 은총이 감싸 줄 것이고, 또한 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의문과 불가사의 앞에서 성모님의 말씀과 기도를 되풀이해야 은총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장재봉신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은
더불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신앙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약속하고 향해 나아가는 투신의 길에서
길을 잃은 모습이 곧 죄입니다.
죄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컫는 길을 놓치고 헤매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오늘 죄를 모르시는 분께서
죄를 지은 인간을 향하여
의아해 하시며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물으시는 까닭입니다.
보시니 좋으셨던 하느님의 마음에 어긋지고
보고 함께 좋아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내내
같이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필요없다고’
‘혼자서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곧 죄입니다.
성경이 밝히는 죄의 기원이
‘하느님과 같아지려는’일인 이유입니다.
오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겨우
하와 탓이라 미루고
마침내 하느님 탓인양 핑계하는 아담의 모습에서
죄의
당당하지 못한 속성을 봅니다.
이 못난 인간들을 사랑하신 까닭에
버릴 수도
돌아서 내칠 수가 없으신 하느님,
지은 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딱한 처지를
몰라라 할 수 없는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례는
인간의 원죄까지 사함 받게 합니다.
세례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를 깨닫고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분께로부터 온 은총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된 우리로 변화 된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흠 없는 의인이라 하십니다.
우리를 묶었던 원죄의 사슬이 끊어졌다 외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원죄없이 잉태되신 그분처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믿음을 잃고
다시
혼돈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위해 싸웠으며
이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그분의 힘이며
자랑이며
원죄없는 상태
보시기 참 좋은 그분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새 생명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여러분들은 혹시 연애편지를 써 보셨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연애편지를 써 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컴퓨터 E-Mail을 통해서 글이 오고가기 때문에 예전처럼 꽃무늬가 그려진 편지지를 통해 전해지는 애틋함은 적지만,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글을 써서 전해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연애편지 이야기를 하냐고요? 사실 제가 오늘 충격 고백을 하나 하려고요. 사실 저도 이런 연애편지를 써 본 경험이 있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닌 수십 명에게 연애편지를 보냈었지요. 어떤 분은 제게 ‘아니 어떻게 신부가 되가지고 그럴 수 있느냐?’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연애편지를 신부가 되어서 쓴 것이 아니라 군대에 있을 때 써 봤다는 것이고, 또한 제가 원해서 쓴 것이 아니라 군대 선임 병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것입니다. 즉, 선임 병의 연애편지를 대필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명의 것을 말이지요.
연애의 경험이 없는 저로써는 이 연애편지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알지 못하는 가상의 인물에게 쓴다는 것이 정말로 싫었지요.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쫄병이 감히 쓰기 싫다고 어떻게 말하겠어요? 매주 몇 통의 연애편지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쓸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몇 통의 편지를 쓰다 보니 글 쓰는 실력이 조금씩 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책을 다섯 권이나 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때의 그 경험 때문이 아닐까요?
당시에는 정말로 쓰기 싫었던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나를 성장하게 해주는 하나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생각과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 축일을 맞이해서 오늘의 복음에서는 성모님의 잉태소식에 대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당시 불과 15세의 나이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낳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그런데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을 표현하십니다. 바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생각과 긍정적인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인 것이지요.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강한 믿음, 그래서 갖게 되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간직해야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많은 성인 성녀의 삶을 통해서 깨닫기는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체험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에…….
빠다킹신부
나는 할 수 있어요
- 조명연 신부-
“저는 나이가 많아서 못해요.” “아니, 저렇게 어린 사람이 뭘 안다고….”
나이가 많아도 문제고, 나이가 적어도 문제인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이’일까요?
아닙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뽑으실 때 절대로
나이를 보고 뽑지 않으십니다. 또한 월등한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뽑는 것도 아니십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사람을
뽑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불과 15세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나이 어린 성모님을 선택하시지요.
문제는 이러한 선택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입니다.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성모님께서는 가르쳐주시지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기
-김인숙 수녀-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마리아,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녀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단다.” 나이 많은 친척 언니가 임신했다는 뜻밖의 소식이었다. 천사의 알림은 처녀인 몸으로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이는 마리아에게 인간적으로 큰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수녀원에 들어온 지 일 년 가까이 될 무렵이었다. 하루 종일 종소리에 따라 공부하고 일하고 기도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몸에 배지 않은 시간표 생활. 거기에 종소리는 왜 그리 요란하던지….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쨍쨍 울리는 비상벨이 수녀원 종소리였으니까. 한 번 칠 때마다 놀라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래도 하루 또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떠나온 세상 밖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의 뇌리를 ‘이렇게 한평생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유혹이 스쳤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어 이곳에 묻히겠다.’는 각오를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정말 내가 한심했다. 그 씁쓸한 유혹은 수녀원의 생활을 지루하게 끌고 갔으며 그렇게 맛있던 세 끼 밥맛을 쓰나미처럼 앗아갔다.
무거운 마음으로 저녁기도를 하러 갔다. 성수를 찍고 성당에 들어가는데 먼저 와 계신 수녀님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얀 수도복에 깊은 세월의 흔적을 담은 얼굴을 보는 순간 ‘저분들도 살았는데 내가 왜 못살아.’ 하는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초등학교 3학년인 소영이는 여행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소영이는 첫날부터 코피를 흘렸다. 그런데도 토끼처럼 잘 따라다녔다. 계속되는 출혈 때문에 콧구멍에서 솜을 뺄 틈이 없는데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나는 지치고 피곤할 때 어린 소영이를 보면서 힘을 얻었다.
- 변성수 신부-
대림의 초가 하나씩 밝혀지듯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시간도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사람과 성당마다 수호성인이 있듯이,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도 주보성인이 있습니다. 바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1830년 프랑스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셔, 직접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말씀하셨고, 또 1854년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이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이 범한 죄의 결과로 원죄를 갖고 태어납니다. 이 원죄는 오직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만 예외이고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화은총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데, 이 은총이 성모 마리아에게도 적용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죄에 오염되어 있지 않은, 원죄로부터도 자유로운 동정녀의 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이런 특별한 은총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을 교리는 성모 마리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믿음인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죄 속에 오시더라도 예수님 당신의 거룸함을 보호받을 모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탄생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과 몸도 티없이 깨끗이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해성사와 꾸준한 기도생활로 우리 안에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거룩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아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경규봉 신부-
교회는 일찍부터 구세주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공경해왔다. 5세기 말에 성모님이 탄생하였으리라 추정되는 베짜타 못가에 마리아 탄신 성당(오늘날의 성 안나 성당)을 건립하고, 성당 축성일인 9월 8일에 성모 탄신 축일을 지내왔다. 8세기 무렵부터는 탄신축일로부터 9달 전인 12월 8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냈다.
이 축일은 9세기에 서방 교회에 전파되고, 15세기에 로마 전례력에 도입되었다. 17 세기에 이르러 성모신심이 더욱 깊어짐에 따라 교우들은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음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기를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주교들 및 신학자들과 협의를 거쳐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결하게 보존되었다.” 하고 교의로 선포하였다.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간은 원죄에 물들어 태어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구세주 그리스도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모님은 하느님의 특전으로 모태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받아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믿을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몸에서 태어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지극한 배려이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리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을 수는 없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15)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가 1,28)는 말씀을 간접적인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원죄 없는 잉태의 근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리를 선포한 까닭은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승 안에서 교회가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를 믿어왔고, 또 그 믿음이 예수님을 더욱 더 공경하는데 이바지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루가복음(1-2장)을 보면 성모님은 뛰어난 성덕을 지니신 분이다. 성모님은 은총을 가득히 받고 주님과 함께 계시며, 그처럼 뛰어난 성덕을 지니고 계셨기에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받았다. 성모님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계셨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산에 오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도 성모님은 주님과 함께 계셨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이처럼 뛰어난 성덕을 지니신 성모님, 더욱이 구세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에 대해서 초대 교회는 뛰어난 공경을 드려왔다. 그리하여 많은 신자들은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시고, 교회의 어머니요 모범이시며,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려 지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교회 안에서 성모님의 성덕에 대한 신심과 함께 성모님이 잉태될 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신심이 발전하였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티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분으로부터 탄생하여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잉태하실 수 있을 만큼 깊으신 성모님의 성덕을 본받아야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도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을 정도로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 성모님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계실 수 있는 신앙인이 되고,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낳음으로써 예수님을 이웃과 세상에 전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 정 호 신부 -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시작하면서 원죄라는 이름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죄의 고리에 모두 몸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태어남과 동시에 세상의 삶에서 죄로 빠져드는 우리 자신의 결함을 하느님을 만나며 극복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에게 묻어있는 그렇지만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죄의 경향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을 살아간 한사람에 대해 원죄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누가 그분의 탄생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한사코 그분의 원죄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라는 말로 믿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성모님께 대한 이 선언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을 잉태하시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성모님의 탄생을 나타내주는 내용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성모님의 하느님께 대한 선택의 모습에서 그분의 생각이 이미 죄를 만들어내는 고리 밖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잉태를 성령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한 행운 가득한 여인을 성모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니 이루어지지 않을리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성모님의 역할은 예수님의 탄생을 도운 것으로 끝나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순명은 단순히 어쩔 수 없는 힘 앞에서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오는 태어날 아이를 통해 하실 하느님의 일에 대해 성모님은 깊이 새기고 받아들입니다. 그 일에 대한 생각이 또 한사람 불가능한 임신을 하게 된 엘리사벳과의 만남에서 드러납니다. 그저 순진한 한 앳띤 여인의 고백이 아닌 예언자들의 모습과 태어날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미 알고 계신 성모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라는 고백은 그래서 하느님의 일에 자신의 인생을 이미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고 봉헌하는 성모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자신 스스로를 중심으로 살아가며 어떤 순간에도 자신부터 챙기려는 사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 어디에서도 이기적인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이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몸에 묻어 있는 원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신 삶과 주님의 일을 가슴에 새기며 평생을 살아간 삶에서 우리는 이 삶이 이 한 사람의 인생의 길이었음을 발견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우리가 하느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던 답안을 찾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 하느님이 그토록 찾으시던 그분 마음에 드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 그에게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축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지금도 누군가의 혀끝에서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원죄 없다는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은 이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원죄 없다는 이 선언은 그 선언 만으로도 우리에게 참 삶의 길을 알려주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누구나 이 칭호를 받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죄를 극복해서 하느님 앞에 서고 싶어하는 그 상태를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은총이란 생각이 듭니다.
원죄를 씻어내고도 그 원죄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삶에서 세상을 착하게만 살아가는 이 여인의 인생에서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우리의 근본에 대한 생각을 배웠으면 합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욱현 신부-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의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시켜 주신 내용이다. 우는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신비를 입으셨듯이 나약한 우리들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해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간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처음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오지 못하고 죄와 죽음이 왔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을 통해서 구원이 오게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이 아니었더라면 또한 구원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그 잔을 치워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아드님과 같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신앙을 용감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가 1,38) 이 고백은 주님의 탄생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마리아의 자세이다. 우리도 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삶과 유리된 신앙은 무의미하다. 마리아의 이 고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체적인 실현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의 생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역시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야고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렸다는 것과, 그리고 이웃 앞에 자신을 봉사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자세가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려 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이다. 경험담 (주교님 편지).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탄생 신비를 살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마리아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되며,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기에 고통의 신비를 더 깊이 알게 되며, 더 깊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 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즉시 우리는 세상을 성화 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즉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탄의 신비가 12월 25일 성탄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휴가가 없다. 연중무휴이다. 큰 것을 찾기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쁘게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도록 하자. 신앙은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고, 또 살아가며 확실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
가 1,38).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 앞에 그대로 고백되는 삶으로 이어지도록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가정을 위해 봉헌하도록 하자. *
겸손하신 어머니
-박동진 신부-
노예와 종은 둘 다 부정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누군가에 의한
종속상태냐 아니면 스스로 낮춤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노예는 여러 가지 이름, 형태로 있어 왔습니다. 아주 심할 때는
모든 자유가 주인에게 속해 있어서, 심지어는 ‘죽는 것도 주인 맘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모습은 달라도 요즘도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현장 체험을 하신 어느 분은,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는데 심지어는 점심밥도 서서 먹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이주노동자가
하소연을 하길래 기숙사에 가 보니, 아주 작은 단칸방에 세 명씩 밀어넣은 것을
보고 ‘교도소보다도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에 의한 종속,
예속상태는 하루 빨리 벗어날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낮춤을
표현하는 ‘종’의 자세는 누구나가 가져야 할 겸손의 모습입니다.
동방교회와 로마교회가 우위권을 놓고 논쟁을 하던 시기의 일입니다.
동방교회에서 로마교회의 우위권과 맞먹는 우위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시 교황이신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종들의 종일 따름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의 겸손이
존경을 뒤따르게 하였습니다.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는 세상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마땅히
‘하느님의 어머니’로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
시온의 딸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네 안에 계신다.
-이기양 신부 -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사람마다 본명이 있고 또 성당마다 수호 성인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은 㰡티 없으신 성모성심㰡‘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지요. 한국 천주 교회의 주보 성인은 㰡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㰡‘입니다.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에 가면 제대 뒤쪽의 한 가운데에 우리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성모 마리아를 모셔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조선 교구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에 조선에 도착한 앵베르 범 주교는 혹독한 박해와 시련을 겪고 있는 한국 교회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봉헌하며 간구 해주실 것을 청하셨습니다. 4년 뒤인 1841년 8월 22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요셉 성인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를 한국 교회의 수호자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후 45년이 지난 1886년, 한국 교회는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찾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특은을 입은 교회 중의 하나로써 194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민족이 36년 간 계속되던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이 됐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감사를 드리고 또 기리면서, 성모 마리아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가 어떤 분이신 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우리는 성모마리아의 신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전하자 처녀 마리아는 깜짝 놀라 외칩니다.
㰡’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㰡“(루카1,34)
어느 누구에게 이야기해도 똑같은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전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지금 하느님의 천사가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㰡’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㰡“(루카1,35)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이며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통하여 마리아는 이 놀라운 사건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게 되고 주님의 여종으로서 그 뜻에 순명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신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신앙의 어머니로, 또 신앙의 완전한 모범으로 모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봉헌하였습니다. 무조건 따랐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일어난다고 하는 그 순간에 성모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㰡’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㰡“(루카1,38)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마리아는 너무나도 많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당장 약혼자인 요셉이 파혼하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그리고 유대 사회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처벌될 위험에 놓이게 되지요.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요셉에게 보내어 그의 마음을 돌려놓으시고, 요셉의 보호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 구세주 예수님을 낳으십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이후 끝없는 시련에 봉착합니다. 들어가 하루 밤 몸 누일 곳조차 없어 초라한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으며, 해산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들이 이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는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처절한 고통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의 몫이었습니다. 㰡’저는 주님의 종입니다.㰡“하고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마리아는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험난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길을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간직하며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는 말씀에 인간적인 모든 것을 접어놓고 전 생애를 봉헌했던 그 신앙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으로 성모 마리아를 칭송하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성모 마리아의 신심을 가슴에 담고 또 기억하며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의 군대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하지요. 과연 제대로 잘 따르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임을 확인하려들지도 않을뿐더러 조금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지요. 신앙과 이성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수준의 것만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것은 과학이지요. 과학에서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까지도 과학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의 사고나 능력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힘, 즉 성령의 능력을 확신하였기에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었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적이지 않은 것은 맹신이나 미신으로 치부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인간의 이성은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지요. 신앙은 인간의 학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하느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이성과 학문과 모든 경험과 사고와 예측을 접고 주님께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나의 판단과 이성 안에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뛰어넘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그 동안 내가 고집하고 매달려온 모든 가치와 지식이 얼마나 하찮고 무가치한지를 한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알아가게 되지요. 인간적인 모든 것이 참으로 무의미하고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간적인 판단에 앞섰던 과거가 오류의 역사였다는 것을 한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지면서 나의 체험과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면 쓸수록 우리는 그것에 걸려 넘어지고 그 안에 갇히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 한계를 뛰어넘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모마리아를 본받고 따르는 것은 나의 경험과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을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겠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은 천사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전달받으셨습니다. 성경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스라엘의 역사나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뜻은 천사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접할 수가 있었지요. 또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성경 해설을 통해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을 어디에서 어떻게 체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전달받습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사목자의 사목 흐름 안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을 해설하고 실천하는 본당 사제의 여러 사목 활동 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벗어나 신자 스스로가 하느님의 뜻을 찾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시대인 우리 시대에 하느님은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고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목자, 즉 사제를 통해서 가르치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목자의 사목 흐름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 깨닫고 순명의 정신으로 따르는 사람과 인간적인 생각만을 앞세워 지나쳐버리는 사람과의 삶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많은 사목 경험을 통해서 저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살기를, 또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사목자의 뜻에 귀기울이고 받아들이시기를 권합니다. 하느님은 그 안에 계십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 한마디에 㰡’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㰡“(루카1,38)하고 받아들였듯이 여러분 또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풍요로운 은총이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역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한 평생 순명하신 성모 마리아의 전 생애 위에 내려진 축복의 열매라는 것을 우리는 성모님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뜻을 담고 실천하여 풍요로운 은총을 체험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
-강영구 신부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대에게
오늘은 성모 무염시태(無染始胎)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信仰)은 원죄(原罪)를 전제(前提)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원죄(原罪)에 물든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원죄(原罪)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류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유독 마리아님만 무염시태(無染始胎) 즉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보통 인간과는 다른 별종(別種)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받은 특은(特恩)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초대(招待)입니다.
마리아님의 무염시태(無染始胎)가 하느님 나라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엄한 심판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님은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초대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에 보물을 담듯이 예수를 받아 담습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님은 예수의 길을 함께 갑니다.
세례(洗禮)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리아처럼 무염원죄(無染原罪)의 특은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통해서 누리는 무염원죄(無染原罪)의 특은이 하늘나라(天國)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로의 초대(招待)입니다.
마리아님처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마리아님처럼 무염원죄(無染原罪)의 그릇이 되어
‘말씀’을 받아 담고 말씀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유설 신부-
◆신학생 때 마더 데레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내 손을 잡을 때 강한 힘과 친절함을 느꼈지만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것은 그분의 눈빛이었다. 그 순간에 그분과 나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 축복의 눈길을 경험했다고 본다. 인도에서 마더 데레사 품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며 축복 속에 죽어갔다는 말을 실감했다.
축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곧 성숙한 여성과 남성의 특성이라 본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축복」이라는 책에서 여러 형태의 축복을 배우게 되었다. 먼저 우리의 오감을 사용하는 축복이다. 마더 데레사와 만났던 경험처럼 눈으로 바라보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길은 아이의 정체성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축복이다. 손잡기. 육체적인 접촉은 아이의 성장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노인에게도 아주 필요하다. 말하기. 예수님은 축복하시며 이 모든 방법을 사용하셨다. 부자 청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고, 아픈 사람을 어루만지시고, 많은 이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다음 단계는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의 가능성을 믿기인데, 이는 그 사람들에게 특별한 미래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축복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그의 미래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축복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축복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제자들 각자의 소중함을 보고,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당신의 목숨까지 바쳐 달성하기까지 축복하셨음을 볼 수 있다. 이번 대림절에 누가 나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는지, 받은 축복의 경험을 돌이켜보자. 또 나는 누구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는지, 부모로서 자녀에게 이렇게 하고 있는지, 배우자에게 이렇게 하였는지?
몇 년 전부터 여동생이 가족끼리 전화할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로 제안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실천하고 있는데, 동생이나 어머니에게 이러한 표현을 함으로써 더 가까워지고 사랑스럽고 축복을 주고받는 느낌을 받았음을 체험한다. 가족이나 수도 공동체는 축복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천사,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는 축복을 주고받는 모범이다.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
-박상대신부-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우선 오늘 대축일에 ‘한국 교회의 수호자’가 붙은 이유를 살펴보자.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을 인가하고 수호성인으로 성 요셉을 지정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조선선교를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하지 못하고 북경에서 병사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엥베르 주교(1796-1839)가 임명되었다. 1837년 북경에서 주교성품을 받고 조선으로 입국한 엥베르 주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공동수호자로 모실 수 있기를 교황청에 청원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 청을 받아들여 엥베르 주교가 순교한 후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성 요셉과 함께 조선교회의 공동 수호성인(Compatroni)으로 선포하였다.
다음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에 대하여 살펴보자. 우선 이 축일에 대한 생각이 마리아의 ‘탄신축일’에서 거꾸로 계산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을 기념하는 축일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9월 8일로 지냈다. 이는 마리아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에 5세기말경 마리아 성당을 지어 봉헌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방교회에서는 제84대 교황 세르지우스가 재임기간(687-701) 중에 ‘성모영보축일’, ‘성모승천축일’, ‘성모성탄축일’, ‘마리아 빛의 축일’ 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4대축일을 정하고 우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이를 경축하였다고 한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교의(敎義)와 신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마리아의 탄생 장소와 일시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탄생은 분명히 있었고, 탄생이 있으면 잉태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12월 8일이 곧 성녀 안나가 마리아를 잉태한 날이 되는 것이다. 12월 25일 주님성탄대축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3월 25일이 주님탄생예고, 즉 주님의 잉태축일이 아닌가? 동방교회가 10세기경부터 12월 8일을 지정하여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잉태 축일”로 지냈고, 서방교회에서는 1100년 캔터베리의 안셀모 주교가 자기 교구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를 로마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1708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잉태‘를 대축일로 전 세계 교회에 선포하였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따라서 1855년부터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개신교회와 동방교회는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교리상의 문제로 삼고 있다. 325년 니체아공의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란 칭호를 드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므로 마리아는 당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다. 후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잉태의 순간에 원죄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1854년 12월 8일 위풍이 당당한 교황 비오 11세가 대미사를 마치고 선언문을 낭독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올 때 베드로 대성전 안에는 경외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듦이 없으심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교의(敎義)로 확실히 선언하는 바이며, 이에 따라 모든 신자들은 이를 확실히 믿을 것을 선포한다.” 낭독을 마친 교황의 눈에서 기쁨과 경외의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4만 명의 목소리가 감사가 ‘테데움’(Te Deum)을 노래했고, 로마의 모든 성당에서 종이 울렸으며, 그날 밤 로마는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바깥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성모무염시태’ 교의를 두고 좀 지나쳤다고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교의를 성모님 스스로가 추인(追認)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1858년 2월 11일 루르드의 작은 동굴에서 일어난 성모님의 발현에서 시작된다. 성모님은 7월 16일까지 18번에 걸쳐 당시 14세의 소녀 베르나뎃타에게 발현하셨다. 3월 25일 성모영보축일, 12번째 발현한 성모님께 베르나뎃타가 “부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침묵을 지키던 성모님은 소녀의 세 번째 물음에 “나는 하자(瑕疵) 없는 잉태로다.” 하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성모님 스스로가 4년 전에 선포된 ‘무염시태’ 교의를 추인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성모님의 그 한마디 속에는 원죄(原罪)의 교리와 그리스도를 통한 강생구속 교리가 한꺼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원죄를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의는 결코 마리아를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마리아 또한 분명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녀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믿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모두가 불가능하게 여기는 엄청난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잉태’를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주님의 종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몸에 품어 하느님께 인간의 생명을 선사한 마리아는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이 엄청난 은총에 동참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고 눈물나도록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종입니다(루가 1, 28-36)
-유 광수신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 수도원에서 두 수사님의 종신서원이 있었다. 종신서원이란 주님과의 결혼식이다. 즉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약속이다. 이들이 주님과의 결혼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대략 34년의 시간이 걸렸고 수도회에 입회한 후 약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두 수사님의 삶은 주례사제가 수사님은 오직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예,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살아온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제부터 이 두 수사님의 삶은 주님과 약속한 "예, 저는 종신토록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한 이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 두 수사님의 삶의 목표이고 삶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 수사님은 언제나 또 어디에서 생활하든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예"라는 말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예"라는 한 마디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을 살아야만이 지켜지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느님이 들려 주신 소식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셨다. 결코 성모님이 약속드린 삶을 살으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이미 요셉과 약혼한 처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분이 찾아와서 느닷없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 말이나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이나,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라는 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며 또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셨으니 정말 제정신 가지고 대답할 수 있는 약속들인가? 그렇지만 마리아는 주위 사람들의 몰이해 특히 약혼자였던 요셉마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흔들림 없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였다. 그 결과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고 또 당신의 구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실 수 있었다.
주님의 종이란 주님의 하인이라는 뜻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주인을 섬기는 하인으로서 주인이 말씀하시는 것만을 하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성모님이 "예"라고 말씀드렸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삶을 바치셨듯이 어제 종신서원을 하신 두 수사님의 앞으로의 삶도 "예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한 그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두 수사님이 앞으로 살아야할 길이며 목표이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였는가? 우리에게는 ".... 위해서 준비하고 ....위해서 종신토록 살겠다."라는 "예"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각자가 가는 길이고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우선 오늘 대축일에 ‘한국 교회의 수호자’가 붙은 이유를 살펴보자.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을 인가하고 수호성인으로 성 요셉을 지정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조선선교를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하지 못하고 북경에서 병사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엥베르 주교(1796-1839)가 임명되었다. 1837년 북경에서 주교성품을 받고 조선으로 입국한 엥베르 주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공동수호자로 모실 수 있기를 교황청에 청원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 청을 받아들여 엥베르 주교가 순교한 후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성 요셉과 함께 조선교회의 공동 수호성인(Compatroni)으로 선포하였다.
다음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에 대하여 살펴보자. 우선 이 축일에 대한 생각이 마리아의 ‘탄신축일’에서 거꾸로 계산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을 기념하는 축일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9월 8일로 지냈다. 이는 마리아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에 5세기말경 마리아 성당을 지어 봉헌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방교회에서는 제84대 교황 세르지우스가 재임기간(687-701) 중에 ‘성모영보축일’, ‘성모승천축일’, ‘성모성탄축일’, ‘마리아 빛의 축일’ 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4대축일을 정하고 우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이를 경축하였다고 한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교의(敎義)와 신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마리아의 탄생 장소와 일시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탄생은 분명히 있었고, 탄생이 있으면 잉태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12월 8일이 곧 성녀 안나가 마리아를 잉태한 날이 되는 것이다. 12월 25일 주님성탄대축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3월 25일이 주님탄생예고, 즉 주님의 잉태축일이 아닌가? 동방교회가 10세기경부터 12월 8일을 지정하여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잉태 축일”로 지냈고, 서방교회에서는 1100년 캔터베리의 안셀모 주교가 자기 교구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를 로마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1708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잉태‘를 대축일로 전 세계 교회에 선포하였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따라서 1855년부터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개신교회와 동방교회는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교리상의 문제로 삼고 있다. 325년 니체아공의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란 칭호를 드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므로 마리아는 당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다. 후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잉태의 순간에 원죄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1854년 12월 8일 위풍이 당당한 교황 비오 11세가 대미사를 마치고 선언문을 낭독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올 때 베드로 대성전 안에는 경외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듦이 없으심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교의(敎義)로 확실히 선언하는 바이며, 이에 따라 모든 신자들은 이를 확실히 믿을 것을 선포한다.” 낭독을 마친 교황의 눈에서 기쁨과 경외의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4만 명의 목소리가 감사가 ‘테데움’(Te Deum)을 노래했고, 로마의 모든 성당에서 종이 울렸으며, 그날 밤 로마는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바깥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성모무염시태’ 교의를 두고 좀 지나쳤다고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교의를 성모님 스스로가 추인(追認)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1858년 2월 11일 루르드의 작은 동굴에서 일어난 성모님의 발현에서 시작된다. 성모님은 7월 16일까지 18번에 걸쳐 당시 14세의 소녀 베르나뎃타에게 발현하셨다. 3월 25일 성모영보축일, 12번째 발현한 성모님께 베르나뎃타가 “부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침묵을 지키던 성모님은 소녀의 세 번째 물음에 “나는 하자(瑕疵) 없는 잉태로다.” 하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성모님 스스로가 4년 전에 선포된 ‘무염시태’ 교의를 추인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성모님의 그 한마디 속에는 원죄(原罪)의 교리와 그리스도를 통한 강생구속 교리가 한꺼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원죄를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의는 결코 마리아를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마리아 또한 분명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녀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믿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모두가 불가능하게 여기는 엄청난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잉태’를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주님의 종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몸에 품어 하느님께 인간의 생명을 선사한 마리아는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이 엄청난 은총에 동참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고 눈물나도록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